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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노머신 재벌 3세-133화 (133/202)

< 66.(2) >

66.(2)

김억수는 골프와 낚시를 좋아하는 사람이다.

그는 나이를 먹으면서 시력이 점점 나빠지고 있었고, 눈동자의 색이 서서히 옅어져 갈색에서 금색으로 탈색되어 가고 있었다.

자칫 눈동자에 힘이 없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겠으나 막상 그와 마주한 사람은 그런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뱀이다. 그것도 지독한 독사···.'

김억수는 웃을 때의 인상이 상당히 좋은 편이지만 눈을 똑바로 뜨면 마치 뱀과 눈을 마주친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그 때문인지 김억수는 어딜 가든 단 한 번도 웃지 않는 무표정한 얼굴을 한 적이 없었다.

허나 지금은 달랐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제 그만 내부거래의 사슬을 끊고 영화관의 순수익을 제대로 돌려놓아라, 그 말이오?"

"요점만 정리한다면 그렇겠지요."

"허허, 재미있는 청년이로군. 남의 문지방 안에서 일어난 일에 왈가왈부하는 건 이 업계의 법도에 어긋나는데, 모르셨소?"

"이 업계의 법도는 모릅니다만, 법은 좀 압니다."

"···법, 법을 너무 좋아하는 사람은 재미가 좀 없는데."

"저는 재미로 사업을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김억수는 뭔가 좀 특별한 것이 있었다.

만약 천우가 다른 회장들을 찾아갔다면 HC그룹이 왔다고 호들갑을 떨며 고개부터 조아렸을 것이다.

허나 이 사람은 뭔가 믿는 구석이 있는지, 아까부터 계속해서 마이페이스로 대화를 이어나가고 있었다.

'잘한 거 하나 없는데도 당당하군.'

-아마도 뻥카를 치고 있는 것이겠죠.

'사람이 저렇게까지 뻥카를 잘 친다고?'

마샤는 천우의 시야 한구석에 꽤나 유명한 인터넷의 GIF파일, 그러니까 흔히 '짤방'이라고 불리던 것을 하나 띄워놓았다.

인터넷을 잘 하지 않았던 천우이지만 이 그림은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것 같았다.

사진 속에는 포커대회의 챔피언이 우승상금 30억을 거머쥐었음에도 불구하고 표정관리를 하고 있는 장면이 연출되어 있었다.

-포커페이스, 포커를 치든 화투를 치든 상대방에게 표정을 숨기는 것은 도박의 기본이라고 합니다. 허나 이건 도박에서만 통용되는 것이 아니죠.

'그렇다면 김억수는 포커페이스의 대가란 소리인가?'

-물론입니다. 하지만 인터넷에 떠도는 그의 사진과 인터뷰 장면들을 짜깁기하면 거짓말을 하거나 허풍을 떨 때의 습관 같은 것을 잡아낼 수 있습니다.

'습관이라.'

-포커페이스가 중요한 것은 사람의 감정은 어쩔 수 없이 표정과 습관으로 드러나게 되는데, 주인님의 경우엔 거짓말을 할 때에 왼쪽 발을 약간 떠는 버릇이 있습니다.

'···그런 것도 캐치했어?'

-워낙 오래 봐왔으니까요. 추후에 어플리케이션을 업데이트하면서 이를 교정하도록 하겠습니다.

'아무튼 간에 이 사람의 습관도 캐치할 수 있단 말이지?'

-네, 그렇습니다. 한 30초만 주시면 어플리케이션을 업데이트 할 수 있습니다.

'좋아, 그렇게 하자.'

천우는 김억수에게 담배를 청했다.

"잠시 쉬었다가 얘기하시죠. 나가서 담배 한 대 피우고 와도 되겠습니까?"

"으음, 여기서 피우지 그러시오."

"할아버지의 친구라고 생각하면 그 앞에서 담배를 피우는 건 좀 아닌 것 같아서 말입니다."

"허허, 그건 그렇군. 복도에서 편하게 피우고 오시오."

"네, 그럼."

천우는 평소에는 담배를 잘 피우지 않지만 누군가와 소통을 해야 하거나 공식석상에선 종종 피우곤 한다.

굳이 담배를 피우지 않아도 머리가 핑핑 도는데다가 원한다면 도파민을 팍팍 분비할 수 있는 AI가 있으니 니코틴이 굳이 필요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가 담배를 반쯤 피우고 있을 때쯤, 엘리베이터가 열리며 묘령의 여자가 걸어 나왔다.

-어플리케이션을 업데이트합니다···. 완료되었습니다. 인물도감에 행동패턴 감지기를 추가했습니다. 더불어 주인님의 습관을 제어할 수 있는 기능도 추가했습니다.

'고생 많았어. 그나저나 저 여자는 누구지?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데.'

-인물도감을 통해 검색해보겠습니다.

마샤는 1초 만에 그녀의 프로필을 천우의 인터페이스에 띄워주었다.

[이름: 김영하. 나이: 25세. 직업: 아나운서. 특이사항: 로호떼 그룹 전략본부장 김건우의 장녀···.]

그제야 천우는 그녀를 어디서 보았는지 알 것 같았다.

'아아, 그래! KBC의 아나운서였지! 그런데 저 여자가 원래 로호떼 그룹의 자손이었던가?'

-비록 대외적으로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집안의 후광을 등에 업고 아나운서로 데뷔하였고 최연소 아나운서실장까지 올라가기도 했었죠.

'집안 덕을 좀 본 사람이로군?'

-그런 셈이죠.

'그나저나 저 여자는 이곳까지 왜 온 거지?'

일단 천우는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 끈 후, 회장 집무실로 들어갔다.

그 안으로 들어가 보니 정숙한 모습으로 앉은 김영하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천우에게 꾸벅 인사했다.

"아까 복도에서는 뭔가 심각한 생각을 하시는 것 같아 미처 인사하지 못했네요."

"괜찮습니다."

"김영하라고 합니다."

김억수는 미묘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이 순간에 미모의 손녀를 부른 것, 아무래도 천우는 이것이 대화의 분위기를 약간 흐리기 위한 전략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이런 계략을 세운 모양이로군.'

-아니, 어쩌면 이미 전략을 세워두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주인님이 나가서 담배를 피우는 동안 갑자기 연락해서 그녀를 부를 수 있을 리는 없잖아요?

'으음, 그건 그렇군. 그렇다면 저 노친네가 처음 나에게 얼굴을 비추지 않았던 것은 뭔가 수를 쓰기 위한 시간벌기에 불과했던 것이겠네?'

-그럴 가능성이 아주 높아 보입니다.

'정치인들과 대화를 나누었을까?'

-그랬을 가능성이 높겠죠. 하지만 아시다시피 아무리 한국의 정치인이라고 해도 주인님을 어찌할 수는 없습니다. 이미 청와대와 줄이 닿은 주인님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더 이상 인맥으로는 해결이 안 될 것 같으니 직접 얼굴을 마주하고 관록으로 이 상황을 돌파하기로 한 것 같습니다.

'그래, 이정도 유연함이라면 그런 생각을 했어도 이상할 것이 없군.'

김억수는 특유의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예전에 귀하의 조고께서 전경련이나 비즈니스 자리에 종종 손자를 데리고 나오는 모습을 보고 부러웠었기에 나도 한 번 해보고 싶어서 손녀를 불렀소. 언짢은 것은 아니겠지?"

"언짢을 것은 없지요."

"허허, 내 손녀가 말이오. 저 나이에 벌써 뉴스를 진행하게 되었지 뭐요. 물론, 2TV의 9시 뉴스는 아니고 1TV의 8시 뉴스이지만 말이오."

"대단하시군요."

"허허, 그렇지 않소?"

확실히 그녀가 있고 없고의 차이는 상당히 컸다.

최충의가 천우를 데리고 다닌 것은 자신의 후계가 있다는 것을 확인시키고 장손으로서의 입지를 굳혀버리기 위함이었다.

허나 김억수의 경우는 달랐다.

어떻게 해서든 빈틈을 노리고 들어가 원하는 것을 얻고야말겠다, 그런 의지가 돋보였다.

그렇지만 천우는 흔들리지 않았다.

"뭐, 아무튼 간에 아까 하던 얘기나 마저 하시죠."

"그럼 그러시오."

"저는 로호떼의 계열사 간의 내부거리로 인한 수익감소를 절대로 방관하지 않을 겁니다. 만약 소송문제로 번진다면 끝까지 해볼 생각도 있습니다."

"허허, 세상만사 다 좋자고 하는 일인데 굳이 그렇게까지 해야겠소? 그러지 말고 우리 다 같이 저녁이나 먹으면서···."

"만약 그래도 정신을 못 차리시겠다면 손절하는 수밖에는 없습니다."

"···손절?"

김억수에겐 이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만약 천우가 로호떼 시네마의 지문을 전량 매각한다면 외국인 투자자들은 썰물처럼 빠져나갈 것이다.

HC가 한국계 영화사에 손을 대는 바람에 주가가 크게 뛰었고, 그로 인해 생긴 여유자금으로 로호떼 시네마는 확장을 준비하고 있었다.

헌데 지금 이 타이밍에 천우가 지분을 털고 일어선다면 양쪽 모두 손해를 보게 될 것이었다.

천우는 주식을 판매하는 과정에서 매각손을 입을 것이고 로호떼 시네마는 HC가 빠지면서 생긴 공백으로 경영위기를 겪게 될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억수는 표정에 변호가 없었다.

다만, 그는 천우에게 새로운 제안을 해왔다.

"당사자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어쩔 수 없지. 하지만 말이오, 굳이 손절만 생각하지 말고 더 큰 그림을 보는 건 어떠시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이를 테면 이런 것이오. 앞으로 우리 로호떼가 인수해서 합병하게 될 회사들의 주식을 당신에게 증여하겠소."

"주식을 주신다고요?"

"그렇소."

순간, 천우의 표정이 약간 일그러졌다.

로호떼는 2000년대의 대한민국 대기업 중 현금유동이 가장 좋은 회사로 손꼽혔다.

수많은 경제위기 속에서도 로호떼는 부동산과 금융, 헤외투자로 꽤 많은 돈을 벌어들였고 그것을 꾸준히 유동이 가능한 자금으로 전환하여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한참을 쟁여두었던 자금들은 2000년대 후반부터 본격적인 인수전을 준비하게 되는데, 2008년도 경제위기에 한 풀 꺾였다가 2012년부터 미친 듯이 해외의 회사들을 먹어치우기 시작했다.

그 금액만 해도 물경 60조가 넘었다.

이 엄청난 대규모 프로젝트에 천우를 끼워 넣겠다는 생각이었던 것이다.

'다만 내가 내부거래를 눈감아준다면 말이겠지만.'

김억수는 일그러진 천우의 표정을 읽은 후, 자신의 옆에 앉은 손녀의 어깨를 다독이곤 머리도 쓰다듬어주었다.

"우리는 언론에게도 꽤 많은 신경을 쓰고 있소. 내 손녀가 워낙 수완이 좋다보니 KBC쯤은 아주 찜 쪄 먹고도 남을 정도거든."

인수와 내부거래를 완성하는데 필요한 것은 두 가지다.

하나는 돈, 하나는 소문.

막대한 자본력으로 회사를 인수하여 자회사 간의 내부거래를 완성시키고 나면 언론으로 대대적인 물타기를 하는 것.

만약 제대로 물타기가 되기만 한다면 로호떼는 그 엄청난 계열사들을 통하여 막대한 현금을 뽑아먹을 수 있을 터였다.

'악질이로군.'

여기서 천우는 한 가지 의구심이 들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김억수는 이 엄청난 사실들을 천우에게 깡그리 까발리는 것일까.

그 답은 의외로 단순했다.

"나와 손잡읍시다."

"···손을 잡자고요?"

"당신이 우리의 손을 잡아주기만 한다면 그쪽도 손해 볼 일은 절대로 없을 거요."

단순히 깡다구가 좋다고 되는 일이 아니었다.

천우정도 되는 인물에게 뇌물이 통할 것이라는 확신은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을 터였다.

그런데도 자신이 가진 카드를 모두 내려놓을 수 있다는 것.

'꼬리자르기에 자신이 있다는 뜻이로군.'

김억수가 얘기한 것 중에 사실로 확인된 것은 하나도 없었다. 심지어 그가 짜놓은 청사진 역시도 진행된 것은 한 가지도 없었다.

그러니까, 천우가 진짜로 판을 벌이기 전까지는 그저 하나의 가정에 불과하다는 소리였다.

천우는 웃으며 말했다.

"참 특이한 방식으로 비즈니스를 하시는군요."

"적보다 아군을 많이 만드는 것이 승리로 가는 가장 빠른 지름길이지."

"지름길이라."

이윽고 천우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번지수를 잘못 잡으셨네요."

"으음, 그랬던가."

"그럼 저는 이만···."

여전히 미동도 없던 김억수.

그는 천우를 따라 일어서며 말했다.

"아직 히든카드는 오픈 하지 않았는데."

"히든카드요?"

뱀의 혀, 김억수는 비릿한 웃음을 흘렸다.

"설마하니 고작 이런 카드 몇 장으로 사람을 불렀을까봐?"

마샤는 그의 말이 사실이라고 판단했다.

-적어도 허풍은 아니네요. 그가 허풍을 떨 때엔 왼쪽 눈썹이 조금 더 올라갑니다. 하지만 뭔가 확신이 있을 때엔 그 반대가 되지요.

'뭐야, 그럼 진짜 뭔가 믿는 구석이 있다는 뜻이야?'

-그런 셈이죠.

찝찝하지만 천우는 일단 그 자리에 멈추어 섰다.

< 66.(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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