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6. >
66.
미스릴 픽쳐스의 구조조정이 이뤄진 후, 한국계 영화와의 스킨십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천우의 지시로 이뤄진 수뇌부의 구조조정으로 인하여 계열사 전체에 대한 수입은 물론이고 부실의 원인이었던 적폐가 청산되었다.
2004년 9월, 미스릴 컴퍼니에 대한 수익보고서가 올라왔다.
천우는 한국에 투자했던 금액에 대한 순수익 보고서를 받았는데, 작년 대비 무려 1.8배나 상승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미스릴의 한국 지사장 리버 와일러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정도면 괄목상대 할 정도의 수익이라고 생각됩니다만."
"흐음, 그건 그렇지요."
헌데 천우의 표정이 썩 좋지가 않았다.
그는 한국에 투자했던 돈에 비해서 어째 순수익이 꽤나 적다고 생각했다.
최근 대한민국의 극장가는 '실미도로'나 '태극기 휘날리는' 등의 천만관객을 동원한 영화가 출몰하기 시작했고 그 이하 900만, 800만 등, 걸출한 대작 영화들이 많이 탄생했었다.
심지어 '늙은 소년'이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하는 등의 호재가 많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시장의 팽창에 대한 수익분배가 생각보다 훨씬 적었던 것이다.
"이상하네. 얼마 전에 800만, 1000만, 관객들 숫자가 마구 늘어난 것으로 아는데 어째 수익이 이렇죠? 더군다나 우리는 영화관과 배급사, 제작사 모두 돈을 투자해두었잖아요."
"기대보다 성적이 좋지 않아서 속이 상하셨다면 제가 더 노력해서···."
리버 와일러의 낯빛이 순식간에 거무죽죽해졌다.
아마도 천우가 실망하여 자신을 책망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허나 천우의 생각은 전혀 달랐다.
"아니요, 그게 아닙니다. 우리가 투자했던 회사에서 돈이 줄줄 세고 있다는 뜻입니다."
"돈이 센다니요?"
"잘 생각해보세요. 티켓 한 장을 팔면 보통 6500~7000원 정도 벌죠? 한국은 5:5나 6:4로 수익을 나누지만, 우리는 해당사항 없습니다. 양쪽에서 돈을 다 버니까요. 관객이 천만이라고 따진다면 600억 언저리, 혹은 700억까지 매출이 나오겠죠. 여기서 순수익이 절반만 된다고 해도 300억 이상은 가져와야하는데, 지금은 거의 1/10이나 나올법하네요."
"그야 제작비 때문에···."
"아까도 말했지만 우리는 극장가에도 돈을 묻어두었어요."
"아하! 그렇다면 양쪽에서 누군가 삥땅을 친다는···?"
"그래요, 바로 그겁니다. 어디선가 돈을 꼬불치는 놈들이 있다는 뜻이죠."
"크흠!"
듣자마자 묵은 신음이 절로 나올 법한 일이었다.
천우는 리버 와일러에게 현재 공개된 극장가의 재무제표를 가지고 오라고 지시했다.
"공개 자료를 가지고 오세요. 그리고 그것과 순수익을 대조해보자고요."
"네, 알겠습니다. 당장 실행에 옮기겠습니다."
기업은 언제나 투자자들을 위해 재무상황을 공개할 의무가 있었기 때문에 자료를 구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다만 문제는 그것이 정말 100% 신뢰할 수 있는 것인가가 문제일 뿐이었다.
리버 와일러는 나간 지 10분 만에 자료를 가지고 왔다.
천우는 그것을 쭉 훑어보았다.
"최근 수익이 줄어든 것은 극장가의 리모델링 때문이군요."
"의자와 카펫, 기타 집기가 너무 오래되었기 때문이라고 들었습니다."
"흐음, 그래요?"
느낌이 딱 왔다.
예전에 천우가 정치인들에게 비자금을 만들어줄 때 사용했던 방법과 별반 다를 것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지주회사의 공개 자료도 몽땅 가지고 오세요."
"지주회사요?"
"아마 영화사의 수익을 줄이는 대신에 한창 불황인 종목을 살렸을 겁니다."
"아아! 그렇다면 영화사 수익이 줄어드는 동안 수익이 올라간 곳에 뭔가 적폐가 있을 가능성이 있겠군요!"
"바로 그겁니다."
리버 와일러의 부하들이 서류를 열심히 날라주었고 천우는 그것을 읽는 족족 그 자리에서 분석하기 시작했다.
그의 눈동자는 이미 마샤가 각종 업무나 목적에 맞도록 인터페이스를 최적화 시켜 설정해두었다.
때에 따라서 눈동자에 비치는 인터페이스가 변하기 때문에 천우의 업무처리능력은 이전에 비해 족히 3~4배는 더 빨라졌다.
특히나 각종 어플리케이션이나 툴바 등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기 때문에 업무파악은 더욱 쉬워져 있었다.
천우는 무려 5분 만에 분석을 끝냈다.
그는 재무제표에서 몇 장을 꺼내어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가구, 디자인, 건설, 화학 등, 아주 영화관을 짓고 리모델링할 때마다 내부거래로 재미들을 좀 봤네요. 특히나 가구엔 더더욱 그랬습니다."
재무제표 중에서 극장의 매입단가표를 보면 가구의 매입가격이 평균가격에 비해서 터무니없게 높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심지어 극장의 객석의 숫자보다 훨씬 더 많은 수의 물건이 납품되기도 했었다.
"그밖에 디자인 회사의 소품, 조명, 카펫, 심지어는 팝콘을 담는 그릇에까지 거품이 끼어 있네요."
"허어! 도대체 왜 이런 짓을···."
"해당 업계가 지금 엄청난 불황이기 때문이죠."
미국의 불황은 언제나 전 세계를 뒤흔드는 진원지가 된다.
마치 도미노현상처럼 미국의 악재가 전 세계를 암흑으로 물들이게 되는 셈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90년대에 뒷돈을 꼬불치려 만들었던 가구회사들이 부진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일전에도 한 번쯤 문제가 되었었죠. 대기업 회장들이 한 때 호황이었던 가구업계에 미친 듯이 돈을 투자해서 억지로 가구회사 순위차트의 줄 세우기에 성공했던 것 말입니다. 그 버릇, 아직 못 고친 모양이네요."
"그러니까, 대기업이 회사를 세워놓고 자기들이 출자한 돈으로 회사순위를 조작했다는 말씀이십니까?"
"브랜드파워가 높아지면 회사의 가치도 올라가잖습니까."
"허어,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이 다 있나!"
"아직도 이런 미친 짓을 하는 놈들이 있다니."
천우가 처음 최충의에게 기업을 배웠을 때가 84년도였다.
6살 때부터 과외를 받는다고 재계 판을 기웃거렸던 천우이기에 그 경력만 벌써 20년이었다.
그동안 천우는 한국의 재계가 많이 바뀌었다고 믿고 있었지만 아직도 갈 길이 멀었던 것이었다.
"계열사 간 부당 내부거래는 엄연한 불법입니다. 검찰을 찾아가야겠어요."
"하지만 회장님, 어차피 그놈이 그놈들 일 텐데 소용이 있을까요?"
"그렇다면 정계를 좀 움직여보죠 뭐."
"아아!"
천우는 현 여당과의 관계가 상당히 깊은 사람이다.
정권이 바뀐다면 사정이 약간 달라질 수는 있겠지만 아직까지는 대한민국 정계에 대한 영향력이 대단히 컸다.
중진의원들이 천우를 대하는 태도 역시 상당히 공손했고 대통령 내각들이라고 별반 다르지 않았다.
우선 그는 해당 기업들이 개선의 의지가 있는지 한 번 살피기로 했다.
천우는 주주로서 따질것이 있다면서 로호떼 그룹을 찾아갔다.
미리 연락은 했으나 그는 본사 데스크에 대고 자신의 이름을 당당히 밝혔다.
HC의 회장이 왔으니 로호떼의 수장도 나오라는 식이었다.
"HC그룹의 회장 최천우라고 합니다. 회장님 좀 만날 수 있습니까?"
"자,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HC투자가 미국의 영향력 있는 금융사 100위 안에 든다는 건 뉴스를 보는 사람이면 당연히 아는 사실이었다.
신문이고 뉴스고 한국을 빛낸 재계인사라고 추앙하고 있는 판에 그를 모른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데스크의 여직원이 놀라서 회장에게 연락을 취했다.
아마도 대리인이 올것이라 예상했던 모양이었다.
허나 회장 김억수는 병환을 핑계로 나오지 않았다.
분명 방문을 예고했건만, 이제와서 딴청이었다.
대신 그의 후계자인 아들이 천우를 마중하려 로비로 직접 나왔다.
"김동우입니다. 총괄이사 부회장을 맡고 있습니다."
명함을 건네며 다가오는 김동우, 천우는 상당히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저는 분명 회장님을 뵙고 싶다고 말씀드렸을 텐데요."
"제 아버지께서는 지금 병환으로 인해···."
쿠웅!
천우는 로비의 안내데스크를 내리쳤고, 그 자리에는 선명한 모양의 주먹자국이 남고 말았다.
"사람이 좋게 말하면 못 알아들으시죠?"
"···이게 지금 뭐하는 짓입니까. 남의 영업장에서 이러시는 건 불법이라는 걸 모르시지는 않겠지요."
아무래도 로호떼는 한국이 홈그라운드라고 생각하여 당하고만 있지는 않겠다는 투였다.
똥개도 홈그라운드에선 한 수 먹어주고 들어간다는, 뭐 그런 입장인 것이었다.
허나 그 생각은 완전히 틀려먹은 것이었다.
"불법? 법 운운하시다니, 법 좀 공부하셨나요?"
"그야···."
천우는 그에게 직접 작성한 극장가의 수익률 추이에 대한 평가서를 툭 던져두었다.
그것을 받아든 김동우의 동공이 크게 떨려오기 시작했다.
"이, 이건···?!"
"사람이 좋게 말하면 듣지를 않는군요. 그래요, 원하신다면 손절이 뭔지 제대로 보여드리지요."
김동우는 크게 당황한 나머지 공황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일본 로호떼에서 제법 굵직한 커리어를 쌓았던 김동우였지만 막상 미국의 큰손과 마주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로호떼의 김억수가 그런 아들을 내보낸 것은 필생의 실수라 할 수 있었다.
"그럼 법정에서 봅시다."
"잠깐!"
돌아서는 천우를 붙잡은 것은 바로 김억수였다.
와병 중이라던 김억수가 멀쩡하게 걸어와 천우의 앞에 선 것이었다.
"병환이 깊다고 하시더니, 정정하시네요."
"미안하게 되었소. 내가 몸이 좀 좋지 않아···."
"뭐, 아무튼 간에 로호떼의 입장은 잘 알았으니 저는 이만 물러갑니다."
"잠깐만 기다리라고 하지 않았소. 아무리 그쪽이 나보다 잘난 사람이라지만 연배가 이리도 차이 나는데 말 한마디는 들어줄 수 있는 것 아니오."
"답은 아드님이 나왔을 때 다 나온 것 아니었습니까?"
"내가 몸이 좋지 않아 아들을 내보낸 것은 결례였소. 사과할 테니 집무실로 올라갑시다. 보는 눈도 많은데 말이오."
"보는 눈이 많은데 제게···."
김억수는 천우의 손을 덥석 잡았다.
"···귀하의 조고(祖考)와도 안면이 있던 사이였소. 그러니 조부님 친구다 생각하고 이번 한번만 좀 넘어갑시다."
천우에게 있어 최충의가 과연 어떤 의미인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던 김억수가 그와의 친분을 운운한 것이었다.
비록 열이 좀 받기는 하지만 그래도 할아버지의 이름이 거론되니 여기서 이렇게 사람을 잡을 수는 없는 노릇이라, 천우는 그리 생각했다.
"좋습니다. 일단 회장 집무실로 올라가시죠. 하지만 그곳에서는 예의니, 체면이니 차릴 생각 추호도 없으니 그리 아십시오."
"그럴 생각은 나도 없으니 걱정 마시오."
천우는 김억수를 따라서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그러자, 그 뒤를 김동우가 따라붙었다.
잠시 후,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히자마자 김억수는 아들의 볼기짝을 힘껏 후려쳤다.
짜악!
"아, 아버지···?"
"손님에게 이 무슨 결례냐? 동네 부끄러워서 살 수가 있나 원."
"···죄송합니다."
김억수는 김동우의 머리를 잡아 천우의 앞에 깊이 숙여버렸다.
90도 직각이 될 때까지 허리를 숙인 김동우에게 김억수가 말했다.
"엘리베이터 안이 비좁아서 무릎은 못 꿇으니 머리를 조아려 백배 사죄해라."
"죄송합니다."
천우가 먼저 치고 나오기 전에 아들을 후려치는 행동.
'역시, 대기업을 세운 저력이 어디 가는 건 아니로군.'
나이를 먹었지만 여전히 대단한 순발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천우는 아무래도 김억수가 그리 쉽지만은 않은 상대가 될 것 같다고 직감했다.
그리고 그 옆에 선 김동우의 눈빛.
그 눈빛이 결코 예사롭지 않았다.
'억하심정이 깃들었군.'
이 집안과는 어째 좋은 기분으로 엮일 것 같지가 않았다.
허나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여기서 '갑'은 천우였으니 말이다.
< 66.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