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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2)
2006년 6월, 미국에서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 발생했다.
총 20건의 살인사건에 대한 용의자가 스스로 LA경찰에 자수를 해 온 것이었다.
그가 저지른 사건은 최근 세간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미국 상원의원 마크 무디를 포함한 흉악사건 5건을 포함하고 있었다.
그는 경찰의 조사에서 살인동기를 단순 '분노'라고 답했다.
자신은 원래 분노조절장애가 있었는데, 이것이 발전해서 조현병을 앓게 되었다고 증언했다.
제 아무리 정신병자라곤 해도 미국의 법정에서 정상참작이 되지 않는 점을 감안한다면 핑계로는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프로파일러들의 공통된 의견이었다.
프로파일러들은 살인용의자 엔디 와일러가 뭔가 또 다른 꿍꿍이가 있는 것 같다고 말했지만, 그 꿍꿍이가 무엇인지 알 도리는 없었다.
어쨌거나 그는 지금까지 수수깨끼로 남아 있던 사건들에 대한 답변을 남겨준 셈이었고, 이는 미국 사회에 생각지도 못한 파장을 가지고 왔다.
그것은 바로 FBI와 CIA에 대한 실망이었다.
지금까지 연방수사국과 정보국은 대외적으로 상당히 큰 신뢰를 받는 기관이었으나, 이번 사건으로 인하여 그 위신이 약간 떨어진 것이 사실이었다.
무려 전기톱으로 상원의원을 썰어서 죽였던 이 엽기적인 사건에서 엔디 와일러는 수사의 단점들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쏟아냈다.
물론, 그는 FBI가 바보라는 등, 한 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사건을 재구성하는 과정에서 너무나도 당연한 수사의 구멍들을 집어내고 그것을 언론에 공개했을 뿐이었다.
FBI는 분명 사건현장을 몇 번이고 반복해서 검증하였으나, 모든 것은 인간이 하는 일이다보니 필히 구멍이 생길 수밖에는 없었다.
그런 인간의 실수를 파고드는 엔디 와일러의 치밀함은 경찰은 물론이고 CIA조차도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허나 엔디 와일러의 완벽함은 대국민의 불신으로 다가왔다.
이제 슬슬 경찰과 정보조직의 개편을 실시해야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었고, 심지어는 하원의원들에게 엄청난 양의 청원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는 실정이었다.
허나 현 정부는 경찰이나 정보조직에 대한 개혁의지는 전혀 없었다.
지금 그들은 달러화 급락과 더불어 미국 전역으로 쏟아져 들어온 채권으로 인해 큰 몸살을 앓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달러화 하락을 위해서 다시 자금을 풀자니 재정적자가 너무 심각했고, 그렇다고 해서 다시 독일이나 프랑스를 압박하자니 명분이 서지 않았다.
결국 남은 것은 또 다시 일본을 압박해서 엔화를 절상시키는 것이었는데, 이미 일본도 호황에서 벗어나 본격적인 성장절벽에 도달해 있었기에 방법이 없었다.
한마디로 연방당은 지금 진퇴양난의 상황에 빠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런 가운데 뜻밖의 자백들이 또 이어지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영국이었다.
그는 영국에서 벌어졌던 살인사건 20건 중에서 기사작위를 가진 사업가와 하원의원을 포함한 유명인사 10명을 살인한 사람이었다.
살인수법은 가지각색이었지만 그의 살인에는 공통점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시신에 피가 하나도 남아있지 않다는 점이었다.
영국경찰은 살인사건 피의자 빌리 스토너를 붙잡아 진술을 받았는데, 살인수법에 대해서는 주사기를 사용했다고 자백했다.
"사람의 목을 그어 죽인 후, 거꾸로 매달아서 피를 뽑습니다. 물론, 그 전에 양을 줄이기 위해서 주사기를 사용하고요. 그렇게 하면 무게가 줄어서 매달기가 훨씬 수월해지거든요."
경찰은 황당한 나머지 왜 굳이 피를 빼야했냐고 물었다.
그러자, 빌리 스토너는 아름다움이라고 답했다.
"인간은 핏기가 없는 순간이 가장 아름답습니다. 그게 바로 시체가 가진 매력이라고 할 수 있죠."
프로파일러들은 그가 정신적으로 큰 문제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정신과전문의들 역시 그가 살인에 대해 취미가 있었고 그것은 폭력성과 치밀함이 서로 만나며 폭발하였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의 심리상태가 어떠했건 간에 빌리 스토너의 범행은 사회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빌리 스토너의 직업이 바로 변호사였기 때문이었다.
지금까지 인권변호사로서 활동해왔던 그는 억울한 죄수들을 풀어주고 어려운 처지에 놓인 사람들을 구제해주는 등의 선행을 베풀며 살아온 보기 드문 의인이었다.
덕분에 영국 왕실에서 표창도 여러 번 내려주었고 총리에겐 공식 지원금도 받았었다.
헌데 그런 대표적인 의인이 바로 사람을 20명이나 살해하고 자신의 취향대로 피까지 쭉 빼서 그걸 감상하면서 지냈다는 건, 엄청난 충격 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 그는 경찰의 수사방식에 허점이 너무 많다고 지적했다.
"현행의 수사방식으로는 아마 앞으로 일어나는 살인사건 중에서 작정하고 증거를 인멸하려는 경우엔 절대로 범인을 잡을 수 없을 겁니다. 제가 장담하죠."
법조인의 이런 폭탄발언은 언론을 쑥대밭으로 만들기에 이르렀다.
그의 발언이 사실인지 아닌지,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지적되어 온 경찰의 맹점을 그가 정확하게 찔렀고 그것이 결국 곪았던 부분을 터트려버린 것이었다.
결국 영국경찰은 무능함이라는 굴레에 갇히게 되었고, 시민들은 조속한 조직의 쇄신을 촉구하는 메시지를 끝도 없이 보내오고 있었다.
이런 범죄자의 커밍아웃은 미국과 영국 도처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자신이 살인을 저질렀다면서 증거를 들고 직접 경찰서를 찾아와 자수를 하는데, 이제는 연방경찰조차도 그들을 믿을 수 없다는 식으로 나올 정도였다.
사상초유의 사태가 벌어지고 있던 가운데, 미국에서 범죄자 알프레드 블랙마쉬가 출소하였다.
알프레드 블랙마쉬는 살인교사 및 폭행, 납치교사 등의 죄목으로 교도소에 수감 중이었다.
그는 얼마 전까지 미국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렉스테리아의 수뇌부 중 한 명이었다.
법원은 그에게 적용되어 있던 살인사건 두 건에 대해 무죄를 선고할 수밖에 없었고, 결국 알프레드 블랙마쉬는 즉시 자유의 몸이 되었다.
지금까지 그가 치른 형기에 보석금까지 추가하여 금방 풀려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이제 연방경찰은 그를 붙잡을 명분이 없었다.
콰앙!
이른 아침, CIA 정보본부장 다이애나 워커가 책상을 두들겨 팼다.
"제기랄! 이런 식으로 렉스테리아의 끄나풀들을 족족 풀어주면 도대체 뭐가 남는다는 거야?!"
"하지만 본부장님, 그렇다고 해서 죄가 없는 사람을 그냥 묶어둘 수는 없는 노릇 아닙니까?"
"그러니까 애초에 그놈들을 다시 CIA로 끌고 와서 수사를 진행했으면 얼마나 좋아?"
다이애나 워커는 국장에게 알프레드 블랙마쉬를 풀어줘선 절대로 안 되기 때문에 조속히 CIA로 데리고 오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그는 다이애나를 자리에서 밀어내겠다고 윽박지르며 그녀의 의견을 아예 묵살해버렸다.
국장이 저렇게 지랄하고 나서니 부국장 아론 테이트로서도 어쩔 수가 없었다.
다이애나는 걱정이 태산이었다.
"이제 겨우 한 사람이 풀려났지만, 이건 시작에 불과해. 앞으로 렉스테리아는 물론이고 마피아나 살인청부업자들이 대거 풀려날 거라고."
1급 살인부터 살인교사, 심지어는 대량 납치와 같은 엄청난 일을 저지른 사람들까지 풀려날 판이었다.
그녀는 지푸라기라도 잡아보는 심정으로 부국장을 찾아갔다.
아론 테이트 역시 머리가 아픈 듯, 심란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부국장님! 정말 우리가 언제까지 이러고 당하고만 있어야 한단 말입니까?!"
"···시끄러워. 귀 안 먹었으니까 조용히 좀 말하게."
"답답해서 그러지 않겠습니까?"
"자네만 답답하겠나? 국장이 싸는 똥을 다 치워야하는 내 입장은 어떻겠냐고."
"그야···."
"CIA에서 나보다 더 신경이 곤두서 있는 사람이 있으면 나와 보라고 그래."
"끄응."
아론 테이트는 그녀를 다독여주었다.
"그 마음, 내가 아주 잘 아네. 하지만 어쩌겠나? 상황이 이렇게 되어버린 것을."
"그나저나 갑자기 저렇게 떼로 증인들이 쏟아져 나온 이유가 과연 뭘까요?"
"그러게 말이야."
"지금까지 내동 가만히 있다가 하필이면 이 타이밍에 말입니다."
채권역류사태부터 달러화 급등 등, 연이은 악재가 겹치는 이 타이밍에 미국을 뒤흔든 것은 분명 뭔가 꿍꿍이가 있음이라고 그들은 생각했다.
허나 아무리 생각해봐도 렉스테리아를 이제 와서 재건하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아론 테이트는 영국은 지금 어떤 상황인지 궁금했다.
"MI5는 어떻게 지내고 있데?"
"그쪽도 지금 아주 난리도 아니랍니다. 국장이 교체되네 마네, 아주 말이 많은 모양입니다."
"영국에서도 자수를 해왔지?"
"그쪽에서만 벌써 10명이 넘게 자수했답니다."
"···제기랄, 미제사건이 그렇게도 많았던가?"
"지금까지 차곡차곡 쌓인 사건을 합친다면 이것도 상당히 적은 편이죠 뭐."
"으음, 그건 그렇군."
"부국장님, 아무래도 저놈들의 뒤를 좀 캐봐야 할 것 같지 않습니까?"
"새로운 용의자들 말이야?"
"네, 그렇습니다. 아무래도 뭔가 큰 사고를 치려고 폼을 잡는 것 같지 않습니까?"
아론 테이트는 슬그머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래."
"기획실과 연계해서 작전을 펼칠 수 있도록 허가해주십시오."
"대신 이건 자네들만 아는 사실이야. 나는 그걸 공식으로 허가해 줄 수 없다는 건 알고 있지?"
"물론입니다."
"만약 일이 잘못되면 자네들과 나만 옷을 벗으면 그만이지만 조직 자체가 무너지면 곤란하니까 알아서 처신들을 잘 하리라 믿네."
"네, 알겠습니다."
아론 테이트는 그녀에게 명령을 내려준 후, 그 자리에 녹초가 되어 뻗어버렸다.
의자에 깊숙이 몸을 묻어버린 그는 깊은 한숨을 쭈욱 내뱉었다.
"후우, 제기랄···. 이제 이 짓거리도 더 이상 못 해먹겠군."
어느 새 그의 나이, 벌써 60대다.
남들은 이제 슬슬 은퇴해서 낙향하고 있는 마당에 혼자서 이러고만 있는 것이 서글프게 느껴질 때도 있었다.
허나 그놈의 사명감이 뭔지, 어쩔 수 없이 CIA에 머물게 만들고 있었다.
그는 스스로 한 가지 다짐을 해본다.
"이번 사건만 해결하면 반드시 낙향하고야 만다."
아마 그가 사라진다면 CIA의 요원들은 일제히 들고 일어날 것이다.
안 그래도 국장이 개판을 치는 바람에 조직에 금이 가게 생겼는데, 그 정신적 지주나 마찬가지인 아론 테이트가 사라진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하지만 그는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차라리 내가 인간의 도리를 잊어버리는 것이 빠르겠어."
그는 아무도 모르게 사직서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사실, 지금까지 몇 번이고 사직서를 써두었고 그걸 제출한 적도 있었다.
허나 그는 번번이 사직을 거절당했다.
아예 사직서를 읽지 않고 그 자리에서 찢어버리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동양으로 따진다면 환갑도 넘은 그를 CIA에서 더 이상 붙잡을 권한은 없을 것이었다.
"이번에 사직서 수리가 안 된다면 스스로 강등이라도 해서 내려가야겠어."
CIA는 고위관계자로 올라갈수록 정년퇴임에 대한 울타리가 거의 사라지기 때문에 그가 정보조직을 벗어나자면 평사원, 혹은 단순 요원신분이 되는 것이 가장 간단했다.
그는 명예를 버리고서라도 평안을 찾아야겠다, 그리 생각했다.
허나 그런 그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그걸 받은 그는 사직서를 쓰던 펜을 슬그머니 내려놓았다.
"···그 여자를 찾았다고?"
-네, 흑발의 파란눈. 그 여자의 현재 위치를 알아냈습니다.
< 76.(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