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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노머신 재벌 3세-128화 (128/202)

< 64. >

64.

12월 4일, 미국의 모기지 채권 상환이 완료되었다.

슈팅스타는 빠르게 담보부증권을 매각하였다가 상무부의 요청으로 BB등급 이상의 채권자에 한해 상환연장을 해주는 정부의 금융프로그램에 참여하였다.

허나 그것만으로는 모자란 감이 있었기 때문에 체스터 센트럴 은행에 추가 요청이 들어갔다.

체스터 센트럴 은행은 정부의 요청에 절반에 상응하는 금액을 차관해주었고, 나머지 금액은 연준에서 알아서 해결하는 방안으로 가닥이 잡혔다.

물론, 이번 사태로 지방의 중소은행이 망하거나 가게의 부도가 속출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연준도 이라크전이 이렇게 장기전 양상으로 갈 것이라고는 예상치 못했었고, 심지어 백악관과 국방부의 한 달 종전 장담을 믿고 있었기에 지금의 사태에 직면했을 때의 대처가 유연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결국 연준은 84년도부터 87년도까지 이어졌던 미국의 금융위기 때와 마찬가지로 대대적인 민간자본을 동원하여 급한 불을 끌 수밖에 없었다.

HC가 재무부의 요청으로 매입한 주택담보물의 수요는 대략 120억 달러 상당, 거의 천문학적인 금액이 출자되었다고 불 수 있었다.

게다가 체스터 센트럴이 250억 달러, 슈팅스타가 300억 달러를 출자하는 등, 일단 급한 불은 껐지만 미국정부와 각 주의 시민들은 또 다시 빚더미에 앉게 된 셈이었다.

허나 경제 붕괴는 면했으니 연준의 입장으로는 그저 가슴을 쓸어내릴 따름이었다.

그리하여 12월 18일 현재, HC그룹의 주가는 8.5%포인트 하락해 있었다.

천우는 주주들에게 보낼 서한에 8.5%의 하락은 핫머니의 탈락으로 간주할 수 있다며, 실질적으로 하락한 포인트는 3.56% 불과할 뿐이라고 말했다.

물론, 이 얘기를 믿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지만 주주서한을 받고 실망하여 주식을 매각한 사람들도 있었다.

천우는 그 보고서를 받곤 덤덤하게 웃었다.

"허어, 하긴. 나 같아도 핫머니의 탈락이라는 소리는 개소리라고 말할 만해."

"하지만 회장님의 의견이 사실이지 않습니까."

김영실은 실제 주식시장의 흐름을 철저하게 분석하여 HC의 주주이동이 어떤 추이를 갖는지 확인해보았다.

대략 한 달 간의 조사와 집계를 통하여 확인한 결과, 지금까지 HC에 쌓여있던 핫머니의 5%포인트 이상이 날아간 것으로 조사되었다.

이는 투자회사에게 있어선 양날의 검이라 할 수 있었다.

투자란 투기자본을 포함하지 않고선 말을 할 수 없는 부분이기 때문에 다소 거품이 끼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런 거품이 지금의 HC를 만들어냈다고 볼 수도 있었지만, 언젠가 한 번쯤은 재차 내실다지기에 들어갈 필요는 있었다.

천우는 보고서를 덮었다.

타악!

"지치는군."

"한 이틀 푹 쉬시죠."

"그럼 부회장님은요?"

"저는 내년 2월쯤에 몰아서 쉴 예정입니다. 그동안 밀린 휴가를 그때 다 쓰려고요. 뭐, 가능하다면 말이지만요."

두 사람이 회사를 세우고 지금까지 이끌어 오면서 제대로 쉬어본 적이 과연 일주일이나 될지 의문이다.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불평을 할 수 없는 것은 삶이 그만큼 치열해야 얻는 것도 있기 때문이었다.

천우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럼 오늘은 일찍 퇴근 좀 할게요."

"아아, 그건 안 됩니다."

"왜요?"

"오늘 구조조정본부 회식이 있다는 걸 잊으시진 않으셨겠죠?"

"맞다, 그게 있었지."

고생한 사람들에게 술자리를 베푸는 건 보스로서의 덕목 중 하나다.

천우는 별 수 없이 오늘 저녁을 할애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그날 저녁.

그는 은색 수트케이스 하나를 들고 구조조정본부가 모인 여의도의 룸살롱으로 들어갔다.

HC전용 회식장이라고도 이름 붙여진 이곳 룸살롱은 대외보안이 철저한데다 여자들도 회식할 수 있는 분위기라서 천우가 아끼는 술집이었다.

천우는 이열로 도열한 구조조정본부 임직원들 앞에 수트케이스를 열어서 보여주었다.

그 안에는 양도성예금증서가 들어 있었다.

"합법적으로 오늘 제가 대한민국 1금융권에서 사 온 물건입니다. 한 뭉치씩 돌리세요."

이미 HC전체에 연말 상여금이 벌써 지급되었고 이번 모기지 사태에 대한 성과급도 함께 지급되었다.

다만, 본부의 구성원에 거의 대부분이 부장, 차장급 이상인 구조조정본부에는 아직 성과급 및 상여금이 돌아가지 않았다.

CD뭉치를 받은 임직원들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 이렇게나 많은···."

"조만간 좋은 일이 있을 겁니다. 그런 호재를 만들어준 여러분에게 드리는 작은 성의라고 생각하세요."

예전에 대한민국의 한 기라성 같은 재계인물이 이런 행동을 한 적이 있었다.

공장에 불이 나서 건질 것이라곤 굴러다니는 깡통이 전부였던 시기, 그는 오히려 남은 돈을 임직원들에게 나누어주고 회식까지 배부르게 시켜주었다.

위기의 순간에 자기 사람들을 아끼는 것이 억지로 허리띠를 졸라매며 위기를 티내는 것보다 훨씬 낫다는 걸 그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표면적으로 본다면 HC는 지금 위기상황이었다.

허나 천우는 의연했다.

"모두들 CD를 차에 넣어두고 오세요. 술값은 제가 낼 테니까 오늘 아주 코가 비뚤어질 때까지 마셔보세요."

"감사합니다!"

"자, 그럼 한 잔 털어내고 각자 차에 다녀오세요. 사랑과 건강을 위하여, 건배!"

"건배!"

충직한 부하에겐 기대 이상의 보상을, 실패한 부하에겐 생각 이상의 벌을 내리는 것이 천우의 철칙이었다.

실력을 키우는 한 돈 벌이로 걱정할 일 없게 해준다는 것이 천우의 공채입사의 슬로건이었기에 그는 그걸 성실하게 지키고 있었을 뿐이었다.

썰물처럼 차에 다녀왔던 임직원들에 천우에게 술을 한 잔씩 올렸다.

"회장님, 제가 한 잔 올려도 되겠습니까?"

"그럽시다."

주량무한, 그게 천우의 별명이었다.

나노머신이 분해효소를 마구 쏴주니 술이 들어가는 족족 분해되어 오줌으로 나왔고, 그런 천우를 주량으로 이길 사람은 적어도 보통의 인간 중에는 없었다.

혼자서 거의 750ml 양주를 두 병이나 비운 천우는 거뜬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 그럼 한 잔 털고 저는 일어나겠습니다. 다들 2차 나가서 한 잔 더 하세요."

"에이, 회장님! 같이 가시죠!"

"기다리는 사람이 있어서 안 됩니다."

예의상 보스를 데리고 가겠다는 임직원들의 말에 곧이곧대로 수긍해주는 것도 도리는 아니었다.

천우는 2차를 고사하고 다들 찢어져 술을 마시라며 보냈다.

오늘은 김영실도 수뇌부와 2차를 가야겠다며 나섰다.

"그럼 저희들은 이만 가보겠습니다. 다음 주에 뵙겠습니다!"

"그래, 다들 잘 들어가요."

왁자지껄한 술자리를 끝내고 돌아가는 길.

천우네 집 지하실에 불이 켜져 있었다.

"아직도 운동을 하고 있나?"

지하실로 이어지는 뒷문은 예전에 허태용이 만들어놓은 천우의 전용 출입구였다.

아직은 본가에서 살기 전에는 서고를 수시로 드나들었기 때문에 괜히 불편해하지 말라면서 그가 배려한 것이었다.

이제는 그 지하실 뒷문을 전미라가 쓰고 있었다.

지하실 쪽문을 열고 들어가니 한창 땀을 흘리고 있는 그녀가 보였다.

"이쪽은 술판인데 그쪽은 체험 삶의 현장이네요."

"어휴, 술 냄새! 많이 마셨어요?"

"아니요. 그냥 목만 축였습니다. 다들 2차 보내놓고 들어오는 길이에요."

전미라는 매력적인 덧니를 드러내며 웃었다.

"호오? 그래도 눈치는 있는 회장님이시네요?"

"나이는 어려도 알건 다 아니까요."

천우는 가만히 앉아서 그녀를 구경하다가 불현 듯 뭔가 생각이 나서 물었다.

"그나저나 궁금한 게 하니 있는데요."

"뭔데요?"

"혹시 상무부에 아는 사람이 있어요?"

"상무부? 있긴 하죠. 차관이랑 우리 집안이랑 친분이 있다고 들었어요."

"아하, 그래요?"

제이미 골드너가 어째서 천우에게 전미라 얘기를 꺼낸 것인지 한 번 떠보려 물어봤는데, 역시 인연이 있긴 있었던 모양이었다.

허나 천우는 굳이 더 이상 묻지는 않았다.

남의 집안 사정을 꼬치꼬치 캐묻는 것도 예의는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운동을 끝낸 그녀는 샤워 후, 천우의 옷으로 갈아입었다.

"상쾌하다! 그나저나 천우 씨 옷에서는 묘하게 좋은 냄새가 나요. 뭐랄까, 홀아비 냄새가 나긴 하는데 그게 이상하게 매력적이란 말이죠."

"호, 홀아비 냄새요?"

"남자는 혼자 살면 그런 냄새가 난다면서요. 그런 걸 보면 확실히 여자는 없는 것 같아요. 그렇죠?"

"하하, 죽고 싶지 않다면야 다른 여자를···?"

"잘 아시네요."

마샤는 혀를 찼다.

-쯧, 호르몬의 조절을 인공지능에게만 맡겨놓으니 당연히 홀아비 냄새가 날 수밖에요. 그렇게 호르몬 시그널이 잘 맞는데 어째서···.

'시끄러워. 모든 일에는 순서라는 것이 있는 법이야.'

-그 순서를 다 지켰다면 지금쯤 지구의 인구는 절반도 채 되지 않을 겁니다. 동물로 치면 짝짓기 철이 도래한 건데, 뇌하수체가 계속해서 남성호르몬과 페로몬을 더욱 강하게 뿜어낼 수밖에요.

'···표현 좀 순화할 수 없어? 짝짓기 철이 뭐야? 짐승도 아니고.'

-매번 말씀드리지만 인간도 짐승입니다. 명심하세요.

생각 같아선 진도를 확 빼고 싶긴 하지만 그랬다가 나중에 일이 잘못되면 체스터 카렐 센트럴 그룹 내에서 천우의 위치가 참으로 곤란해 질 것 같아서 그러지 못하고 있을 뿐이었다.

한마디로 지금까지는 이성과 본능 사이에서 이성이 이기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천우에게 술을 한 잔 더 권했다.

"내일은 주말인데, 한 잔 할래요?"

"나야 좋죠."

천우는 편한 옷으로 갈아입는 김에 샤워까지 하고 나왔다.

서로 깔끔한 상태에서 마주하는 것이 훨씬 좋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그동안 전미라는 주방에 술상을 차리고 있었다.

수건으로 머리를 털며 내려온 천우는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것 참, 술시중이나 들라고 그런 건 아닌데."

"이걸 두고 시중이라니요. 그냥 있는 걸 차리는 것뿐인데요."

두 사람은 소박하게 안주를 내고 위스키에 맥주를 타서 기울였다.

한 잔 마시고 난 후, 그녀가 천우에게 물었다.

"있잖아요, 우리 여행은 언제가요?"

"맞다. 여행을 가기로 했었죠."

"당신은 어째 제대 후에 더 바쁜 것 같아요."

"그, 그랬나요?"

"피이···."

그녀가 입을 삐죽 내밀자, 천우의 허벅지에 힘이 꽉 들어갔다.

너무 귀여워서 순간, 이성을 잃을 뻔했던 것이다.

"험험, 다음에 영국으로 갑시다. 그곳에 조상님들이 살던 저택이 있는데, 고서적도 꽤 많은 것 같더라고요. 같이 한 번 탐독해봅시다."

"···글쎄요."

"어라? 삐쳤어요?"

"몰라요."

뭔가 단단히 뿔이 난 것 같은 모양새.

천우는 이를 어쩌면 좋나 싶었다.

'여행을 가자고 약속해놓고 파토를 내니 기분이 상한 건가? 아니, 아니지···.'

연애를 아예 안 해본 사람도 아니고 사실대로 말하자면 천우는 돌싱(?)이 아니던가.

지금은 생각이 아니라 무드가 필요할 때였다.

천우는 그녀의 손을 슬그머니 잡았다.

"이번엔 반드시 약속 지킬게요."

"···됐어요."

토라져 있지만 어쩐지 표정은 밝았다.

얼굴은 붉어져 있었고 목덜미의 핏줄이 쿵덕쿵덕 춤을 추고 있었다.

자신도 모르게 그녀를 분석한 천우는 한 가지 결론에 도달했다.

'더 이상은 안 되겠구나.'

세상 어떤 일도 끝이라는 것이 있기 마련이다.

그건 아마 남녀상열지사도 마찬가지일 것이 분명했다.

천우는 술병과 안주가 남긴 쟁반을 옆으로 스윽 밀어버렸다.

"그럼 여기서 약속도장을 찍읍시다."

"도, 도장이요?"

그는 남자답게 그녀에게로 돌진했다.

그러자, 그녀의 몸이 빳빳하게 굳는 느낌이 들었다.

허나 1초, 2초, 시간이 흐르자, 그녀는 점점 천우를 탐닉하기 시작했다.

-짝짝짝, 드디어···!

마샤는 박수를 치며 AI를 동면모드로 전환시켰다.

< 64.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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