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4.(2) >
64.(2)
2004년 3월.
브루스가 천우의 탁자 위에 두툼한 보고서 뭉치를 툭 던져두었다.
[에드리치 정상화에 관한 보고서]
천우가 듣기론 에드리치의 수익률이 벌써 정상화 국면을 지나 1.5배까지 뛰어 올랐다고 했었다.
"여러 가지 악재가 있었는데 결국 해냈네."
"물론, 당연한 얘기!"
브루스는 에드리치의 최고경영자가 되자마자 미국계 부실채권을 빠르게 매입하기 시작했다.
한창 HC와 슈팅스타 등이 부실채권 및 부도위기의 채권을 매입하고 있을 때, 브루스는 정부와 관련이 없는 부동산 계열 부실채권들을 경매로 사들이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주로 시가지의 높은 건물을 사들여 리모델링에 들어갔는데, 불과 5개월 만에 가격이 1.5배나 올랐던 것이다.
이런 말도 안 되는 매출기록이 가능했던 것은 부동산시장의 판도가 서서히 바뀌면서 둥지를 떠났던 큰손들이 하나 둘 돌아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특히나 구미의 핫머니들이 빠져나가며 생겼던 공백을 유럽의 큰손들이 다시 채워주면서 부동산 경기가 점점 살아나고 있었던 것이다.
에드리치는 감정가의 60%에 불과한 건물들을 감정가의 120% 수준까지 올려서 팔았으니 돈이 남을 수밖에는 없었다.
물론, 초고층 빌딩을 제외한 부동산들은 이제 슬슬 동면기에서 깨어날 준비를 하고 있던 수준이었기에 표면적으로는 미국의 부동산 시장이 아직 겨울이라고 할 수 있었다.
허나 그 속에서는 이제 슬슬 새싹이 움트고 있었던 것이었다.
"마이너스 투자이론, 역시 너는 뭔가 달라도 달라."
"그나저나 실패할 확률이 높았던 투자인데 어떤 각오로 집중투자에 나선 거야?"
"후후, 당연한 걸 묻네. 나는 네 뒤꽁무니만 쫓아다녔을 뿐, 별달리 한 건 없어."
"그럼 마이너스 투자이론만 믿고 그냥 몰빵을 해버렸다고?"
"스승을 닮고 싶은 제자의 마음이랄까. 뭐, 그런 셈이지."
맹신이라는 건 결국 양날의 검이다.
만약 따르는 사람이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줄초상이 나는 건 당연지사, 하지만 만약 그 선례가 올바르다면 이보다 더 좋은 결과도 없을 것이다.
천우는 약속대로 브루스를 제자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좋아, 제자로 받아주지."
"오오! 그럼 교수직을 받아들이는 거야?"
"그 부분에 대해서는 은사님들과 상의를 해봐야해. 내 사정상 교수직을 제대로 수행할 수는 없을 것 같으니까."
"교수의 종류는 많잖아! 같은 학회의 중추니까 방법은 많을 거야."
브루스는 신이 나 있었다.
천우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이제 그만 미국으로 돌아가라고 말했다.
"이제 그만 가. 한국에서 무슨 볼일이 더 있겠어?"
"에이,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가 어디 있어? 스승이 한국에 있는데 제자가 미국으로 건너간다는 것이 말이나 되는 소리야?"
"그럼 회사는 어쩌고? 체스터 카렐 센트럴의 차기 회장 후보로 거론되고 있는 것 같던데."
"아직 그럴 깜냥도 안 되는데 회사로 들어가 봤자 쪽팔리기 밖에 더 하겠어?"
브루스는 많은 것을 버렸다.
자신의 진중한 성격 대신에 천우 특유의 비꼬는 화법이라든지 제법 활발한 사람의 가면을 뒤집어쓰기 시작한 것이다.
천우는 그에게 제자로서 첫 번째 숙제를 내려주었다.
"좋아, 한국에서 지내도록 해."
"오오, 정말?!"
"다만 나는 주기적으로 숙제를 내줄 거야. 그걸 소화하지 못한다면 즉각 미국으로 돌아가도록 해."
"물론이지!"
"첫 번째 숙제, 네 색깔을 다시 찾도록 해."
"나의 색깔···?"
"원래 너의 색깔은 옅은 파랑색이었지만 언젠가부터 그 색을 잃고 말았어. 사람들의 가장 흔한 착각이, 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채운다고 무분별하게 남의 색을 빨아들이는 짓이야. 파란색에 빨, 주, 노, 초, 남, 보를 섞는다고 무지개 색이 될까? 아마 그건 아닐 거야."
"······!"
"다만 너는 남의 색을 제법 잘 섞어내고 있어. 이를 테면 여러 색을 섞어 잡스러워지기보다는 그것을 하나로 융합시켜서 백색광을 만들어내고 있는 거지."
브루스는 말이 없어졌다.
허나 천우는 그가 제대로 된 백색광이 되어갈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싱가포르에서의 실패를 반면교사로 삼아서 여기까지 온 것은 아주 잘 한 일이야. 하지만 네 색깔을 찾는 것은 미래를 위한 밑거름이 될 거야. 그러니 공백을 두려워하지 말고 네 색깔을 찾는데 주력해봐."
"···그래, 알겠어."
"지금 어디서 지내고 있지?"
"아직은 호텔에서 머물고 있어."
"집을 구해줄까?"
그는 고개를 저었다.
"그냥 차 한 대 끌고 한국투어나 좀 해볼까 싶어."
"좋아. 아주 괜찮은 방법이네. 에드리치에서의 수익 중 일부를 인센티브로 줄게. 아마 그 정도면 평생 넉넉하게 살 수 있을 거야."
브루스는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나도 돈 많아."
"하하, 하긴."
"그럼 한 달 후에 보자."
"한 달?"
"내 생각에 한 달이면 충분하지 않을까 싶은데."
"한 달 가지고 되겠어?"
"네가 나를 백색광이라고 말했잖아. 만약 내가 짙은 똥색이 아니라 영롱한 백색이라면 한 달이면 충분하겠지."
천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브루스는 그 길로 사라져버렸고 앞으로 한 달 동안은 그를 볼 수 없을 것이었다.
그날 오후.
천우는 미스릴 픽쳐스에서 올라온 보고서를 받았다.
니시노 픽쳐스는 미국계 영화회사인 블루마운틴 등과 함께 합병되어 미스릴 픽쳐스가 되었다.
보고서에 따르면 1998~99년 한미투자협정에서 스크린 쿼터제를 폐지하는데 실패한 이후, 새로운 카드인 FTA(Free Trade Agreement)를 통해서 스크린 쿼터제를 압박하고 있으나 실효는 없기에 슬슬 한국계 지분을 털어내자고 나와 있었다.
2월에 못 간 휴가를 떠난 김영실을 대신해 비서실 정영수 과장이 보고를 맡았다.
"스크린 쿼터제 폐지에서 이제 슬슬 축소로 돌아서고 있습니다만, 사실 그 축소 규모가 대폭 완화될 것 같지는 않다는 것이 미스릴 픽쳐스의 의견입니다."
"그래서 한국계 배급시장에서 발을 빼는 것이 좋겠다?"
"예, 그렇습니다."
스크린 쿼터제가 시행된다고 해서 배급사를 철수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들은 아직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한국에 내는 로열티가 부담되면 남의 회사 지분을 늘려서 영향력을 높이면 되는 것이고 제작비용이 부담되면 극장가와 연계된 한국계 기업과 손을 잡아서 수익을 높이면 되는 겁니다."
"으음!"
보통 극장이 50~60%를 가지고 가면 나머지를 배급사와 제작사 등이 나눠먹는 것이 한국 영화계의 산업구조다.
배급사는 여기서 일정액의 수수료를 제하고 제작사에게 수익을 넘겨주는데, 이걸 투자회사와 제작사가 나눠서 수익을 배분하면 최종수익이 되는 것이다.
헌데 외국계 영화사는 다른 나라에 영화를 내걸 때 일정의 로열티를 지불하게 되어 있다.
그러니까, 개봉 2주 이후에는 거의 대부분 영화를 타이틀에서 내리는 것도 다 로열티 지불이 부담되기 때문이다.
헌데 만약 여기서 생각을 전환해서 한국시장에 손을 뻗어 영향력을 높이면 어떻게 될까.
"우리가 지금까지 시행하고 있는 영화계열 수익구조는 아마 미국에서 영화를 들여와 한국에 내걸어 이익을 취하고 있었을 겁니다."
"네, 그렇습니다."
"미국에서의 수익은 7:3, 배급수수료를 제외하고 이것저것 떼고 나면 제작사에 남는 것이 별로 없으니 한국시장을 두드린 것인데, 스크린 쿼터가 버티고 있으니 경영악화가 일어나도 이상할 것이 없는 겁니다. 하지만 생각해보세요. 한국계 배급사 수익구조를 개선하고 극장가와 연계된 제작사와 손을 잡는다면 어떻게 될까요?"
"아아! 그렇군요!"
"미스릴 컴퍼니에게 새로 경영방침을 내려주세요. 한국계 회사에 대한 지분을 늘릴 방법을 생각해보라고요. 이미 한국계 채권시장에 진입해 수많은 매물을 거둬들였으니 그곳을 통해 진입경로를 찾아볼 수 있을 겁니다."
"알겠습니다. 그리 전하겠습니다."
정영수는 천우가 내려준 지령을 빠르게 적어 내려갔다.
그런 후, 그는 곧이어 다음 보고서를 내밀었다.
"회장님, 이번에는 투자금 출자에 대한 내용입니다."
"투자금?"
"3년 전, 판타지 영화의 흥행으로 최근 그래픽 영화 시장이 점점 커지고 있다는 점을 통해 우리도 제작에 나설 수 있도록 해달라는 겁니다."
1998년, 매트릭스라는 기라성 같은 그래픽 영화가 출시된 이후 3D시장은 빠르게 성장하는 추세였다.
이제는 공상과학소설이나 판타지를 원작으로 한 영화가 속속 개봉하고 있었고 전 세계적으로 엄청난 흥행을 기록하고 있었다.
"미스릴 컴퍼니는 여러 영화사 등을 흡수하면서 꽤 다양한 영화 판권을 얻었습니다. 그중에는 미국 유명 코믹스의 판권이라든지 세계 유명소설 등의 판권도 있습니다. 그걸 제작할 수 있는 기술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이 미스릴 컴퍼니의 주장입니다."
"흐음, 뭐 그렇긴 하겠네요. 자회사에 워낙 쟁쟁한 IT회사와 게임회사들이 즐비하니까요."
이미 3D게임시장에서 미스릴 컴퍼니의 지위는 독보적이라 할 수 있었다.
게다가 전 세계 콘솔, PC타이틀, MMORGP시장을 석권하여 사실상 게임으로는 적수가 없는 것이 미스릴 컴퍼니였다.
그만큼 그래픽에 대한 이해도가 높았고 상용기술에서 거의 3D만으로 작품을 만들어낼 수 있을 정도이니 영화제작도 문제는 아닐 것이 분명했다.
다만, 게임과 영화의 차이는 분명하다는 것이 현실이었다.
"시행착오가 좀 있겠는데요. 아무리 영화사를 흡수했다곤 해도 그들에게 시대를 앞서나갈 만큼의 기술은 없잖아요."
"그건 그렇습니다만, 블루마운틴이나 니시노 픽쳐스 출신의 중역들은 자신이 있다는 입장입니다."
제작예산이 많다고 성공하는 것이 절대 아니고 영화의 규모가 크다고 절대 흥행하는 건 아니었다.
다만, 미래지향적 관점으로 본다면 약간의 손해는 감수해줘야 할 필요는 있었다.
천우는 그들이 올린 보고서를 살펴보았다.
"트랜스퍼, 철의 남자···."
"원래는 코믹스 원작입니다만, 블루마운틴과 니시노 픽쳐스가 영화에 대한 판권을 가지고 있기에 제작이 가능하다고 합니다."
영화 자체는 메가 히트를 기록했던 영화들임이 분명했다.
허나 천우의 전생과는 다르게도 미스릴 컴퍼니로 제작사가 합병이 되면서 제작진이 완전히 바뀌어 있었다.
천우는 나노머신으로 시뮬레이터를 돌려보았다.
-인물도감의 사회구조 연계 시뮬레이션으로 영화의 완성도를 평가한다면 평점 5점에 2.5점이 나옵니다.
'절망적인 수준이로군.'
-인물도감을 보면 제작진의 라인업이 대부분 인맥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한마디로 실력보다는 안면으로 영화를 만들겠다는 소리죠.
'흐음. 그렇다면···.'
이정도면 아예 제작을 하지 않는 편이 더 좋을 수도 있었다.
향후 후속 작을 만들어내면서 개선될 여지는 있었으나, 그 흥행수익도 저조하기는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좋아요. 제작을 허가하도록 하죠."
"그럼 제작비 지원을···."
"단, 제작진의 면접을 좀 봐야겠네요."
"하지만 영화사 중역들은 이 라인업으로 확정해서 보고서를 올린 것이라···."
"좋아요, 그럼 중역들 면접부터 좀 봅시다."
"면접이요?"
"제작진의 라인업이 아니라 영화사의 라인업을 좀 바꿔야 할 필요가 있겠네요."
< 64.(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