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4. >
74.
MI5에게 CIA가 가져다 준 문서를 건네주자, MI5부국장 테오도르 브라이엄은 천우에게 뜻밖의 물건을 전해주었다.
바로 로이 조로스의 현 주소지였다.
"아마도 지금 이 순간, 소재처가 가장 궁금할 사람이 바로 당신 같아서요."
"작정하고 숨은 사람을 어떻게 찾아냈습니까? 차명이 몇 백 개는 될 텐데."
"그런 무지막지한 인물의 뒤에 감시자를 붙이는 건 당연한 일 아닙니까?"
"허참, 무시무시한 사람들이시네요."
"그게 우리의 일인데 어쩌겠습니까?"
테오도르 브라이엄으로 인해 뜻밖의 소재파악에 성공한 천우는 곧장 알프스 산맥 중턱의 작은 마을로 향했다.
이곳에는 크고 작은 펜션과 리조트가 몇 개 위치해 있었는데, 관광업에 종사하지 않는 사람들은 대부분 목축업이나 낙농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로이 조로스는 민박과 낙농업을 영위하고 있다고 하였다.
"천하의 환투기꾼 조로스가 민박집 주인이라니. 이것 참, 놀랄 '노' 자로구먼."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과연 조로스가 구미의 환투기 구축세력이라는 것을 알고 있을까.
주소지를 받기는 했지만 그가 사는 곳이 정확하게 어디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그 사이에 몇몇 가구가 이동을 하고 집을 새로 짓는 바람에 주소지가 변경되었던 것이다.
천우는 산봉우리에 있는 작은 펜션을 찾아갔다.
똑똑.
"실례합니다."
여름이나 초겨울에 특히 사람이 많이 몰리는 이곳은 아직 성수기라고 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트레킹을 하기에도 버거운 이곳에 사람이 찾아오는 게 생각보다 쉽지 않았던 것이다.
천우가 문을 두드리자, 안에서 한 중년여자가 걸어 나왔다.
"묵었다 가시게요?"
"그보다 사람 좀 찾으려고 하는데요."
"사람이요?"
천우는 로이 조로스가 사용 중인 차명을 거론하였다.
"콜튼 브라셔라는 사람을 찾습니다만."
"아하! 브라셔 씨요? 우리 집 퐁듀를 그 집에서 대주고 있잖아요."
"그렇습니까?"
"그러고 보니 이제 곧 올 때가 다 되었는데···."
천우는 이곳에서 그를 기다리기로 했다.
"유로화도 받으신다면 들어가서 식사 좀 하고 있어도 됩니까?"
"물론 받죠!"
그녀는 펜션의 푯말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유로화 환영! 파운드화도 받습니다!]
가끔가다가 잔돈을 거슬러주기가 귀찮거나 유로화 시세를 잘 모르는 사람 등이 자국의 화폐만 받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허나 최근에 유로화가 꽤 많이 오르면서 이런 시골에서도 유로화가 통용되고 있었다.
'이젠 정말 유로화가 실제로 쓰이고 있구나.'
80년대만 해도 EC(유럽공동체)에서 유럽이 독자로 기축통화를 공급하자고 의견만 분분했을 뿐이지, 전문가들은 여러 가지 문제를 들먹이면서 갑론을박이나 하기 바빴다.
그러나 이제는 유로화가 점점 안착되어 유럽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달러와 함께 가장 많이 쓰이는 화폐로 굳어져 가고 있었다.
천우는 그녀에게 40유로를 주고 퐁듀정식에 와인, 그리고 소고기 코스요리를 주문하였다.
나무로 지어진 펜션에는 인조털로 만들어진 벽장식과 바닥장식, 그리고 소박한 맛의 벽난로 등이 있어서 마치 중세시대의 여관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식당은 주인이 요리하는 모습이 그대로 보이는 오픈키친으로 되어 있어서 주인장과 손님이 서로 대화를 나누며 식사를 할 수 있었다.
"그나저나 어디서 오셨어요?"
그녀는 저온숙성실에 넣어두었던 소고기를 꺼낸 후, 그것을 손질하면서 천우에게 말을 건넸다.
"한국에서 왔습니다."
"으음, 한국이라니. 전쟁터에서 피난을 오신 건가요?"
"아니요. 입대했다가 전역한 지 몇 년 안 되었습니다."
"브라셔 씨가 그러는데, 한국이라는 나라는 사방에 중화기들이 득실거리고 대낮에도 탱크가 막 지나다니는 살벌한 곳이라고 하던데요?"
"그, 그랬나요?"
아마도 한국인인 천우에게 옴팡지게 당하고 나니 한반도의 '한'자만 나와도 기겁을 하는 것이 분명하다, 천우는 그리 생각했다.
그 생각은 적중한 것 같았다.
"뭐라더라, 한국인이 찾아오면 일단 엽총부터 찾으라고 하던데요?"
"엽총은 왜요?"
"피도 눈물도 없어서 허튼 짓을 하면 머리부터 날리라든가?"
천우는 씁쓸하게 웃었다.
그러자, 그녀는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하지만 저는 안 믿어요. 사실, 제 큰 삼촌이 한국전쟁에 참전했었거든요."
"아아, 그랬었나요?"
"우리 친가가 원래 영국이거든요. 인천상륙작전에서 훈장을 받았다고 아주 자랑스러워하세요."
"으음! 그렇다면 한국에 대해 잘 아시겠네요."
"제 2의 고향이나 마찬가지라고 하시죠. 비록 그곳에서 대퇴부 관통상을 당하셔서 제대로 걷지는 못 하시지만요."
어쩌다보니 참전용사의 집을 찾게 되어 천우는 반갑기도 하면서 어쩐지 약간 미안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집안의 벽장에 고이 모셔져 있는 군복과 대검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직도 중국을 상당히 싫어하세요. 그때 중공군이 밀고 내려오는 바람에 부하들을 여럿 잃었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렇군요···."
"아무튼 간에 한국에서 오셨다니 반갑네요. 오신 김에 푹 쉬다가 가세요. 우리 집안은 한국인에게 무척이나 친절하답니다."
이런 사연이 있었다니.
천우는 마치 스위스 한복판에서 동포를 만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나중에 기회를 봐서 참전용사들에게 뭔가 작은 보상이라도 좀 해야 할 것 같군.'
만약 과거의 조상들이 지금의 이 상황을 눈으로 직접 보았다면 어떻게 행동했을까.
아마도 한양 최 씨의 이름으로 재단이라도 하나 설립해서 공로를 높이 세우지 않았을까, 천우는 그리 생각했다.
앞으로 그는 한양 최 씨의 장손으로서 해야 할 도리를 단단히 챙겨야 한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잠시 후, 퐁듀가 먼저 나올 때쯤 펜션 식당의 문이 열렸다.
"안나, 요즘 소젖이 잘 안 나오는군. 이것 참, 뭘 먹여야 좋으려나?"
"뭘 먹이긴. 수의사를 불러야지. 아무튼 브라셔 씨 앞으로 손님이 찾아왔어요."
천우는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그곳에는 로이 조로스가 서 있었다.
순간, 그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최천우?"
"그간 격조했습니다. 그렇죠?"
로이 조로스의 얼굴에 핏발이 우두둑 불거져 나오더니, 이내 터질 듯이 붉게 물들어버렸다.
잘못하면 울화통이 터질 지경이었다.
"···개 똥구멍 같은 소리하고 자빠졌네! 제기랄, 사람을 수술시켜놓고 이제 와서 하는 말이 뭐 어째?!"
"소식이라도 좀 전하지 그러셨습니까. HC의 선임투자연구원으로 채용했을 텐데요."
천우라고 해서 로이 조로스에게 그다지 감정이 좋은 건 아니었다.
잘못하면 집안 말아먹을 뻔 한 기억이 천우에게 좋게 남았을 리가 없지 않겠는가.
안나는 뭔가 심각한 일이 있음을 직감했다.
아마도 이럴 때 크게 한 몫 잡을 수 있지 않을까.
"위스키 한 병 따줘요?"
"빌어먹을, 내가 한국 사람들은 다 악마라고 했지?!"
"악마는 악마지. 붉은악마."
이 와중에 붉은악마 애드리브나 읊조리고 있는 천우에게 로이 조로스는 황당하다는 듯이 물었다.
"웃음이 나오냐?"
"그럼 울까요?"
"···한 마디를 안 지는군."
"일단 좀 앉아요. 고기가 좋은 것 같은데, 한 잔 하시죠."
"지랄, 위스키로 소 거시기나 닦아라, 이 더러운 자식아!"
"거참, 말이 심하시네. 그렇게 치면 당신도 잘한 거 없지. 남의 나라 줄줄이 망하게 해놓고 배부르고 등 따시게 살 줄 알았습니까?"
"뭐야?!"
어차피 좋은 말 안 나올 건 여기 있는 모두가 다 알고 있었다.
천우는 손을 번쩍 들었다.
"여기 위스키 한 병 주세요!"
"제기랄, 얼음은 빼고!"
"뭐야, 안 마신다면서요? 위스키로 소 거시기나 닦으라면서요?"
"···미친, 그럼 갈까?"
"안 갈 거 다 알고 있어요. 일단 좀 앉아서 한 잔 합시다."
한참을 씩씩거리던 로이 조로스, 주인장 안나가 가지고 온 오래된 위스키를 보니 곧장 눈이 돌아가 버렸다.
"조, 조머 가문의 특제 위스키!"
"많으니까 많이 마셔요."
"오오! 살다보니 이런 일이 다 있네!"
"우리 큰삼촌이 참전했던 국가에서 온 예비역이라는데 이 정도는 해줘야지."
"···개뿔, 그게 다 무슨 상관인데?"
"개뿔이라니. 말 곱게 안 하면 당신에겐 술 한 잔 안 돌아갈 줄 알아요."
"험험!"
도대체 뭐 얼마나 귀한 술이기에 천하의 싸가지 조로스가 저러는 것일까.
천우는 위스키를 개봉해서 한 잔 들이켜 보았다.
꿀꺽!
"오옷!"
이게 바로 천상의 맛이라는 것일까.
***
로이 조로스는 술이 좀 들어가자, 약간 차분해지는 느낌으로 변했다.
그는 천우가 묻는 말에 대답하고 싶으면 하고 하기 싫으면 하지 않았다.
"이번 미국 채권사건, 당신이 꾸민 짓이죠?"
"글쎄. 나를 정말 잘 연구한 사람이면 그 진실을 알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모를 것이겠지."
그는 역시 천우에게 호의적이지 않았다.
천우는 질문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했다.
"아아, 질문을 바꾸도록 하죠. 이 사건, 당신이 연관되어 있죠?"
"···제기랄, 내가 너 따위 미친놈에게 그런 걸 왜 알려줘야 하는데?"
"CIA나 MI5에게 해명하는 것보다야 저에게 해명하는 것이 훨씬 빠를 테니까요."
어차피 잡혀가면 끝이다.
기필코 자신들이 원하는 답을 찾아내고야 마는 정보기관에 끌려들어간 이후엔 그가 무슨 소리를 해도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정보기관은 사법에 대한 치외법권지역이다.
변호사를 선임할 수 없는 것은 물론이고 제대로 된 법적 보호도 받을 수 없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특히나 지금처럼 사건해결이라면 죄 없는 민간인까지 잡아다 족치는 CIA라면 더더욱 그럴 것이었다.
허나 로이 조로스는 무서울 것이 없다는 식이었다.
"제기랄, 죽이려면 죽이던지. 그깟 목숨 하나 가지고 더럽게 조잔하게 구네."
"쉽게 죽을 수 있다면 그렇겠죠. 그럼 CIA로 먼저 넘길까요?"
"···사람 잘못 봤어. 나도 인생 단맛, 쓴맛, 똥맛까지 다 본 사람이야. 그딴 협박이 통할 것 같았어?"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 하던데, 그 자존심이 정말 어디 가는 건 아닌가보네요."
"알았으면 그냥 닥치고 그만 꺼져."
천우는 이번엔 조금 다른 쪽으로 접근해보기로 했다.
"좋아요. 다시 접근해볼게요. 렉스테리아, 그쪽에서 당신을 쫓도록 해드릴 수도 있는데요."
"···뭐, 뭐가 어째?"
"얼마 전에 중국 흑사회 쪽에서 렉스테리아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죠. 그 관련자들을 죄다 엮어서 미국으로 보내버렸죠. 그들은 자신들이 어째서 감옥에 들어왔는지 영문도 모르고 있습니다. 그 배후세력으로 지목해드려요?"
순간, 로이 조로스의 얼굴에 핏기가 싹 빠져버렸다.
"···제기랄, 나는 그놈들이랑 절연했다고! 이젠 정말 아무런 관련도 없어!"
"뭐라고요?"
"꺼, 꺼져버려!"
"이봐요···."
"씨부랄`!"
로이 조로스는 거의 실성한 사람처럼 연거푸 술을 들이켰다.
천우는 그가 진정할 때까지 가만히 기다려주기로 했다.
잠시 후, 진정된 로이 조로스가 실소를 지으며 천우를 쳐다보았다.
"···꼴사납군."
"그럴 수도 있죠."
"하지만 다시는 그 미친 새끼들 이름은 입에 담지도 마라. 아주 치가 떨리니까."
"그렇게 하죠. 하지만 내 질문에 답은 해줘야겠는데요."
로이 조로스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 74.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