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0. >
70.
2005년 여름.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미국 남동부를 강타하였다.
이 사건으로 뉴올리언스가 가장 극심한 타격을 받았는데, 이곳에 상주하는 인구만 50만이고 광역권의 인구까지 포함하면 150만에 육박했다.
그런 대도시에 물 폭탄이 터졌고, 미시시피 해안은 거의 초토화가 되어버렸다.
설상가상으로 폰차트레인 호의 방제시설이 무너져 뉴올리언스 저지대가 물에 잠기는 사태가 벌어지고 말았다.
카트리나는 8월 28일에 하루 동안 머물다가 8월 31일에 동부에서 소멸되었다.
이 단 하루 만에 발생한 피해가 실종 2만 명, 이재민 6만 명이었고 저 지반 지역이 침수됨에 따라서 물이 고여 버리는 사상최악의 물난리가 발생해버렸다.
이는 미국 사상 여섯 번째로 큰 태풍이 상륙한 사건이었으나 그 피해로 따진다면 사상초유의 사태라 할 만 했다.
이른 아침, HC그룹으로 한 통의 서신이 날아왔다.
"이재민 구호라."
"아무래도 그쪽에 식량과 물자가 많이 부족한 상황인 것 같습니다."
"으음. 구호물자를 보내도록 하세요. 가능하다면 민간헬기에 지원금도 좀 보내주시고요."
김영실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연방당도 참으로 뻔뻔하네요. 자기들 힘들 때만 이렇게 손을 벌리다니요."
"어쩌겠습니까? 우리가 다 힘이 약해서 그런 것을."
연방당 때문에 빼앗긴 돈이 수 십 조원에 달한다.
앞으로 4년 동안 생길 피해까지 생각한다면 천우는 저들에게 한 푼도 내어주기 싫었다.
허나 이는 나중에 연방당을 압박할 수 있는 또 다른 카드가 될 것이었다.
"할 수 있는 최대한 지원하세요. 이참에 저들 발목에 족쇄 하나 걸어두자고요."
"저들이 족쇄를 걸었다고 눈 하나 깜짝할까요?"
"지금이야 신경도 안 쓰겠죠. 하지만 후일을 도모할 때에 아주 큰 도움이 되리라 봅니다."
연방당은 벌써부터 피해구제에 안일한 모습을 보여 엄청난 비난여론에 휩싸이고 있었다.
현재 뉴올리언스 지역의 이재민들은 배고픔과 목마름, 심지어는 질병에도 시달리고 있었으나 미국의 전쟁 수행으로 인해 구호물자 및 복구인력 투입이 지연되는 상황이었다.
현재 뉴올리언스는 무정부 상태로 방치되어 있었는데, 방화, 약탈, 살인, 강간, 심지어는 총격전까지 벌어지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주정부는 이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 주 방위군을 투입하겠다고 밝혔고, 이는 지역의 내부갈등을 부추기는 요인이 될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말했다.
이런 상황에서 연방당이 계속해서 손을 놓고 구경만 하고 있다간 다음 대선에서는 필패를 면치 못할 것이었다.
천우는 그 상황들을 일일이 문서로 남겨 저들을 아예 수면 아래로 묻어버리려는 생각이었다.
"우리가 돈을 얼마나 주었고 그게 얼마나 피해지역으로 들어갔는지 똑똑히 기록해두라고 하세요. 나중에 저들의 목덜미에 칼을 확 박아버릴 수 있도록."
"아아! 그런 생각이셨군요!"
"아마 이번 피해로 인해 연방당은 아예 수면 아래로 가라앉고 말 겁니다. 특히나 로버트 웜우드, 그 한심한 작자는 이번 기회를 통해 아주 절단 나버리겠죠."
HC는 가장 먼저 피해지역에 한화 100억 원 상당의 구호물자를 투입했다.
그 이후로 지속적인 피해지원을 실시하였고 미국 타 지역에 있는 경비행기와 민간헬기 사업자들을 동원하여 거의 600억 원에 가까운 물자를 보급해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뉴올리언스의 피해는 쉽게 복구되지 못한 채 표류 중이었다.
무려 8만 명의 이재민이 고통을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 정권은 사실상 병력투입마저도 망설이고 있었던 것이다.
최근 아프간, 이라크 전쟁으로 인해 병력이 감소된 데다 새로 확보한 병력 내에서 군 내부 갱단 문제가 터지는 바람에 문제 병력들을 해산시키고 새로 모병해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말까지 나오고 있었다.
급조한 병력에 대한 문제로 인해 미군이 몸살을 앓고 있던 와중에 전쟁의 장기화 노선까지 터져버리니 현 정권이 고립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로 인해 수혜를 입은 종목이 꽤 많아졌다.
HC는 현재 보유 중인 원유관련 주가가 15% 이상 올랐으며 원자재 부문도 거의 10% 이상 올라 있었다.
비록 카트리나로 인한 남부 유전의 생산 불가 때문에 생긴 일시적인 효과라는 것을 감안한다고 해도 이는 대단한 수치라 할 수 있었다.
현재 텍사스 산 중질유의 경우, 배럴당 70달러를 돌파하였다.
전쟁여파로 인해 배럴당 100달러를 넘나들던 유가가 서서히 가라앉아 50달러 선을 지키던 것이 엊그제였다.
헌데 카트리나의 피해 장기화로 인해 무려 70달러까지 쭈욱 올라가버린 것이었다.
전문가들은 60달러 선에서 유가가 안착할 수도 있다고 예언했었으나, 생각지도 못했던 악재가 터지는 바람에 유가가 다시 상승곡선을 그리고 있었던 것이다.
허나 문제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겨울에 대비하여 이제 슬슬 난방유를 비축할 시점이 왔음에도 불구하고 텍사스 산 중질유의 보급에 차질이 생길 것이라는 전망이 나돌면서 유가가 폭등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물론 호재만 있는 건 아니었다.
이런 악재 속에서 뉴욕주가지수는 바닥을 찍고 말았던 것이다.
HC가 보유한 주식의 가치가 대략 3.5%이상 하락했다는 것이 전문가들 사이에선 정설이었고 실제 수치로는 그보다 0.8%포인트 이상 빠졌다고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주가폭락은 이제 시작에 불과했다.
원유와 원자재 가격의 폭등으로 인해 미국에 들어선 대량의 생산라인이 줄줄이 피해를 입으면서 수익감소가 뚜렷해 진 것이었다.
9월 중순, HC는 현 주식시장에서의 포지션을 바로 잡기 위한 회의를 시작하였다.
경영진은 천우가 사상 처음으로 손절을 선택할 것인지, 혹은 보합세에 가담할 것인지 귀추를 주목시켰다.
"회장님, 아무래도 자동차 부문의 투자지분을 일부 거두는 것이 어떨까 합니다만."
"미국에 자동차 회사들에 대해서 말입니까?"
"네, 그렇습니다."
자동차라는 것은 그 가격이 싸던 비싸던 경제가 활황인 시절에 잘 팔리기 마련이다.
제 아무리 미국의 유가가 아시아에 비해 안정적이라곤 해도 자동차를 굴릴 사람이 없다면 물건은 팔리지 않는다.
수요가 있어야 공급이 있다는 아주 기본적인 생리인 것이다.
카트리나로 인해 생긴 피해가 모기지 만기상환 사태와 맞물려 요상한 앙상블을 만들어내면서 구매력 하락으로 이어진 것이 가장 큰 악재였다.
이제 정말로 자동차 업계의 주식을 매각할지 심각하게 고민해봐야 할 일이었다.
천우가 과연 어떤 선택을 내릴까.
경영진은 펜을 들고 대기하고 있었다.
대략 5분 후.
천우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매수로 포지션을 전환합니다."
"···매수를 하시겠다고요?"
"현재 미국에서 생산되고 있는 영국계 자동차 제품들이 있을 겁니다. 그 생산량이 어떻게 되죠?"
"거의 15% 이상 줄었습니다."
"그중에서 로렌조 모터스는 어떻죠?"
"18% 이상 감산입니다. 사실상 남부의 생산라인에서는 빠질 것이라는 예측이 지배적입니다."
"으음, 그렇다면 그쪽으로 한 번 다리를 걸어봅시다."
"해당 주식은 마이너스이며 그 회사의 공식적인 잠재력 평가는 기준 이하입니다. 그렇대도···."
"매수하세요."
그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이는 앞으로 벌어질 일을 예상할 사람이 아니라면 절대로 할 수 없는 행동이기 때문이었다.
최근 독일계 자동차 회사 복스바겐 그룹은 연이어 세계의 자동차 회사들을 먹어치우고 있었다.
이들은 국가를 가리지 않고 인수 합병 전에 나선 것으로 유명하다.
다만, 한 가문에서 갈라져 나온 회사끼리 경쟁을 펼쳐 사실상 경영권 분쟁이 일어났다는 것이 특징이었으나 사실상 집안싸움에 지나지 않았다.
천우는 현재 저들이 극비리에 감추고 있지만 이미 영국계 회사인 로렌조 모터스를 인수하기 위해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로렌조 모터스는 최신예 자동차 전장부품에 대한 특허권을 다수 가지고 있었는데, 이 부분에 대해서 복스바겐이 상당히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바로 특허권 분쟁이었다.
지금이야 수면 아래로 가라앉아 있어서 증권맨들조차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지만 향후 3년 안에 로렌조 모터스와 복스바겐 모터스 간의 특허권 분쟁이 일어날 것이었다.
복그바겐은 로렌조 모터스의 전장기술을 유출하여 빼돌리다 실패했는데, 그게 3년 후에 엄청난 타격으로 가다오게 되는 것이었다.
이날 이때 것 한 번도 소송에서 져 본적이 없었던 복스바겐이 굴욕의 패소와 함께 로열티를 지불하게 될 것이었다.
물론, 결국엔 복스바겐이 로렌조 모터스를 인수하긴 하지만 그동안 들어가는 돈만 해도 거의 천문학적인 수준이 될 터였다.
그러니 지금 주식을 사면 무조건 이득이었다.
'허나 이걸 다 설명할 수는 없으니···.'
어떤 사건을 설명하자면 분명 그에 대한 근거가 있어야 하는데, 지금은 그런 근거를 제시하기가 아주 곤란했다.
아무리 천우가 천재라곤 하지만 남의 회사 속사정까지 죄다 꿰고 있을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일단 그는 언제나 그랬듯 스스로의 판단이 만들어낸 기행으로 이 일을 덮어두기로 했다.
***
미국 뉴욕의 뒷골목으로 검은 양복을 입은 백인남성들이 열 명 남짓 들어왔다.
그들은 연신 주변을 살폈고, 행여나 누군가 자신들을 감시하고 있을까봐 전전긍긍하는 모습이었다.
그러다가 한 통의 전화를 받곤 이내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리고 곧이어 나타난 사람들.
"젠장, 또 사라졌군!"
"팀장님, 벌써 몇 번째입니까? 이정도면 내부자가 있다고 생각해도 될 정도인데요."
"···내부자는 있어. 이미 부국장님께서도 말씀하지 않으셨나."
"그런데도 우리가 굳이 이렇게 똥개훈련을 해야 하는 이유를 저는 도통 모르겠습니다."
CIA는 러시아에서 건너온 신원미상의 고위관계자를 찾기 위해 벌써 한 달 넘게 고생하고 있었다.
러시아에서 처음 고위관계자가 밀입국한 것은 3개월 전의 일이었다.
그때만 해도 별 대수롭지 않게 여겼었지만, 최근 러시아의 국방비 증액과 전차부대의 전진배치 등으로 나토와의 관계가 악화일로를 걷고 있는 중이었다.
현재 동유럽의 정세는 91~92년도에 있었던 조지아의 내전이 아직도 긴장국면을 만들어나가고 있었다.
남오세티야가 조지아에서 독립하겠다고 선언하였고 그로 인해 조지아 정부가 군을 투입하면서 내전이 발발했었다.
조지아는 러시아의 천연자원 수송루트이기도 하기 때문에 러시아는 조지아 내전에 적극 개입, 종전협상에 성공했다.
허나 긴장은 아직 현재진행형이었다.
오세티야는 여전히 독립을 주장 중이었고 조지아는 그를 억제하는 분위기였기 때문이다.
가장 큰 문제는 오세티야와 러시아의 밀회였다.
조지아의 오세티아 독립 억제를 러시아가 암암리에 방어하고 있었던 것이다.
2003년, 조지아는 미국의 강권으로 나토연방에 가입하게 되었고 미국의 전폭적인 군사원조를 약속받았다.
바로 러시아의 이런 압박 때문이었다.
이는 분명 조지아, 러시아의 갈등국면을 암시하는 일이었지만 조지아는 오세티야 문제를 결국 러시아와 함께 묶어서 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이제 상황은 일촉즉발 상태였다.
그런 상황에서 대대적인 군사움직임이 있었으니, 이미 러시아의 공격적인 움직임으로 수차례 군사적 긴장이 불거진 적이 있었던 나토연방으로서는 걱정일 수밖에는 없었다.
헌데 이 상황에서 러시아 수뇌부의 미국 밀항이라니.
CIA로선 긴장될 수밖에는 없는 상황이었다.
"밀담도 아니고, 이건 그야말로 밀항이 아니었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저놈들의 이름조차 모르다니."
"말은 밀항이지. 하지만 우리 정부에서 뒤를 봐준다면 얘기가 다르지 않나."
"그건 그렇습니다만···."
아론 테이트는 러시아 수뇌부가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 뒤를 봐준 사람, 그를 찾아내는 것이 목적이었다.
"부국장님께서 말씀하시길, 이 사건으로 로버트 웜우드가 한 방에 나가떨어질 수도 있다고 하셨다."
"그럼 우리에게도···."
"드디어 기회가 오는 것이지!"
이들은 자신들의 안위를 위해서 발로 뛰고 있었지만 결국 이 사건은 연방당을 파괴시키는 미사일이 될 것이었다.
< 70.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