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7.(2) >
67.(2)
10월 초순.
미국 시카고에서 배를 띄운 최호명 부자는 미시간 호에 낚싯대를 드리우기로 했다.
제법 오랜만에 낚시에 나선 두 부자는 송어채비를 갖추고 낚싯대를 잡았다.
출렁이는 미시간의 물살.
최호명은 슬그머니 천우에게 물었다.
"김억수 회장과 접촉했다고 들었다. 뭐라고 하던?"
"로버트 웜우드가 뒤를 봐주고 있으니 꼼짝 마라, 뭐 그러더라고요."
"그래서 뭐라고 답해줬냐?"
천우는 웃으며 답했다.
"할아버지 같았으면 뭐라고 하셨을까요?"
"그 양반이었다면···."
"대충 상상이 가시죠?"
최호명은 쓰게 웃었다.
"엿이라도 먹였냐?"
"그럴까 생각도 했지만 노인에게 엿은 좀 무리가 있어서 대충 비슷하게 먹여줬어요."
"하하, 그놈 참. 너도 정말이지 대쪽 같은 건 어쩔 수가 없구나."
"그럼 어쩌겠어요. 지금 다리를 물게 놓아주면 언젠가는 독이 퍼져서 죽을 텐데."
권력은 독이다.
이것으로 적을 보내버리기엔 이보다 더 좋은 건 없겠지만 반대로 그것이 본인의 혈관을 타고 들어왔을 때도 생각을 해야 한다.
잘 쓰면 적을 죽이기에 안성맞춤이지만 잘못 쓰면 내가 죽는 것이 바로 권력인 것이었다.
천우는 최충의가 평생을 후회했던 그 모습을 지켜보며 권력이라는 것에 집착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었다.
만약 천우가 권력과 유착하게 된다면, 그때는 아마 그 어떤 누구도 천우를 잡아 휘두를 수 없을 정도의 힘을 갖게 되었을 때의 일일 것이다.
제 아무리 천우가 꽤나 높은 곳까지 등반했으나 미국이라는 나라의 정계를 건드려서 과연 살아남을 수 있을 지는 의문이었다.
그럴 바엔 적당히 뒤로 물러서주는 편이 낫다고 두 부자는 생각했던 것이다.
허나 그런 생각 뒤로 최호명은 스스로가 희생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드와이트 카터와 손을 잡기로 했다."
"···드와이트 카터요?"
"알다시피 연방당 내에서 로버트 웜우드와 반대세력으로 일컬어지고 있는 인물이지. 물론, 당내에서는 아직까지 아웃사이더로 통하고 있긴 하지만 말이야."
"아예 정치판에 끼어드시게요? 하지만 그건 너무 위험한 일인데."
"지금 내가 손을 쓰지 않으면 우리 집안은 다시 쫄딱 망할 수도 있다. 알잖냐. 아무리 돈이 좋다고는 해도 그건 어디까지나 정치인들에겐 좋은 먹잇감에 불과하다는 것을 말이다."
돈과 권력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허나 그것도 차근차근 권력과 함께 자라난 돈이나 그런 것이지 천우의 경우엔 얘기가 약간 달랐다.
만약 천우가 처음부터 미국 상원과 줄을 대서 여기까지 왔다면 얘기가 다르겠지만, 그는 CIA와 상무부 등을 거쳐 여기까지 왔다.
직접 그들을 움직이는 세력과는 미처 연을 잇지 못했다는 소리였다.
최호명은 아들을 위해 자신이 그 길을 걷겠노라 다짐했던 것이다.
"드와이트 카터와 손을 잡는 동시에 자유당과도 손을 잡기로 했어."
"자유당이요···?"
"이번 대선에서 자유당이 이길 확률이 높은 만큼, 나는 그들의 스폰서가 되기로 작정했단다."
"자유당의 스폰서!"
과연 최호명이 옳은 선택을 한 것일까.
일단 결론적으로 본다면 최호명은 4년 고생에 8년 전성기를 가져올 선택을 하게 되는 셈이었다.
다만 한 가지 문제가 있다면 이번 대선에서 자유당이 이길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는 점 정도일 것이다.
'아마 승자독식에서 연방당이 이길 것이라곤 생각지 못하고 계시겠지.'
그 어떤 누구도 연방당이 이길 것이라곤 감히 예상하지 못할 것이다.
허나 반대로 미국의 대선은 쉽사리 누가 이긴다곤 장담을 할 수가 없는 방식이다.
미국은 국민들이 대통령 선거인단을 뽑고 그들이 선거를 치르는 방식의 투표 구조를 가지고 있다.
바로 승자독식구조.
50개 주에 분포한 인구에 비례하여 선거인단의 수가 결정되는데, 이 인원이 총 538명이다.
이 선거인단의 과반, 그러니까 270명 이상을 확보한 쪽이 대통령이 된다.
이 선거인단의 숫자를 결정하는 것이 약간 특이한데, 이 때문에 전체득표가 아무리 많아도 각 주의 선거인단 투표에서 지면 말짱 도루묵인 것이다.
예를 들어 선거인단 10석이 걸린 A라는 주가 있다고 가정하자.
이 투표에서 연방당이 6명, 자유당이 4명을 가지고 갔다고 한다면 연방당이 10석을 모두 가지고 가게 된다.
이것이 바로 승자가 판을 싹쓸이하는 승자독식구조인 것이다.
최근 미국의 유권자를 상대로 한 인터뷰에서 자유당이 약 5%포인트 차이로 우세하다는 보도가 나온 적이 있었다.
이라크와의 전쟁, 미국의 경제위기 등으로 연방당의 이미지가 많이 추락했기 때문이었다.
허나 뚜껑은 열어봐야 아는 법.
만약 천우의 전생대로라면 이 선거에서는 연방당이 승자독식구조에 의해 승리할 것이다.
'결국엔 연방당이 이길 것인데···. 만약 그렇게 된다면 우리 가문은 줄을 잘못 잡아 한 4년쯤 진흙 밭을 구르게 되겠지. 하지만 그 4년만 버틴다면!'
최대한 멀리 봐야 한다.
천우는 최충의에게서 매일 듣던 소리였다.
그는 낚싯대를 내려놓곤 선실에서 지독한 독주를 가지고 나왔다.
"한 잔 하실래요?"
"지금은 대낮인데?"
"원래 술은 낮에 마시는 것이 제격이죠."
"짜식, 이젠 진짜 남자냄새 좀 풍기는데?"
천우는 크리스털 잔에 술을 채워 최호명에게 건넨 후, 그것을 꿀꺽 삼켜버렸다.
그리곤 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굳이 줄을 잡아야겠다고 하신다면 제 말대로 한 번 해보세요."
"어떻게 말이냐?"
"드와이트 카터와 손을 잡으신 건 아주 잘 하신 일이에요. 하지만 그는 차기 대선에서도 절대 대통령이 될 수 없을 겁니다."
"뭐···?"
"그는 대통령의 그릇이 아니에요."
"으음."
"다만, 대안을 찾을 때까지 그와의 연을 놓지 마세요. 그렇게 된다면 우리 가문이 4년 동안 고생한다고 해도 그 이후의 20년 이상은 편안하게 되겠죠."
"대안을 찾는다···?"
"어차피 로버트 웜우드 라인은 오래 못 갑니다. 그들이 가지고 가는 현재의 정책은 터무니가 없는 엉터리거든요. 애초에 우리가 부동산 위기 때 손을 내밀지만 않았어도 저들은 벌써 침몰해서 사라지고 없겠죠."
"하긴. 그건 그렇구나."
"이번 대선까진 그렇다 쳐도 아마 다음 대선에는 어림도 없을 겁니다. 탄핵이나 당하지 않으면 다행이겠죠."
천우는 아직 미국에겐 한 번의 위기가 더 남아 있다고 생각했다.
만약 미국정부가 천우를 적극 기용했다면 그 위기가 상쇄될 수 있겠지만 지금은 그 분위기가 아주 영 개판이었다.
"CDS시장부터 개혁한다고 했더라고요. 그 로버트 웜우드라는 작자가 제 협회장 직위를 빼앗아 갈 가능성도 있다고 하고요.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어차피 미국의 부동산과 금융 시장에는 미래가 없어요. 아마 2008년쯤에는 아주 패망을 하고 말겠죠."
"만약 네 말이 사실이라면 4년 후엔···."
"아마 연방당 대표로 누군가 단두대에 올라가야 할 겁니다."
최호명은 천우의 말이 사실이라면 가문이 망하는 것을 두려워 할 것이 아니라 우환을 넘어 가문의 또 다른 전성기를 가져다 줄 오아시스를 바라봐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지금의 자유당 분위기가 다음 대선에서 빛을 발하겠군. 대선주자도 아주 혁신적이고도 저돌적인 인물이 낙점될 것이고."
"바로 그거에요! 그리고 그 다음 인물 역시 상당히 독특한 사람이 주목을 받겠죠."
어차피 지금 이 상황에서 최호명 부자가 손에 쥔 것을 다 가지고 살아갈 수는 없었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이들은 미래지향적인 관점을 가지고 갈 수밖에는 없는 것이었다.
천우는 지금의 패러다임으로는 이해가 안 되는 사람들과 친해지라고 조언했다.
"아버지, 이번 대선 이후에는 흑인이나 히스패닉의 표가 많이 필요할 거예요. 그러니까 흑인 정치인과 친해지세요."
"흑인 정치인이라."
"더록 호마하, 2000년도 중간선거에서는 참패했지만 이번 선거에서는 슬슬 주목을 받기 시작하고 있죠."
더록 호마하는 최호명도 익히 잘 아는 사람이었다.
경선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그가 쏟아낸 스피치가 이미 일리노이 주의 마음을 뒤흔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뇌물을 주라는 건 아니에요. 다른 방법으로, 인간적인 접근으로 최대한 친분을 쌓으라는 거죠."
"으음, 그래. 한 번 생각해보마."
"저는 그러는 동안 아예 CDS협회에서 손을 떼고 스스로 로열티도 포기할게요."
"그래도 괜찮겠냐?"
"이제 슬슬 저놈들과의 관계를 정리하고 새롭게 시작해봐야겠어요."
위기는 기회라는 말을 언제나 절감하는 최호명 부자다.
그들은 이번에도 잔뜩 밀려들 폭풍을 감당하기 위해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을 생각이었다.
***
이른 아침.
뉴욕 체스터 카렐 센트럴 그룹으로 브루스 카렐이 복귀했다.
그는 최근 대한민국 방방곡곡을 돌면서 생각을 정리한 후, 천우의 제자가 되었다는 사실을 컬럼비아에 공표했다.
카렐 학파는 천우의 객원연구원 신분을 만들고 그를 객원교수로 임용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브루스 카렐은 천우의 제자로서 카렐 학파에 정식으로 입문하게 되는 것이었다.
그런 가운데 오금자는 브루스 카렐을 본사로 불러들였다.
여전히 자신만의 색깔을 찾는데 주력하고 있던 브루스 카렐은 오금자의 갑작스러운 부름에 의아함을 느꼈다.
아직 자신은 완성된 면모가 하나도 없는데 굳이 왜 지금 불러들인 것인지 도통 감을 잡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똑똑.
회장 집무실을 두드린 브루스 카렐은 그녀의 목소리가 들리기만을 기다렸다.
허나 오금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비서실에서 그를 찾아와 서류 한 장만을 덩그러니 건네줄 뿐이었다.
"이게 뭡니까?"
"인사이동 명령서입니다."
"인사이동이요?"
"본사 전략기획팀장으로 발령받으셨습니다."
순간, 브루스는 자신이 뭔가를 잘못 들은 건 아닌지 의심했다.
"이렇게 갑자기요?"
"회장님의 방침입니다. 물론, 임용을 거부하실 권한은 있습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렇게도 원했던 자리였다.
밑바닥으로 추락하는 동안에는 이 자리가 너무 탐이 나서 미칠 것 같았지만 막상 바닥으로 추락하고 난 후에서야 깨닫게 되었다.
'진정 이 자리가 나에게 맞는 자리인 것인가?'
천우의 문하로 들어가겠다고 생각한 그 시점부터 브루스는 자신이 한참이나 부족해서 아직 많이 배워야 한다고 느꼈다.
비록 지금은 스스로의 능력이 일취월장했다는 것도 인정하는 바였으나, 체스터 카렐 그룹의 중추가 되기엔 아직 멀었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거부하겠습니다."
"거부하신다고요?"
"아직 카렐 학파에서 저를 일원으로 받아들이겠다고 결정하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저의 정체성은 옅고 진짜 내 모습을 찾지도 못했습니다. 그런데 전략기획이라는 영역을 담당하기엔 무리가 있다고 봅니다."
"으음, 그렇군요. 잘 알겠습니다."
브루스는 정말 한 치의 미련도 없이 돌아섰다.
허나 바로 그때, 그의 등 뒤에서 문이 열렸다.
"잠깐."
"고모할머니···?"
"이제야 아버지의 모습이 보이는구나."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오금자는 슬그머니 그의 손을 잡았다.
"따라오너라."
이게 무슨 상황인지, 그녀가 어떤 생각인지 알 수 없지만 일단 따라가는 브루스였다.
< 67.(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