< 77. >
77.
황당하다고 해야 할까.
천우는 실종된 그녀, 이진아가 지금까지 한국에서 계속 살아왔다는 것이 너무나도 뜻밖이라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최근 2년 전에 이진아로 생각되는 범죄자가 경찰서에 들어간 적이 있었다고 하는군.
"경찰서엔 무슨 죄로요?"
-주가조작에 대한 혐의로.
"주가조작이요?"
-예전에 한국에서 큰 작전주 한 번 터진 적이 있었지? 무슨 기술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태한기술이요?"
-그래, 바로 그거!
정확히 말하자면 태한기술 사태는 주직시장 작전이라기보다는 닷컴버블의 붕괴와 연계한 한국의 주식시장 거품이 무너진 사건이라고 볼 수 있었다.
1999년, 코스닥에 상장되었던 태한기술은 무료화상전화를 개발하고 있었고 그것은 투자자들의 엄청난 관심을 받기에 이르렀다.
이들의 주가는 무섭게 뛰어올랐고 1,890원으로 시작하여 282,000원까지 주가가 뛰어올랐던 전력이 있었다.
이들의 시가총액은 코스닥에서 단숨에 1위로 올라섰고, 그들이 만들어낸 거품은 IT시장 전체에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이것이 바로 한국판 닷컴버블이었던 것이다.
-아무튼 그 태한기술 사태가 터진 후, 주가조작 혐의로 경찰의 추적을 받았다가 3년 전에 잡혀 들어갔었데.
"그렇다면 그녀가 그 엄청난 시가총액 뻥튀기에 연루되었었단 말인가요?"
-그럴 가능성이 높은 거지. 물론, 3개월 전에 잡혔던 그녀는 증거불충분으로 풀려났어. 그녀가 거품 형성 이후, 불법으로 이득을 편취한 정황이 없다는 것이었지.
"헌데 그녀는 주민등록도 말소 되었다는데, 그녀가 동일인물이라는 건 어떻게 알아내셨습니까?"
-지문이 남아 있었잖아.
"지문이요? 그건 이미 실종자로 처리되어···."
그제야 천우는 그녀가 그 당시에 수면 위로 떠오르지 않았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건 바로 그녀가 실종자 처리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하! 실종자 처리가 되어 있었으니 실종자의 지문과 대조할 이유가 전혀 없었던 것이로군요!"
-바로 그거야. 한마디로 그 여자는 실종신고로서 자신의 신분을 세탁하게 된 거지.
"헌데 3년 전의 그 사건에서 지문이 남아버린 것이로군요."
-그래, 맞아. 경찰서에 잡혀 들어왔으니 당연히 지문을 찍었겠지?
"허어, 이것 참. 도대체 그 여자, 정체가 뭘까요?"
-다른 건 잘 모르겠지만 그 여자가 보통의 인물은 아닌 게 확실해.
"보통의 인물이 아니라고요?"
-그 여자, 한국에서만 발견된 것이 아니더라고.
"네···?"
-2년 전에는 일본에서도 발견이 되었어. 그때에도 비슷해. 경제사범으로 경시청에 끌려갔다가 증거불충분으로 풀려났는데, 그쪽에서 지문이 남아버리는 바람에 그 족적을 따라갈 수 있었던 거지.
"주로 범죄에 현장에서 그녀가 발견되는군요."
-그래, 맞아. 헌데 재미있는 것이 뭐냐면, 이 여자가 가면 갈수록 그 수법이 진화하고 있다는 점이지.
"수법이 진화한다고요?"
-태한기술의 거품이 무너질 때, 그녀는 자신이 경찰에게 붙잡힐 수 있을 만한 꼬투리를 남겨두고 말았어. 헌데 경시청에서 잡혔을 때엔 그 단점을 이미 보완한 것 같더군.
"단점을 보완한다···."
-최근 1년 전에는 그녀가 프랑스에서 잡혔어.
"이번에는 무슨 죄목입니까?"
-똑같아. 외환관리법 위반으로 들어왔는데, 이번에도 저번보다 진화했더군.
"그러니까, 그녀는 사건을 통해서 자신을 끝도 없이 진화시키고 있었던 것이로군요!"
-바로 그거야. 이 여자, 도대체 뭐하는 여자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번에는 또 어떤 괴물 같은 짓을 했을지 몰라.
"괴물이라!"
이진아는 이제 정말 괴물이 되어 있었다.
제 아무리 뛰어난 경찰과 금융전문가들이 투입된다고 해도 이제 그녀를 잡을 수 없을 지경이었다.
크고 작은 사건을 통해서 자신을 단련하고 단점을 보완한 그녀의 노력은 전문가들조차도 혀를 내두를 정도였던 것이다.
"혹시 그렇다면 이번 미국의 채권사건도 그녀와 관련이 있지 않을까요?"
-달러화 폭주 이후에 있었던 채권매도 사건 말이야?
"만약 지금의 그녀라면 충분히 그걸 성사시키고도 남을 것 같은데요."
-하지만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이렇게까지 큰 사건을 벌인 전적이 없잖아.
"어떤 일이든 시작은 있기 마련 아닙니까?"
-그렇다면 자네의 말대로라면 그녀가 이번 사건을 일으키기 위해 끝도 없이 진화를 해오고 있었단 말인가?
"이번 사건뿐만 아니라 앞으로 더 많은 사고를 일으키기 위해 진화한 거죠."
-허어, 그런 말도 안 되는···. 헌데 자네는 왜 그렇게 생각하는 건가? 뭔가 집히는 것이라도 있어?
"확실하지는 않습니다만, 아무래도 그녀는 죽은 로이 조로스와 관련이 있을 것 같습니다."
-로이 조로스라.
"그가 죽기 전에 저에게 했던 말을 전해드렸었죠?"
-그래, 무슨 범죄연구소가 있다는 그 말?
"네, 맞습니다."
-하지만 자네는 그 말을 정말로 다 믿는 건가? 나는 너무 허무맹랑해서 믿을 수가 없던데 말이지.
"그러나 이진아를 한 번 보세요. 로이 조로스가 죽기 전에 했던 말과 연결이 되지 않습니까?"
-흐음, 그러니까 마피아 집단에서 경제사범을 교육시키기 위해 이런 크고 작은 사건들을 조장했단 말인가?
"한 사람을 진화시켜서 범죄세력의 구심점을 만들어놓으면 보다 더 큰 사고도 칠 수 있는 거 아닙니까?"
-설마하니 그런 미친놈들이···.
처음엔 믿기지 않는 눈치였지만 아론 테이트도 이제 슬슬 흔들리기 시작했다.
렉스테리아를 움직이는 그 정체불명의 단체라면 그렇게 하고도 남을 것 같았던 것이다.
-그래, 자네의 말을 듣고 보니 그럴 수도 있겠다 싶어.
"아마도 제 생각이 맞을 겁니다."
-만약 그렇다면 아주 큰일이잖아. 지금까지 범죄조직들이 쌓아온 노하우가 한 두 개가 아닐 텐데, 그걸 실전을 통해 익힌다면 최악의 병기가 탄생하는 거 아니야?
"무서운 일이 벌어지겠죠."
-제기랄, 이쯤에서 그만 CIA를 나가려했더니, 아무래도 안 되겠군.
"CIA를 나가시려고 했다고요? 이렇게 갑자기요?"
무심결에 내뱉은 자신의 말에 아론 테이트는 당황하고 말았다.
-험험! 그게···.
"CIA를 버리고 그렇게 가버리면 남은 사람들은 어떻게 하라고요?"
-이젠 나도 내 인생을 좀 살아가야하지 않겠나? 환갑이 넘어서 이게 도대체 뭐하는 짓인지 모르겠어.
"하지만 적어도 이번 정권이 끝장 난 이후에 떠나셔야하지 않겠어요? 그래도 저 빌어먹을 웜우드 가문이 몰락하는 건 보고 낙향하셔야죠."
-휴우, 그래. 안 그래도 그래야 할 것 같아. 자네의 말을 들으니 정신이 번쩍 들었거든.
인간은 언젠가 한 번쯤은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게 되어 있다.
그게 어떤 사건과 사고로 인해 비롯되던 아니던 간에 인간이 스스로의 발자취를 따라가면 약간의 허무함을 느끼게 된다.
지금까지 자신이 이뤄놓은 것들이 생각보다 많지만, 고작 이런 것 때문에 자신의 인생을 허비했나 싶기도 하기 때문이다.
아론 테이트의 경우엔 자신이 이 자리까지 오는데 있어 사람으로서 하기 힘든 것도 했었기에, 그것이 과연 옳은 대의였나 싶었기에 약간의 우울증이 온 것이었다.
허나 그는 언제나 그랬듯, 다시 털고 일어날 것이다.
아직 그는 조직을 위해 자신이 해 줄 일이 남아있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유종의 미를 한 번 거두어보지 뭐.
"잘 생각하셨어요."
-아무튼 간에 이 사실을 MI5에도 알려.
"그래도 되겠습니까?"
-물론이지. 언제까지 우물 안 개구리처럼 우리끼리만 먹고 살겠다고 버티겠나? 그건 아무래도 세상에서 제일 멍청한 짓 같아. 이 나이쯤 되니까 깨닫게 되는군.
"허참, 은퇴할 때가 정말 되긴 했나보네요."
-말했잖아. 내 동기들은 이미 고향에서 목장이나 운영하고 있다니까.
MI5와 CIA의 공조는 생각보다 그 전례를 찾아보기 힘든 바, 천우는 아론 테이트의 발언이 꽤나 놀라웠다.
-아무튼 간에 영국 친구들에게도 안부 잘 전해달라고.
"그러겠습니다."
천우는 조만간 CIA에 변화의 바람이 불수도 있겠다 싶었다.
***
MI5는 천우가 해준 말을 듣곤 꽤나 크게 놀랐다.
"그 고지식한 CIA가 알아서 정보공유를 해왔다···?"
"그만큼 경각심이 필요한 때라고 생각한 것이 아닐까요?"
"뭐, 그건 그렇겠군요."
에밀리아 로즐리는 천우에게 CIA와의 공조를 더욱 원활하게 하기 위해 직접 줄을 댈 것임을 시사했다.
"우리도 이제는 고지식한 수사방식을 버리고 국제공조에 더욱 적극적으로 나서야겠네요."
"그것 참 잘 되었네요."
"아무튼 간에 수고 많으셨습니다."
정보공유가 이뤄지면 이진아를 잡아서 그 배후에 대해 알아보기가 더 쉬워 질 것이었다.
그녀는 천우에게 또 다른 소식을 전해주었다.
"이번에 렉스테리아의 중간보스가 또 석방되었습니다."
"···또요?"
"이번에 벌써 5번째입니다. 이러다간 렉스테리아가 다시 완전체가 되겠어요."
렉스테리아의 조직원들은 미국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영국에서도 죄를 지은 놈들을 잡아 체포하였기 때문에 영국 감옥에서 수감생활을 하는 조직원들이 있었다.
허나 이젠 그들이 슬슬 밖으로 나오려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추세라면 아마 앞으로 1년 내로 90% 이상이 석방될 겁니다."
"으음."
"그러니 이젠 정말로 런던의 검은돈을 털어내야만 합니다."
이미 몇 달 전부터 시행되었던 작전이기에 MI5입장에서도 큰 진전이 있었다.
허나 좀처럼 렉스테리아의 정보는 걸려들지 않았다.
그녀는 마피아와의 공조로 알아낸 정보에 대해 설명했다.
"안 그래도 골드라는 자가 가지고 온 정보에 의하면 아무래도 스위스 쪽으로 돈이 빠져나간 것 같더군요."
"스위스라."
"스위스 은행의 계좌로 비자금을 빼돌렸다면 제 아무리 우리 MI5라고 해도 추적이 불가능합니다. 그건 잘 아시죠?"
스위스 은행은 고객의 정보를 절대 반출하지 않는 집단으로 유명한데, 제 아무리 범죄에 연루되었다고 해도 그 내막을 털어내기가 상당히 까다로웠다.
아무래도 렉스테리아와 그 계열의 범죄조직들은 애초에 MI5의 추격까지 계산에 넣은 것 같았다.
"스위스로 자금이 빠져나갔다면 다른 제 3국으로 돈이 빠져나갔을 가능성도 있겠네요?"
"물론이죠. 우리는 특히나 남미로 꽤 많은 돈이 흘러갔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남미의 카르텔은 미국으로 엄청난 양의 마약을 팔아치우면서 얻은 현금을 관리한은 노하우를 가지고 있었다.
예전에야 그야말로 현금다발을 땅에 묻고 벽에 시멘트를 발라 보관했다곤 하지만, 이제는 세월이 많이 흘렀다.
그들의 자금회전에도 이제는 꽤 많은 노하우가 밀집되었고, 이제는 아예 아랍이나 러시아 등의 채권을 구매해서 비자금을 꼬불치고 있었다.
"아무래도 카르텔 쪽이 의심됩니다."
"카르텔이라."
"얼마 전, 영국에서 거대 마약상이 체포된 적이 있어요. 그의 말에 따르자면 최근 프랑스에서 꽤 많은 자본이 콜롬비아로 들어왔다고 했었거든요."
"그게 세탁이 되어 다른 나라로 빠져나갔을 수도 있겠네요."
"그래요. 바로 그겁니다."
에밀리아 로즐리는 웃으며 말했다.
"뭐, 아무튼 간에 이 일은 이제 우리에게 맡겨두고 스페인에서의 사업이나 잘 마무리하셨으면 좋겠네요."
"고맙습니다."
렉스테리아라는 조직, 그 배후에 있는 상부조직에 대한 궁금증이 자꾸 일어나는 천우였다.
< 77.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