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노머신 재벌 3세-142화 (142/202)

< 71. >

71.

영국 재무성의 제안은 파격적이었다.

미국을 포함한 국제 CDS협회장에서 물러나는 대신 원래 HC가 협회장직을 시작하였던 영국에서 재신임을 하겠다는 것이었다.

현재 영국 CDS협회는 유럽 전역을 총괄하고 있는 입장이었는데, 이번 사건을 계기로 천우를 총괄협회장으로 추대하겠다는 것이 재무성의 제안이었다.

또한, 재무성은 천우를 재무성 선임고문으로 추대하고 싶다고 말했다.

현재 재무성 선임고문은 ECB의 유로화 환율 공동대책본부의 일원으로 회의에 참가하기 때문에 사실상 HC가 유럽계 자금시장의 주축으로 성장할 수도 있게 된다는 뜻이었다.

이는 지금까지 미국계 금융, 신용평가기관 등으로 여겨졌던 HC가 유럽시장으로 다리를 넓히게 되는 계기가 될 것이었다.

한마디로 영국은 물론이고 EU전체에 대한 지위상승을 누리게 된다는 뜻이었다.

재무성 차관 조드 오닐은 석 장의 계약서를 천우에게 내밀었다.

"여기에 서명하게 되면 당신은 유럽의 CDS협회장이자 재무성 선임고문으로서 ECB의 유로화 환율 공동대책본부에 이름을 올리게 될 겁니다."

"뭔가 직책이 많아지네요."

"그럴수록 당신의 이름이 더 높아진다는 뜻이겠죠?"

영국의 재무성은 외무, 영연방부와 더불어 내각 실세로 일컬어지는 기관인 만큼 상당한 권력을 행사하는 기관이다.

그들이 천우를 직접 픽업하여 직책까지 붙여주었다는 건 HC의 자체사업에도 상당한 영향을 줄 것임이 분명했다.

천우는 재무성의 손을 잡았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제가 드릴 말씀입니다."

조드 오닐이 계약서를 받아서 나가자, 그 뒤를 이어 부장급 인사 세 명이 들어왔다.

그들은 천우에게 재무성과 MI5의 공조수사에 대한 차트분석을 요청하는 서식을 전달하였다.

"앞으로 팩스나 우편 등, 서면으로 공조수사를 요청하는 서식이 전달될 겁니다. 그럼 선임고문께서는 원하시는 방식, 원하시는 날짜, 필요하신 기간만큼 자유롭게 수사하시면 됩니다. 다만 긴급 상황에 대해서는 최대한 빠른 조처를 부탁드립니다."

"그러도록 하죠."

CIA와의 공조와 달라진 점이 있다면 영국은 상당히 자유롭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회수자금에 대한 일부 소유권까지 주장할 수 있도록 계약서에 명시까지 해두어서 아르바이트로는 이만한 것이 없을 것 같았다.

세 명의 부장들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천우에게 다소 특이하게 생긴 배지를 내밀었다.

"선임고문은 환율정책 및 기획 등에 내사자격을 갖게 됩니다. 더불어 MI5의 정보고문은 중앙지부의 수사협조를 요청받는 즉시 해당 사건에 대한 독립수사기관으로서의 권한을 부여받습니다. 앞으로 내사나 수사가 필요한 부분이 있다면 이 신분증을 사용하시면 됩니다. 이미 정부기관에 공문이 내려간 상태이니 암암리에 움직일 일이 생기신다면 이걸 사용하시면 어지간한 정보는 취하실 수 있을 겁니다."

"으음, 그렇군요."

"단, 이런 서약에 동의 및 서명을 해주셔야합니다."

서약서에는 영국 및 영연방의 정보를 유출할 경우, 대법원에서 종신형을 선고받을 수 있다는 내용이 나와 있었다.

세부조항이 많긴 해도 핵심은 입단속을 잘해라, 그렇지 않으면 평생 감옥행이라는 게 핵심이었다.

"살벌한데요?"

"당신을 못 믿는 것이 아니라 형식적인 절차입니다."

천우는 서약서에 날인하였고, 이제부터 이에 대한 법적 효력이 발생하게 될 것이었다.

그날 오후, 천우는 영국에서 주최한 오찬장에 참석했다가 곧바로 독일로 향했다.

영국에서 볼일을 다 봤으니 이제는 브루스의 신붓감을 보러 가기로 한 것이었다.

오늘 저녁에 독일의 호텔에 도착하고 나면 아침나절에는 미카 슈베르트를 만날 수 있을 터였다.

브루스는 상당히 덤덤한 표정이었다.

'마음정리는 이미 끝낸 모양이로군.'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와인에 잔뜩 취해서 골골거리더니, 오늘 오후가 되자마자 정신을 차리고 정상으로 돌아왔다.

브루스 카렐의 정신력은 어느 순간부터 보다 강력해져 있었던 것이다.

두 사람은 독일 베를린에서 하루 묵은 후, 슈베르트 가문의 저택으로 향했다.

이들 가문의 저택은 지은 지가 불과 10년 밖에 되지 않은데다 전통의 양식 대신에 모던을 선택하여 집이라기보다는 일종의 리조트 단지 같은 느낌이었다.

천우와 브루스는 슈베르트 가문에서 준비한 리무진에 탑승했는데, 관리인은 그들과 동승하여 이런저런 부연설명을 해주었다.

"1차 세계대전 직후, 슈베르트 가문은 하이퍼인플레이션의 영향으로 인해 사실상 도산위기에 처해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인종탄압이 확산되기 시작하면서 가산을 모두 정리한 후, 스위스와 파리 등지로 이주해서 살게 되었죠."

"인종탄압이요?"

"사실, 슈베르트 가문은 유대인의 피가 흐르고 있습니다."

"아아!"

"만약 나치의 유대인 탄압만 없었다면 그리 고생할 일은 없었을 지도 모르죠. 이후 2차 세계대전에서 프랑스가 나치의 대대적인 공습을 받아 타격을 입게 되었는데, 그때 폭격으로 전 재산을 잃고 방랑하는 신세가 되어버렸습니다. 이후에 금융업으로 다시 일어나긴 했지만, 종전 후에도 우여곡절이 많아서 지금의 저택을 짓는데 꽤나 오랜 세월이 걸렸지요."

"으음, 그래서 유서가 깊어도 가문 대대로 내려져 오는 저택이 없는 거군요."

"세월의 무성함이랄까요."

슈베르트 가문은 나치를 굉장히 싫어하는 사람들로 유명한데, 천우조차도 이 집안에 그런 사정이 있는 줄은 미처 몰랐었다.

잠시 후, 저택의 정원을 지나 리무진이 본관에 도착했다.

본관 앞에는 평화를 상징하는 흰색 비둘기조각과 파랑새동상이 앙상블을 이루고 있었다.

"어서 오세요."

이들을 맞이한 사람은 바로 미카 슈베르트였다.

ARD의 인기 아나운서로 유명한 그녀이기에 천우는 그녀가 초면임에도 익숙하게 느껴졌다.

"실물이 더 미인이시네요."

"감사합니다."

천우와 그녀가 악수를 나눈 후, 브루스가 정중하게 인사했다.

"브루스 카렐입니다."

"말씀 많이 들었어요.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죠?"

"아닙니다. 슈베르트 양을 보니 없던 피로까지도 싹 날아갈 판이네요."

"립 서비스가 아주 좋으신데요?"

첫 만남부터 나쁘지 않은 느낌이었다.

천우는 예상과는 달리 일이 아주 쉽게 풀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카는 브루스와 천우를 식당으로 안내했다.

"우선 식사부터 하시죠. 할아버지께서 기다리고 계세요."

식당으로 가는 길은 대략 2~3분쯤 소요되었다.

그동안 브루스는 미카에게 이런저런 질문을 하며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두 사람은 취미나 관심사 등에 대한 얘기를 나누었고, 서로 승마와 사격에 취미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연치 않게 취미가 같네요?"

"그러게 말입니다. 나중에 같이 사격장에나 가볼까요?"

"좋죠. 제가 독일에 있는 괜찮은 사격장을 소개해드릴게요."

천우는 굳이 자신까지 따라올 필요도 없었나 싶었다.

허나 식당으로 들어가자, 그게 아니라는 사실을 여실히 깨닫게 되었다.

일전의 상견례에는 슈베르트 가문의 몇 명만 참석했었는데, 막상 브루스가 온다고 하니 30명이 넘는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있었던 것이다.

"신랑감이 드디어 왔군."

"으음, 일단 인물은 합격."

다들 브루스를 마치 경주마 품종평가 하듯 이리저리 뜯어보며 나름대로 점수를 매기고 있는 것 같았다.

정략혼이라는 것이 보통은 이런 식으로 등급을 매기기 마련이겠지만, 그래도 이런 엄청난 관심을 받는다면 천하의 브루스라도 긴장을 할 수밖에는 없을 것이었다.

'이래서 나를 보내신 거구나.'

오금자는 HC에서 가장 젊지만 인물 자체의 브랜드파워가 가장 높은 천우를 동행으로 보내 브루스의 부담을 덜어주기로 한 것이었다.

그녀의 판단은 아주 정확했다.

비록 유럽 CDS협회장이 될 것이라곤 생각하지 못했겠지만 그래도 천우가 가진 네임드가 이들을 압박할 것임을 그녀는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미카 슈베르트의 부친 안톤 슈베르트가 두 사람에게 악수를 건네 왔다.

"반갑습니다. 듣던 것보다 훨씬 더 미남들이네요."

"과찬이십니다."

"아버님께서는 병환으로 잠시 병원에 가셨으니 오늘 저녁에는 만나실 수 있을 겁니다."

이미 두 사람을 이 집에서 묵는다는 전재를 깔아둔 것 같았다.

백년손님을 맞이하는 일이라 하루를 더 잡은 것일까, 천우는 그리 생각했다.

허나 막상 안톤 슈베르트와 말을 섞어보니 그건 아닌 것 같았다.

"이따가 식사 끝나고 잠깐 얘기 좀 하시죠."

"저 말입니까?"

"네, 그렇습니다. 둘이서만 좀 보시죠."

그는 천우에게 독대를 청하였다.

아마도 천우에게 긴이 할 말이 있어 하루를 더 잡은 모양이었다.

***

CIA 부국장 집무실 안.

요원들의 보고서를 받은 아론 테이트의 표정이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세르게이 게라시모프가 밀입국을 했다고?"

"추정입니다."

"제기랄, 하필이면?"

소련시절 KGB를 거쳐 SVR에서 복무하다가 이중간첩 협의로 체포되어 미국에서 옥살이를 하였던 사람이 바로 세르게이 게라시모프였다.

CIA에게 정보를 팔아먹다가 붙잡혀 고문을 당하기도 했었다고 알려졌지만, 결국 모든 것이 러시아 정부의 지시였다는 것이 밝혀졌다.

그 이후, 세르게이 게라시모프는 러시아로 돌아와 정치에 입문하였고 최근에는 러시아의 군사력 증강에 대한 필요성을 역설하는 우파세력의 중추가 되었다.

"그런 미친놈이 왜 미국에 들어온 거지?"

"거기까진 알아낸 바가 없습니다. 다만, 접촉하는 사람이 누구인지는 알아냈습니다."

그들이 건넨 사진은 바로 버나드 로드리치 상원의원의 것이었다.

버나드 로드리치는 자유당 소속의 의원이었는데, 연방당과는 거의 원수지간이라 할 만 했다.

아론 테이트의 고개가 좌로 살짝 기울어졌다.

"뭐야, 연방당이 아니잖아?"

"도대체 무슨 꿍꿍이가 있는 것인지 도통 알 수가 없습니다."

"흐음···."

"어떻게 할까요? 이참에 세르게이 게라시모프를 다시 연방감옥에 수감시켜버릴까요?"

"아니야. 섣불리 나섰다간 이제 우리가 다칠 판이다. 그놈은 이제 일개 정보요원이 아니라 러시아의 중진의원이야. 잘못 건드리면 본격적인 외교 갈등이 시작될 거야."

만약 아론 테이트의 성질 같았다면 그를 잡아들여 고문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허나 안 그래도 나토와 러시아 사이의 긴장감이 최고조에 이르러 있는데, 여기에다 중진의원을 납치해버린다면 일은 걷잡을 수 없어질 것이 분명했다.

아론 테이트는 머리가 지끈거려 왔다.

"젠장, 연방당을 담가버리려다 일이 꼬여버렸군."

"어쩝니까? 두 사람이 접촉하는 것을 알았으니 보고를 안 할 수도 없는 노릇 아닙니까."

아무리 허수아비라지만 국장은 국장이다.

이런 중차대한 사안을 부국장 선에서 묻어버리기엔 뭔가 문제가 많았다.

허나 그렇다고 해서 곧이곧대로 국장에게 이 사실을 알리기도 쉽지는 않았다.

아론 테이트는 파일을 덮어버렸다.

타악!

"국토안보부로 넘겨."

"네, 네···?"

"다만 우리가 정보를 흘렸다는 걸 저들이 모르게 해."

"뭘 어쩌시려는 겁니까?"

"낚시 한 번 해보려고."

< 71.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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