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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2)
2005년 9월 20일.
영국정부가 미국정부에 대해 '인권유린에 대한 항의통보'를 보내왔다.
6월 테러로 인해 발발한 아프간, 이라크 전쟁에서의 승리와 테러와의 전쟁에서 승리하겠다는 연방당의 집념이 결국 사고를 친 것이었다.
지리상 유럽은 아랍권 국가들과 인접해 있었고 그에 따라 다소 인종이 많이 섞여 들어올 수도 있었다.
더군다나 최근 인도의 팽창으로 유럽자본과 인도의 혼혈기업이 대거 생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아랍권, 혹은 인도와의 교류가 활달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헌데 CIA에서는 연방당에서 지시한 테러분자 소탕을 빌미로 유럽 곳곳에서 민간인들을 대거 잡아들였다.
말이 좋아 체포지, 남의 나라 영토에서 민간인을 납치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런데 문제는 체포 후에 그들을 무참히 폭행하고 고문까지 자행했다는 점이었다.
물론, CIA가 테러집단의 배후를 캐내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 것은 엄연한 사실이었고 연방당이 항상 삽질만 하는 건 아니었다.
허나 전쟁을 하루 빨리 끝내야겠다는 조급함 때문에 이 사람 저 사람 막 잡아들이다보니 민간인까지 피해를 본 것이었다.
게다가 가장 큰 문제는 CIA가 MI5나 MI6, 프랑스의 DGSE(대외안보총국)이나 RG(중앙정보총국) 등을 거치지 않고 독자노선을 걸었다는 점이었다.
한마디로 대한민국 한복판에서 CIA가 국정원과의 공조도 없이 민간인을 체포하였으니, 납치라 해도 할 말이 없었다.
영국정부가 보낸 인권유린에 대한 항의통보는 비단 영국만의 목소리가 담긴 것이 아니었다.
대불 공조도 없이 일을 치른 것은 물론이고 독일, 이탈리아 등, 수많은 국가들에서 민간인을 납치했으니 피랍에 대한 항의통보를 이곳저곳에서 모집해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그런 이상할 것 없는 움직임이 폭발하여 이번 항의통보를 만들어 낸 것이었다.
난감한 일이었다.
전쟁으로 삽질하고 있는 것으로도 모자라 카트리나 사태로 골머리를 앓고 있는데 항의통보까지 쏟아지니, 연방당으로서는 슬슬 과부하가 오려 하고 있었다.
최근 자국 병력의 부족으로 멕시코 군대가 미국 남부를 밟았고 베네수엘라에서 원조기금까지 받아왔었다.
독재자 차베스가 선심 쓰듯 건넨 원조기금은 국제적으로 미국을 망신준 일이라고 사람들은 받아들이고 있었다.
헌데 그런 가운데 유럽의 여러 국가들이 이런 항의까지 해오니 정신이 없을 수밖에는 없었다.
이른 아침.
천우에게 미국 정부의 서신이 한 통 도착했다.
"···또 돈을 달라고요?"
"복지기금에 3억 달러 이상을 내면 남부 송유관 사업과 송전시설 사업에 대한 지분을 줄 가능성을 고려해보겠답니다."
"미친놈들이군."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한 것인가, 천우는 그리 생각했다.
그렇게 조리돌림을 당하고도 아직 천우를 무시한다니, 연방당이 얼마나 외골수 꼰대들 밖에 없는지 알 것도 같았다.
천우는 그 제안을 단칼에 거절해버렸다.
"정부의 제안은 거절하고 민간 기구에게 천만 달러를 전달하세요."
"예, 알겠습니다."
최근 카트리나로 배가 부른 세력이 세 곳 있었다.
러시아와 베네수엘라, 그리고 HC그룹이었다.
갤럭시 오일컴퍼니의 경우엔 정유 사업에서의 손해가 발생하였음으로 주가가 많이 떨어졌지만 유전사업만을 영위하는 천우의 경우엔 엄청난 수혜를 맛보았다.
미국정부가 아무리 짓밟아도 천우는 천우신조로 살아나는 무서운 저력을 보여주고 있었던 셈이다.
그런 천우이기에 미국정부는 조금 더 수탈을 해도 괜찮겠거니, 그리 생각했던 것이다.
허나 더 이상 천우는 그들에게 돈을 퍼 줄 마음이 없었다.
이미 목적달성을 위한 금액은 투입했기 때문이었다.
다만, 천우가 받은 서신은 아직 그대로 있었고 그에 대한 반응으로 즉각 민간에게 자금을 투자했으니 나중에는 이것 역시 저들의 목덜미를 조여 올 것이 분명했다.
천우가 민간에 기금을 전달한 지 일주일 후.
영국에서 HC를 찾아왔다.
MI5는 천우에게 전속정보고문을 제안했다.
"영국 내 검은돈 중에서 테러와 관련되어 있거나 렉스테리아와 같은 국제범죄조직과 관련된 돈들을 찾아내 압수하려 합니다."
"쉽지 않을 텐데요."
"그렇지요. 쉽지 않을 것이기에 당신을 찾아온 겁니다."
이미 천우는 CIA의 공식고문에서 밀려난 상황이었다.
얼마 전, 사실상 재무부와의 줄이 끊어지면서 CIA와도 연달아 절연한 것이었다.
MI5로서는 지금이 천우를 픽업할 절호의 기회였다.
그들은 천우에게 미국이 끊어버린 줄을 영국으로 이어붙이겠다고 장담했다.
"영국 재무성에서 당신을 탐내고 있었던 것은 잘 아시죠?"
"뭐, 그야···."
"우리와 손잡으면 재무성에서 전폭적인 지지를 보내올 겁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미국에서 받았던 특혜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원조를 받게 되겠지요."
만약 천우가 영국의 손을 잡는다면 미국과의 관계가 요원해 질 수 있었다.
허나 반대로 생각한다면 HC에게는 양다리를 걸칠 수 있는 절호의 찬스였다.
이미 자유당에게로 노선변경을 시도하고 있었고 언젠가 미국은 다시 천우를 찾을 것이다.
일이 그렇게 풀린다면 미국은 높아진 천우의 몸값을 고스란히 감당해야 할 것이고 영국과의 관계도 인정해줘야 할 수밖에는 없었다.
천우는 시원하게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뭐, 그렇게 합시다."
"역시. 당신은 합리적인 판단을 내리는 사람이라고 일찌감치 느끼고 있었습니다. 옳은 선택을 하신 겁니다."
MI5는 천우에게 전용기를 띄워 영국까지 비행한다면 특수부대 일개 분대병력을 실은 수송기를 함께 띄우겠다고 했다.
한마디로 천우를 수행하는데 군대를 동원하겠다는 뜻이었다.
이는 천우를 국가의 VIP로 대우하겠다는 말과 같은 뜻이기도 했다.
며칠 후.
천우는 영국으로 가는 전용기를 띄우기로 했다.
오늘 여행에는 브루스도 함께 했다.
그는 얼마 전 상견례에서 결정되었던 슈베르트 가문과의 정략을 위해 유럽으로 갈 예정이었다.
오금자는 천우에게 브루스의 정략에 함께 동행해달라고 부탁했다.
5촌끼리 무슨 정략까지 챙기나 싶었지만 가문의 일이라 어쩔 수가 없었다.
영국에서의 일을 마무리 한 후, 두 사람은 같이 독일까지 비행기를 타고 이동하기로 했다.
"영국에서 무슨 제안을 할까? CDS협회장으로 다시 옹립해주려나?"
비행기에서 와인을 마시던 브루스가 천우에게 물었다.
천우는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
"아마 그건 힘들 것 같은데. 미국에서 훼방을 놓을 테니까."
"으음, 그렇다면 영국에서 유럽의 협회장으로 제한해서 옹립하면 되는 거 아닌가?"
"그건 그렇지. 하지만 그들이 그렇게까지 해줄까?"
"너를 모셔오겠다고 한국까지 날아왔어. 미국 CDS협회쯤이야 그냥 무시하면 되는 거잖아. 어차피 지금의 미국 금융계는 거의 파토 일보직전이라고. 그런데 영국이 뭐 하러 미국의 눈치를 보겠어?"
"하긴, 그건 그러네."
"아무튼 간에 좋은 일이 있었으면 좋겠어."
덤덤하게 사업 얘기를 나누었지만 천우는 그가 많이 긴장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아마도 정략 때문에 심란해서 그런 것 같았다.
"정략이 부담되는 거지?"
"···안 그렇다면 거짓말이겠지. 나도 사람이니까."
"혹시 교제하던 여자는 없었어?"
그는 씁쓸하게 웃었다.
"그렇다고 해서 뭐 달라질 게 있나."
"으음."
"난 네가 부러워. 정략도 사랑도 한 방에 거머쥐었으니 말이야."
"운이 좋았던 거지."
"그래, 그 운 말이야. 아무리 사람이 바깥에서 성공하면 뭐 하나? 집안에서 행복하지를 못할 텐데."
가화만사성이라고 했던가.
아마 정략으로 맺어진 사이이기에 결혼생활은 원만할 것이고, 그렇기에 아마 바깥에서의 일은 잘 풀릴 것이다.
허나 과연 그것이 진정한 결혼생활일까.
"아마 껍데기만 남은 사람이 될 거야. 나는···."
"그렇다면 지금이라도 거절하면 되잖아?"
"으음, 그럴 수는 없어. 나는 정략이 아닌 다른 사람과 결혼해도 후회할 거야. 그때는 집안에 불화가 생겨 일을 망치게 되겠지. 그렇게 일을 그르쳐 후회하는 것보다야 차라리 사랑을 접는 편이 낫다고 생각해."
아마 답이 없는 인생이라고 한다면 지금 브루스와 같은 상황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천우는 그가 진퇴양난에 빠졌다고 생각했다.
"마음을 비워. 그렇게 밖에는 위로할 수가 없겠네."
"···휴우, 나도 그러고 싶어."
"그래도 아나운서라잖아. 상당히 미인에 몸매도 끝내주던데?"
브루스는 천우의 위로에 실소를 터뜨리고 말았다.
"하하, 너도 농담이라는 걸 할 줄 알아?"
"최소한 너보다는 웃길 것 같은데."
"그래. 적어도 지금은 네가 나보다 웃길 거야."
다른 건 모르지만 멘탈 하나는 정말 강한 사람이니 천우는 그가 자리를 털고 일어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
미국 재무부는 영국 재무성에게 영국의 CDS협회가 국제CDS협회에서 탈퇴한다고 통보받았다.
또한, 영국의 CDS협회는 유럽CDS협회를 설립하고 그 회장으로 천우를 추대하겠다고 말했다.
신임 재무장관 리암 오스본은 즉각 영국 재무성과 접촉을 시도했다.
리암 오스본은 로버트 웜우드의 처남으로 얼마 전 IMF에서 일하다가 재무부로 자리를 옮겨 파격인사단행으로 재무장관 자리에 앉았다.
그는 재무성의 고위인사 두 명과 접촉하는데 성공했다.
재무성 통화정책국장과 재정기획국장을 마주한 리암 오스본은 CDS협회 문제를 상당히 민감하게 받아들였다면서 유감을 표했다.
"미영 관계가 어쩌다 이렇게 되었습니까? 우리는 세계 최대의 동맹국가 아닙니까?"
"그래요. 최대 동맹국이죠. 하지만 CDS협회는 다른 문제입니다. 우리는 CDS를 설계한 장본인을 회장직위에 올린 것은 당연하고도 필수적인 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한데 미국의 생각은 전혀 다른 것 같더군요."
"뭐, 그야···."
"한 번 잘 생각해보세요. 우리는 최고의 전문가, 최고의 엘리트를 CDS협회의 수장에 앉히고 싶습니다. CDS라는 것은 결국 시한폭탄이 될 수 있는 물건인데 그런 물건을 전문가가 아닌 비전문가를 통해 관리한다는 것은 사실상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영국 재무성의 입장은 상당히 완고하였고 빈틈 하나 없는 아주 날카로운 선을 유지하고 있었다.
만약 이대로 미국이 영국을 잡고 늘어진다면 괜히 분란만 조장할 뿐이었다.
아무리 낙하산으로 재무장관에 앉았다곤 하지만 아예 외교와 경제에 대해 문외한은 아니었기에 리암 오스본은 그들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했다고 말할 수밖에는 없었다.
"그래요, 이해합니다."
"그럼 얘기는 끝난 것으로 알겠습니다."
"다만, 한 가지 부탁드릴 것이 있습니다."
"뭡니까?"
"추후에 유럽협회와 미국협회가 다시 합병할 때를 생각해서 구조조정을 해주셨으면 합니다."
"재결합을 생각하시는 겁니까?"
재무성의 표정은
'매형이 가만히 있겠어?'
라는 듯했다.
그건 본인이 가장 잘 알고 있을 터였다.
"저도 언제까지 이 집안 꼭두각시 노릇만 하고 있지는 않을 겁니다."
"으음, 그래도 이 와중에 재정신인 사람이 하나쯤은 있어서 다행이네요."
"해 주실 거죠?"
빠져나갈 구멍을 파놓겠다, 그런 얘기였다.
영국 재무성은 그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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