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3. >
73.
영국의 나프타 가입은 꽤나 오래전부터 거론되어 왔던 문제였다.
통상법 301조의 개정과 함께 시작되었던 북미자유무역협정은 무역의 심각한 블록화를 조장한다는 비난여론과 함께 했었다.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미권이 나프타로 인해서 상당힌 경상수지 흑자를 기록하자, 영국이 가입에 대한 욕심을 내기 시작했던 것이다.
당연히 북미지역이 아닌 해외지역에 있었던 미국이기 때문에 가입은 그저 기조만으로 끝나고 말았었다.
허나 최근 연방당이 캐나다, 멕시코 정부와 함께 영국의 가입을 지지하고 나서면서 판이 뒤집혔다.
유로연합과 WTO 등, 여러 국제단체가 반발하고 나섰지만 미국의 뜻은 꽤나 확고했다.
이와 같은 미국의 영국 끌어들이기가 시작되면서 미국으로 몰려들었던 투기자본은 반대로 영국과 캐나다로 몰리기 시작했다.
또한 영연방 국가들에 대한 투자가 시작되었는데, 영국의 나프타 가입으로 인해 영연방 전체가 무역협정에 들어갈 수 있다는 기대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미국으로 몰려들던 투기세력은 본격적인 나프타 관련주 매입에 열을 올렸다.
그와 함께 유로화의 하락국면이 이어졌는데, 이를 계기로 달러화의 가치가 서서히 올라가기 시작했다.
무려 7조 달러를 쏟아 부어서 이룩했던 모든 것이 물거품으로 돌아가는 순간이었다.
이러한 투기세력의 횡포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달러화 가치가 올라가자마자 채권을 미친 듯이 팔아치웠고, 그로 인하여 금융업계가 휘청거리기 시작한 것이었다.
미친 듯이 쏟아내는 채권물량을 감당하지 못한다면 미국의 채권시장은 일대 위기를 맞이할 것이고, 그것은 다시 말해 미국에 금융위기가 도래한다는 뜻이었다.
연방당은 다시 천우를 찾아 나섰다.
HC그룹은 이미 영국과 손을 잡고 유럽계 CDS시장을 재조정하고 있었고 불도그본드에 대한 특별대우를 받아 사실상 관세 및 조세 감면을 받게 되었다.
영국의 파운드화 표시채권은 영국의 엄격한 규제와 관세폭탄 등으로 유명했는데, 이례적으로 HC에게 특혜를 주어 채권 및 중개무역 관련 사업에서 막대한 이득을 챙길 수 있게 되었다.
특히나 유로화의 폭주로 인하여 생겨났던 무역적자를 해결하기 위한 대안의 일종으로 불도그본드를 선택하는 기업들이 늘어나면서 HC는 불과 반년도 안 되어 나프타 공식 금융권으로서의 지위로 벌어들였던 수익을 거두어들일 수 있었다.
그와 더불어 HC의 전통이라 할 수 있는 외화거래에서 영국이 거의 독보적인 특혜를 제공함으로서 천우는 사상 최초로 영국에서 가장 단기간에 돈을 많이 거머쥔 기업가로 이름을 올리게 되었다.
물론, 그만큼 천우가 영국 정부에게 해주는 일은 실로 대단하기 이를 데 없었다.
뒷골목의 검은돈 세탁소로 알려진 영국 런던의 비자금들을 하나 둘 잡아들이기 시작하는데 혁혁한 공을 세우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까지는 그저 베일에 싸여 있었던 런던의 비자금시장이 그 실체를 드러내기 시작한데 천우가 앞장선 셈이었다.
그런 가운데 미국 재무부에서 천우를 찾아왔다.
"···뭘 어떻게 해달라고요?"
천우는 아침 댓바람부터 사람을 찾아와 헛소리를 하는 재무부의 관계자에게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되물었다.
그러자, 그는 뻔뻔하게 말했다.
"파운드화 표시채권을 나프타에 대량 동원 및 공급해달라는 겁니다. 당신 입장에서는 어려울 것 없잖아요?"
"아니, 그러니까 내가 왜 그런 일을 해야 하냔 말입니다."
"미국을 위한 일이니까요."
만약 재무장관이 제 정신 박힌 사람이었다면 이런 소리를 절대로 할 수 없을 것이다.
지금까지 천우가 미국 정부에게 강탈당한 돈이 얼마인데, 채권공급이라는 말이 가당키나 한 것일까.
물론, 정상적인 방법으로 채권을 공급한다면야 천우로선 나쁠 것 없었다.
나프타 관련 사업들에 대한 채권을 공급해주는 대신 수수료를 받아 챙길 수 있기 때문이었다.
허나 미국은 천우에게 채권할인을 부탁하였다.
표시된 금액보다 낮게 보급해서 미국 재무부의 재정 부담을 줄여주는 대신, 다시 예전과 같은 대접을 해주겠다는 것이었다.
"우리 미국의 공식 스폰서가 되는 두 번째 기회입니다. 놓치고 나면 후회할 지도 모릅니다."
"만약 제가 거절 한 다면요?"
"국익에 위배되는 기업으로 간주하여 빠르게 처리하는 것이 마땅하겠지요."
미친놈이라는 말은 바로 이럴 때 쓰라고 있는 모양이었다.
천우는 정말 아주 잠깐 고민했었다.
더 이상 자신이 미국에게 뭘 해줄 필요가 있나 싶어서 따져 본 것이었다.
한데 지금 저들이 천우에게 무슨 짓을 하던 간에 한 수 접어줄 필요는 전혀 없을 것 같았다.
"마음대로 하십시오."
"아예 우리와 인연을 끊겠다는 말입니까?"
"지금까지 해줄 만큼 해줬잖아요. 정부도 안 하는 이재민 구호까지 해줬으면 됐지, 뭘 더 바란단 말입니까?"
"거참, 우리 덕분에 벼락부자 된 주제에 따지는 것도 많군요. 그깟 돈 몇 푼 벌고 나니까 눈에 뵈는 게 없는 모양이지요?"
원래 벼랑 끝에 몰린 사람에겐 선택권이 없는 법이다.
천우는 절대로 저들을 도와주지 않겠노라 다짐했다.
"번지수 잘 못 찾아오셨습니다."
"···정말 이럴 겁니까?"
"만약 정말 나를 붙잡고 싶다면 그 말본새부터 잘 고쳐서 오세요. 그리고 부탁을 하러 오는 사람이 어째 빈손으로 찾아온단 말입니까? 개념도 잘 챙겨서 장착하고 오신다면 다시 한 번 생각해볼게요."
그리곤 천우는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이 집무를 진행하기 시작했다.
인터폰을 눌러서 비서들을 들이고 계열사 사장단에게 보고서를 받는 등의 집무를 이어나갔던 것이다.
그러는 동안 얼굴이 새빨개진 재무부 관계자들이 문을 박차고 나섰다.
쾅!
"언젠가 이 수모를 반드시 갚아줄 날이 올 겁니다!"
"아, 예. 그러시겠지요."
천우도 끝까지 지지 않았다.
그런 그에게 김영실이 걱정스레 물었다.
"정말 재무부를 저리 돌려보내도 괜찮은 걸까요?"
"상부에 뭐라고 보고하건 간에 저놈은 아마 된통 깨져서 올 겁니다. 내가 욕을 했다고 한다면 고개를 숙여서라도 잡아왔어야 맞는 건데, 저놈은 오히려 적반하장으로 나왔잖습니까? 그렇다고 저놈이 제대로 된 협상안을 가지고 왔느냐면 그건 또 아니니까요."
"으음, 아무튼 어떤 방향으로든 간에 우리에게 좋을 건 없어 보이는데요."
"괜찮아요. 아마 며칠 내로 잘못했다면서 나를 찾아와 싹싹 빌게 될 겁니다."
재무부 관계자들이 볼 때엔 HC와 같은 기업들이 정부의 노리개처럼 느껴지겠지만, 지금까지 천우가 해왔던 일들을 생각하면 그건 절대로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으름장도 사실은 배짱을 부리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천우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나저나 도대체 어떤 간 큰 놈들이 달러화를 가지고 돈놀이를 하고 있단 말입니까?"
천우는 얼마 전부터 달러화 투기와 채권투기 등을 일삼는 세력에 대해 알아보고 있었다.
허나 HC가 MI6까지 동원해도 그들의 실체를 찾아낼 수는 없었다.
다만, 천우가 분석한 바에 따르자면 달러화를 사들이는 패턴이 꽤나 익숙하다는 점 정도였다.
"패턴으로 따진다면 딱 로이 조로스의 곡선과 매우 흡사한데 말이죠."
"실제 조로스 쪽에서 움직였을 가능성도 있을까요?"
천우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조로스가 달러투기를 하는 방식과 비슷하긴 하지만, 이건 그가 조장한 것이 아니라 연방당이 삽질하고 투기세력이 완벽하게 타이밍을 맞춘 경우입니다. 제 아무리 조로스라곤 해도 연방당을 통째로 움직일 수 있을 리 없습니다."
"그렇다면 제 3의 세력이 있다는 소리일까요?"
"아마도요."
만약 CIA와 공조했다면 저들의 정체에 대해 어렴풋하게나마 감을 잡았을 지도 모른다.
허나 지금은 전혀 아는 것이 없었다.
김영실은 두 번째 가설을 제기했다.
"로이 조로스가 혹시 후학을 양성해서 자신의 꼭두각시 세력을 만들어 놓은 것은 아닐까요?"
"자신의 클론들을 만들어내어 마리오네트처럼 조종하고 있다는 말인가요?"
"그런 셈이죠. 마치 부두교의 사제처럼 말이죠."
부두교에서는 무거운 죄를 짓고 죽은 자를 되살려내 노예로 부역하게 만드는 주술이 있다고 전해져 내려온다.
그것이 바로 그 유명한 '좀비'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이 신종 피라미드 투기세력의 등장이라는 건데, 아직 물증은 없잖아요?"
"그렇긴 하죠. 하지만 마냥 방심하고 있을 수만은 없습니다."
만약 조로스 측에서 새로운 조직을 결성했다면 천우로서도 긴장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었다.
천우는 이것을 최악의 경우로 두기로 했다.
"다른 가능성을 두고 천천히 뒤를 밟아보자고요."
"네, 알겠습니다."
조로스에 대한 얘기를 뒤고 밀어놓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천우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바로 아론 테이트였다.
-어이, 잘 지내셨나!
"이렇게 전화를 하셔도 됩니까?"
-안 될 건 뭐 있어. 연방당 나부랭이들에게 매번 들들 볶이는 걸로 모자라서 이제는 아예 고문관 보스까지 모시고 있는데, 이 정도는 해도 괜찮잖아?
"···뭔가 사정이 되게 복잡하게 들리네요."
-많이 복잡해. 이제야 세상이 만만치 않다는 것을 느껴.
"허참, 별 일입니다."
-아무튼 간에 자네에게 해줄 말이 있어서 전화했어.
"뭡니까?"
아론 테이트는 어떤 밀실로 들어가는 듯 한 소리를 냈다.
그리곤 문까지 걸어 잠근 것 같았다.
-혹시 거기 누가 있나?
"아니요."
-그럼 누가 왔다간 적은?
"방금 전에 재무부에서 저랑 한바탕 하고 나갔습니다."
-재무부! 이 새끼들이 또 똥인지 된장인지 구분도 못하고 설치려는 모양이군. 아마 말도 안 되는 제안을 하고 나갔을 테지?
"귀신이시네요."
-뻔하지. 대통령 직속라인이 친인척, 지인들로 죄다 물갈이가 되어버렸는데 말이야.
"아무튼 간에 듣는 사람은 없으니까 얘기하시죠."
-좋아, 잘 들어. 자네, 최근 러시아와 미국의 국회의원들이 서로 배꼽 맞추고 다니는 걸 알고 있나?
천우는 자신의 두 귀를 의심했다.
지금 나토와 러시아의 관계가 사실상 냉전으로 치닫고 있는 상황에서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란 말인가.
"혹시 평화사절단을 교환한 겁니까?"
-만약 그랬다면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실렸겠지.
"으음, 그럼 도대체 뭘까요."
-아무래도 조지아와 뭔가 관련이 있는 것 같아.
"조지아요?"
-알지? 조지아와 남오세티야 분쟁에 러시아가 끼어든 거 말이야.
"잘 알고 있죠."
-아무래도 그 사건에 미국계 흑막이 존재하는 것 같아.
"흑막이요?"
천우는 2008년쯤에는 조지아와 러시아의 전쟁이 발발하여 일주일도 안 되어 조지아가 항복하게 될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허나 그런 상황에서 러시아는 무력시위를 멈추지 않았고 결국엔 미국이 흑해연안으로 함대를 파견하기에 이를 것이기에 미국과 러시아의 유착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허나 만약 시점을 바꾼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도대체 왜 저렇게 배꼽을 맞추고 다니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조만간 주식시장에 큰 파장이 생길 것 같아. 자네도 상황파악 잘해서 피해 입는 일 없도록 하라고.
이는 꽤나 큰 떡밥이다.
천우는 이걸 던진 이유가 분명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 73.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