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노머신 재벌 3세-149화 (149/202)

< 75. >

75.

여전히 통제실 안.

바네사 야코브는 이 살인이 계획적인 것은 물론이고 상당히 치밀하게 짜진 각본대로 판이 돌아갔을 것이라고 예측했다.

"CCTV는 아예 전손입니다. 통제실을 오가는 관제센터에도 아예 CCTV화면이 잡히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음성녹음은요?"

"음성녹음이라니요?"

천우는 그녀에게 아까 1유로를 주고 산 테이프를 넘겨주었다.

"제가 혼잣말하면서 원맨쇼 하는 것을 남기기 싫어서 1유로 주고 산겁니다."

"누구에게요?"

"통제실에 있던 의문의 남성에게 서요."

"아아, 아까 그 몽타주의 남자 말인가요?"

"네, 그렇습니다."

"흐음. 하지만 CCTV이외에 다른 건 없는 것으로 파악되었는데요."

"그럼 이건 뭐란 말입니까?"

"글쎄요. 정말 녹음이 되어 있기는 한 겁니까?"

천우는 통제실에 있던 라디오 겸 카세트를 가져와서 녹음테이프를 재생시켜보았다.

그러자, 너무나도 뜻밖의 음성이 들렸다.

-···이런 씨발, 설마하니 벌써 나를 쫓아와 죽이려 벼르고 있었을 줄은 몰랐는데!

우당탕탕!

중간에 음성과 함께 뭔가 물건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고, 그 이후로는 계속된 적막만이 흐를 뿐이었다. 그리고 간헐적으로 떨려오는 화면만이 이 안에서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제기랄, 뭐가 어떻게 된 거지?'

음성은 딱 거기까지였다.

경찰은 화면을 끝까지 돌려보았고, 거기서 천우의 혼잣말 장면이 연출되어 있었다.

바네사 야코브는 웃으며 말했다.

"이로서 알리바이는 성립 되었네요."

"···대신 나의 어두운 족적이 하나 더 남게 되었네요."

"이건 저희가 가지고 가도 되겠죠?"

"뒤의 소리만 지워주신다면야."

"그건 걱정하지 마세요. 사생활은 철저하게 보호해드립니다."

"그렇다면 저야 상관없죠."

천우가 경찰과 음성을 듣고 있는 동안 범죄현장은 보존되었고 부검여부를 결정하기 위해서 시신은 안치소로 보내졌다.

바네사 야코브는 천우에게 명함을 한 장 건넸다.

"혹시라도 누군가 당신을 찾아온다면 연락해주세요. 원하신다면 증인보호를 신청하실 수도 있습니다."

"아니요, 그 정도까진···."

"그럼 살펴가세요."

천우는 그 길로 차를 타고 산비탈을 내려갔다.

다음 날.

스위스 신문에 살인사건에 대한 뉴스가 대문짝만하게 실렸고 CIA와 MI6에서는 로이 조로스를 죽인 범인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CIA는 천우에게 증인보호프로그램을 시행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아론 테이트는 직접 스위스로 날아와 상황을 살폈다. 그리고 호텔에 투숙하고 있던 천우를 찾아왔다.

"괜찮나?"

"···싱숭생숭 하죠."

"하필이면 한 잔 하고 내려오는 길에 그런 봉변을 당할 건 또 뭐람. 자네가 충격이 크겠어."

"충격도 충격이지만 음성녹음을 남긴 이유가 너무 궁금해서 잠이 안 옵니다."

아론은 천우에게 케이블카의 설계도를 보여주며 말했다.

"안 그래도 나 역시 그게 좀 이상해서 설계도를 살펴봤는데 말이야, 어디를 봐도 음성을 녹음할 수 있는 장비는 설치되어 있지 않았어."

"그럼 누군가 일부러 음성을 녹음해서 저에게 건네주었단 말인가요?"

"그런 셈이지."

"도대체 왜···."

"내 생각에는 말이야, 두 가지 추론이 가능할 것 같아."

아론은 그 누구보다 이 바닥에서 유명한 사람이었고 CIA에서 잔뼈가 굵은 이였다.

그는 거의 동물적인 감각으로 추론을 시작했다.

"만약 누군가 자네에게 로이 조로스가 죽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사건을 꾸몄다면 이해가 되지 않겠나? 정말로 로이 조로스를 죽이려 했던 것이라면 마을로 올라와서 조용히 처리할 수도 있었어. 근방에 시체 하나 처리할 구석은 얼마든지 있잖아."

"으음, 하긴."

알프스 산맥은 장황하고 거대한 능선이 끝도 없이 이어져 있는 형국이다.

만년설이 가득한 이곳에 작정하고 사람을 묻는다면, 산사태가 일어나지 않는 이상은 찾아내기 힘들 것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범인은 자네에게 반드시 로이 조로스가 죽었다는 것을 알리고 싶었던 거야. 아니, 어쩌면 자네를 포함해서 모든 사람에게 알리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르지."

"어째서요?"

"글쎄, 그럴 필요가 꼭 있었나보지. 그리고 한 번 생각해봐. 그들이 작정했다면 자네를 용의선상으로 끌어들일 수도 있었어. 하지만 그들은 오히려 자네에게 알리바이 증명을 위한 도구까지 마련해주었어. 이건 뭘 뜻하겠나?"

"목적은 나를 담가버리는 것이 아니다···?"

"그 너머에 뭔가가 있는 거겠지."

아론은 프로파일링에도 일가견이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 심리를 이렇게 단정 지었다.

"언제든지 너의 목덜미를 틀어쥘 수 있다, 그런 뜻 인 것 같아."

"자신의 힘을 과시하는 것이란 말인가요?"

"로이 조로스를 죽인 유력한 용의자가 누구인 것 같아?"

"렉스테리아 아니겠습니까?"

"그래, 그놈들. 그놈들은 수뇌부를 감옥에 쳐 넣는다고 해서 결국 자신들을 어찌 할 수 없다는 걸 보여주고 있잖아. 이건 바로 그 연장선이라고 볼 수 있지 않겠어? CIA와 MI6, 그리고 자네에게 힘을 과시하고 있는 거지."

이제는 더 이상 자신들의 흔적을 숨길 필요가 없다는 듯, 아주 대놓고 움직이고 있는 그들이다.

심지어 중국 쪽 자본을 묶어버렸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들은 미국에서 활개를 치고 있었다.

아론은 천우에게 아무래도 영국계 자본을 건드리는 건 그리 좋은 생각이 아닌 것 같다고 조언했다.

"이쯤에서 발을 빼는 것이 좋겠어."

"당했으면 갚아줘야 하는 것이 인지상정 아닙니까?"

"자네 자존심도 좋은데 목숨은 지켜야하지 않겠나?"

제 아무리 천우라도 총탄에 맞으면 한 방에 저승길로 떠날 수 있다.

허나 지금의 천우라면 그들에게 쉽게 당하지는 않을 것이다.

"괜찮아요. 저는 제 길을 가렵니다."

"으음, 그렇다면야. 요원들을 몇 붙여줄까?"

"소식통이나 좀 지원해주시죠."

"그래, 알겠네."

아마 아론도 천우를 말릴 수 없다는 것쯤은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어떤 방식으로든 목적이 생기면 그것을 달성할 때까지 결코 멈추지 않는 것이 천우의 습성임을 오래 겪어 알고 있었던 것이다.

"거의 20년 다 되어가지? 자네와 내가 알고 지낸지 말이야."

"몇 년 더 있으면 그렇게 되겠지요."

"그 시간, 절대 짧지 않다네. 오래 알고 지낸 사람의 장례는 지내주기 싫으니 조심해서 행동해."

"명심하겠습니다."

천우는 그길로 당장 영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

로이 조로스의 죽음에 반응한 것은 MI6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천우의 연락을 받곤 즉각 렉스테리아의 자금줄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영국의 금융가를 죄다 뒤져서라도 반드시 놈들을 발본색원 해내고야 말겠다는 의지를 불태우고 있었다.

허나 그게 또 말처럼 쉽지가 않았다.

대부분의 검은돈은 차명으로 회전해 부동산과 펀드에 분산되어 투자된다.

그 비율을 따진다면 부동산이 압도적으로 많은데, 제 아무리 영국정부라곤 해도 부동산의 실 소유자를 일일이 찾아다니면서 그 뒤를 캔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 양이 실로 방대하기도 한데다가 잘못했다간 사생활 침해나 인권문제 등으로 번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아이러니하지만 MI6는 이 사건을 뒷골목 마피아들을 통해 해결하기로 했다.

마피아라면 공권력도 아니고 이 방면에서는 최고의 전문가 집단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천우는 영국계 마피아인 이스턴골드의 수장을 만났다.

제레미야 골드, 이 바닥에서는 그를 골드라고 부른다고 했다.

"반갑소. 제레미야 골드요."

"최천우입니다."

제레미야 골드는 14살 때부터 조직의 살인청부업자로 나섰는데, 그의 눈 밑에는 조직의 히트맨을 뜻하는 눈물점 문신이 무려 5개나 있었다.

눈물점 하나만 있어도 MI6에서는 요주의 인물로 간주하는데, 이는 히트맨의 등급을 표시하는 지표이기 때문이었다.

눈물점 하나만 해도 기본적으로 사람 50명은 죽여 봤다는 소리였고 이게 5개라는 건 암살을 밥 먹듯이 했다는 뜻이었다.

제레미야 골드는 30년 동안 조직에서 일하며 대외적으로는 로비스트로 활동했다.

그 덕분에 인맥이 넓어졌고 그 인맥으로 비자금 관리 사업으로 진출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 찾고 싶은 것이 뭐라고요?"

"해외에서 들어온 비자금들입니다. 그 정보를 좀 얻고 싶은데요."

"으음, 해외비자금이라."

두 사람은 런던이 훤히 보이는 카페에 앉아 있었는데, 제레미야 골드는 바깥의 건물들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의 손가락이 향하는 곳은 고층빌딩부터 아주 오래된 고건물까지, 아주 다양했다.

"영국이 2차 세계대전에서 나치의 무차별 폭격을 받았음에도 도시는 건재합니다. 그 이유가 과연 무엇일까요?"

"아무래도 강대국으로 살아온 지 오래되었기 때문에 그만큼의 체력이 있었던 것이겠죠."

"맞아요. 당신의 말 그대로 영국은 스페인에 이어 해가지지 않는 나라로 군림해 왔습니다. 그 저력이 쌓여서 지금의 런던이 만들어 진 것이죠. 그만큼 오래된 강대국의 뒷골목입니다. 해외에서 들어온 비자금이 어디 한 둘이겠어요? 저 중에 적어도 1/3은 해외 비자금을 짊어진 차명이거나 차명으로 지분을 사들여 건물을 소유하게 되었을 겁니다."

"한마디로 골라내기가 불가능하다···."

"잘 아시는군요."

"으음."

"다만, 한 가지 힌트를 드릴 수는 있죠."

"힌트요?"

"이 바닥에도 룰이라는 것이 존재합니다."

그는 카페 테이블에 있던 메모지에 그림을 그려나가기 시작했다.

마치 피라미드처럼 되어 있는 메모지의 그림은 과연 무엇을 표현하려는 것일까.

제레미야는 피라미드의 꼭대기에 왕관을 하나 그려 넣었다.

"이 사람이 대외적으로 자금세탁을 해주는 사람입니다. 속칭 크라운이라고 하죠."

"얼굴마담 같은 사람인가요?"

"그렇다고 볼 수 있죠."

그는 크라운에서 갈래를 내려 하나씩 다른 무늬를 그려내기 시작했다.

"크라운 아래로 수많은 차명들이 존재하게 됩니다. 이 크라운은 보통 거대 자산가로 분류되는데, 해외 투자로 거두어들인 수익으로 회사를 운영한다고 말하곤 하죠."

"으음."

"헌데 이들이 사들인 건물은 보통 그 관계가 상당히 복잡합니다. 명의는 한 사람 명의인데, 건물을 구매했던 당시의 내역을 살펴보면 뿌리를 알아내기조차 힘든 경우가 대부분이죠."

"뒤가 복잡한 사람들은 100% 자금세탁을 한 사람들이다?"

"그렇습니다. 이 구조를 잘 기억하세요."

보통의 부동산 투자가들은 거래를 위해서라도 이해관계를 이토록 복잡하게 해두지는 않을 것이다.

행여나 그렇다고 해도 이렇게까지 복잡하게 꼬아놓는 경우는 아마 없을 터였다.

천우는 그에게 설명을 듣다가 불현 듯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이런 노하우를 알려주면 당신이 위험하지 않겠어요?"

"···렉스테리아에게 받을 빚이 좀 있습니다."

"아하!"

"정보는 내가, 행동은 당신이 해주었으면 하는데요."

무슨 사정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는 분명 전면에 나설 수 없는 사연이 있음이 분명해보였다.

'MI6와 마피아의 공조라.'

뭐가 뭔지는 몰라도 충분히 흥미가 있음은 확실했다.

< 75. > 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