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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C투자는 11월 모기지 채권의 만기가 도래하는 그날까지 살얼음판을 걷는 듯 한 분위기로 살아가고 있었다.
지금까지 투자에 대한 직접적인 개입이 없었던 천우가 이번에는 하루에 총 8번씩 투자방향에 대한 방책을 정해주고 있었다.
아침 8시에 시작된 회의는 한 시간 주기로 16시 정각, 주식시장이 폐장할 때까지 이어졌는데, 특히나 마지막 회의에는 내일의 전략까지 수립해야하기 때문에 상당히 힘겨울 수밖에 없었다.
모기지 채권의 만기일인 21일 당일.
천우는 차갑게 가라앉은 분위기 속에서 회의를 진행했다.
물론, 차가운 건 천우를 뺀 나머지들이었다.
정작 당사자는 여유작작했다.
"재무부와 얘기했던 수준의 자금은 마련했나요?"
"98% 수준까지는 만들었습니다만, 나머지 2%가 부족해서···."
"으음."
쿵!
탁상을 친 사람은 김영실이었다.
그녀의 눈동자에서는 마치 레이저가 나오는 것 같았다.
그러니 임직원들은 마른 침을 삼킬 수밖에는 없었다.
꿀꺽!
김영실이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우리가 재무부에게 약속했던 자금이 얼마였죠?"
"80억 달러 선입니다···."
"80억에 2%면 1억 6천만 달러잖아요. 그런데 그 어마어마한 금액을 펑크 냈다고요?"
"비, 빈 금액은 홍콩에서 오늘 오전 9시 30분까지 보내주기로 했습니다."
"언제 콜을 보냈죠?"
"3일 전···."
"3일 전에 콜을 보냈으면 적어도 어제까지는 금액을 보내줬어야지, 사람들이 일을 도대체 어떻게 하는 거죠?"
누구든 김영실이 악역을 자처하고 있다 생각할 것이다.
허나 김영실은 어떻게 해서든 휘하의 투자전문가들을 모두 데리고 가려는 입장이었고 천우는 손실이 나면 그 책임을 묻지, 굳이 화를 내는 성격은 아니었다.
책임소지를 만들지 않기 위해 불같이 화를 내는 부회장과 책임소지가 생기면 단칼에 잘라내는 회장.
사실, 사람들은 김영실이 무서운 것이 아니라 그 뒤에 숨은 천우의 칼이 무서운 것이었다.
"홍콩지부 쪽 총괄이사가 누구죠?"
"왕려신 상무입니다."
"으음, 그렇군요."
천우는 나노머신의 인물도감을 아주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었다.
그로 인해 자리와 직위에 맞는 인물을 시기적절하게 기용할 수 있었으나, 문제는 사람은 한창 잘 나갈 때 꼭 실수를 하기 마련이라는 점이다.
"왕려신 상무가 실수한 것이 몇 번 째죠?"
"이번이 두 번째···."
"그렇군요."
천우는 그 자리에서 인물도감을 뒤져 차기 홍콩지부장을 결정했다.
-이용신, 스탠퍼드 출신의 재원입니다. 인물평점 4.9점이며 충분히 미래지향적 인물입니다.
'이용신이면 원래 골드만삭스의 외환 수석 딜러 아니었나?'
-주인님의 전생이었다면 그랬겠죠.
대단한 스펙의 인물이지만 유독 빚을 보지 못했던 것은 그녀가 홀로 아들 셋을 키우느라 바빴기 때문이었다.
이제 그 아들들이 중학교에 들어갔으니 충분히 빚을 볼만도 했다.
"이용신 씨."
"네, 회장님."
"지금 직책이 어떻게 되죠?"
"외환거래 제 1부 소속 홍콩담당 2팀 부팀장입니다."
"경력은요?"
"타사 인턴생활까지 합친다면 25년입니다."
천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짐 싸서 다음 주까지 홍콩으로 가세요. 인사부장님은 이용신 씨의 직위를 본부장으로 올려서 인사발령 내세요."
"어, 어···? 저는···."
"명령입니다."
엄청난 파격인사였다.
잘못하면 반발이 나올 수도 있는 일이었지만 모든 것은 '슈퍼보이'라는 단어 하나로 일축되었다.
능력이 있으면 승진한다, 그것이 몇 단계가 되더라도 반드시 승진한다.
단, 승진 후에 성과를 내지 못하면 바로 좌천된다는 것이 천우의 인사방식이었다.
비록 공포정치에는 능하지 않지만, 천우는 어떤 식으로 긴장감을 조성해야 사람들이 빠릿빠릿하게 움직이며 자기개발의 끈을 놓지 않는지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아마 내일쯤이면 홍콩에 폭탄이 떨어진 분위기가 되겠지만, 정작 천우는 아주 차분하게 회의를 진행했다.
"자, 그럼 오늘 회의 시작합시다."
김영실은 천우의 명령에 따라서 회의안건을 준비해서 프로젝터에 띄워두었다.
오늘 안건은 재무부가 오늘 날짜로 투입을 제안했었던 주택담보증권 회수 안건이었다.
재무부는 채권인수 비용의 파격적인 인하와 세금감면 등을 내세우면서 오늘 날짜로 발생하게 될 부도채권에 대한 회수를 부탁했던 것이다.
천우는 그동안 외줄타기를 하듯 주식과 환율장사를 하고 있었는데, 거의 하루 단위로 대책을 바꾸며 투자전문가들을 괴롭히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80억 달러라는 어마어마한 현금이 투입되는 프로젝트에 대한 제안이 들어왔을 때엔, 천우마저도 주춤거릴 수밖에는 없었다.
허나 그는 제안을 받아들였다.
"투입되는 자금 80억 달러 중, 1/3 이상이 사실상 정크본드라 할 수 있을 겁니다. 한마디로
25억 달러 이상의 주택매물이 재고처럼 남을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그녀의 설명에 모든 투자전문가들의 표정이 굳어버렸다.
김영실의 말에 따르자면 25억 달러 이상이 그냥 콘크리트에 묻혀 사라질 수도 있다는 소리였기 때문이다.
허나 천우의 입장은 달랐다.
"좋아요. 재무부에서 찍어주는 매물들을 무조건 매입하세요."
"하지만 회장님, 정크본드로 인해 생겨날 매물들을 분류하지 않고 그대로 떠안는다면 우리에게 남는 것은 아마 없을 겁니다."
재무부가 이런 제안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천우를 테러혐의에서 완전히 배제시켜주었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상무차관이 천우를 비호했다고는 하지만 미국의 그 어떤 누구도 100% 책임소지를 피해갈 수 있는 방법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천우를 아예 털끝하나 건드리지 않고 빼낸 것은 모두 이런 상황을 만들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한마디로 국가적 위기를 천우라는 사람으로 극복하려는 일종의 꼼수였던 셈이다.
모두가 천우의 돈 25억 달러가 손해로 기록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아니, 정크본드만 25억 달러라는 얘기이니 잘못하면 80억 달러 중 절반도 못 건질 가능성이 있었다.
허나 천우의 생각은 달랐다.
"장이 열리자마자 각 시장의 동향을 잘 살피시고 평소와 같이 일하시면 됩니다. 달라진 건 없습니다. 다만, 투자자들의 문의가 빗발치긴 하겠죠. 하지만 재무부 보증으로 진행되는 사업이라는 것을 몇 번이고 강조하면서 다독이세요."
"만약 통하지 않는다면···."
"별 수 없죠. 주가가 다소 내려가도 어쩔 수 없죠. 빠진 부분은 나중에 반드시 채울 수 있을 겁니다."
회의는 그렇게 끝이 났다.
그날 오전.
아침부터 재무부의 매입요청이 빗발치기 시작했다.
모기지론으로 주택을 매입했다가 상환하지 못해서 생긴 부도채권을 매입해달라는 것이었다.
더러는 투자등급의 채권을 매입해달라고 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그것은 환율폭등으로 인해 스스로 권리를 포기한 사람들이 생겨났기 때문이었다.
이는 재무부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높은 비율로 터져났는데, 담보대출을 모두 갚고 건물을 팔아봐야 본전도 못 건지는 사람들이 허다했기 때문에 생긴 현상이었다.
어찌되었던 천우는 시세보다 거의 30~40% 싼 가격으로 주택매물을 족족 떠안고 있는 상황이었다.
다만, 지금의 상황으로는 시세보다 높은 가격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이 문제이긴 했다.
그날 정오.
김영실은 천우에게 매입상황에 대해 보고했다.
"60억 달러에 이르는 매물을 모두 매집했습니다. 그와 동시에 우리 HC의 주가가 3.5% 이상 내려갔습니다."
"최천우라는 사람에 대한 신뢰가 다소 떨어졌다고 볼 수 있겠군요."
"월스트리트에서는 이제 슬슬 HC의 주식을 팔아 치워야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요, 그럴 수도 있겠죠."
천우가 이렇게 무작정 부동산 매물을 구입하는 것은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최근 시작된 전쟁으로 인해 유가가 폭등하고 원자재 값이 오르는 등, 사회전반에 걸쳐 이상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런 가운데 금리는 올랐고 경기는 점점 나빠지고 있었다.
헌데 지금 이 순간에도 금값은 계속 오르고 있었다.
게다가 엔화의 매입이 두드러지고 있었고 비 유동 안전자산에 돈이 점점 몰리고 있는 추세였다.
이는 다시 말해서 부동산에 대한 붐이 일어날 수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었다.
당장이야 고금리로 인해 주택담보를 포기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기에 가격도 같이 하락하고 있었지만 불과 3개월만 버텨도 주택가격은 다시 위기상황 이전으로 돌아올 것이 분명했다.
이런 도박에 천우가 80억 달러나 걸 수 있었던 것은 마샤의 시뮬레이터 결과 때문이었다.
그녀는 부동산 가격이 필연적으로 오를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고, 천우도 그걸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이라크전쟁은 미국 연방당 최대의 실수로 기록될 전쟁이었기 때문이다.
당초 한 달 안에 끝날 것이라고 확신했던 전쟁은 앞으로 10년이 지나도 끝나지 않을 것이다.
종전선언은 되었지만 이라크 내전과 극단주의 세력의 결집은 날이 가면 갈수록 심각해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결국 미국이 흐지부지 이라크에서 철군할 때까지 이 난리는 계속될 것이 분명했다.
물론, 추후에 안정세로 돌아가긴 하겠으나 개전 후 5년까지는 불안정세가 지속될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그걸 잘 알고 있는 천우이기 때문에 이런 결정을 내릴 수 있었던 것이다.
허나 그걸 모르는 김영실로는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지금이라도 재무부의 제안을 이쯤에서 절충하시죠."
"아니요, 그럴 수는 없죠. 부실채권 덕분에 왕거니를 몇 개나 먹었는데 이제 와서 포기할 수는 없죠. 저는 계약을 조금 더 연장할 생각입니다만."
"여, 연장을 하신다고요?!"
"돈이 사방 천지에 널렸는데 가만히 두고만 볼 수는 없잖아요?"
이번에야 말로 그녀는 천우를 말리는 편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탁자 위에 보고서를 힘 있게 내려놓았다.
타악!
마치 목각인형처럼 굳어버린 그녀의 표정.
김영실은 천우에게 진심으로 첨언하기 시작했다.
"회장님, 저는 회장님이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보필해 왔습니다."
"알아요. 그래서 부회장 자리를 준 거고 업무적인 관계를 떠나서 가족처럼 생각하고 있어요."
"그렇다면 제 말을 한 번쯤은 들어주십시오. 지금의 이 결정, 무조건 후회하게 되실 겁니다."
흔들리는 그녀의 눈빛.
천우는 지금 그녀가 현 상황이 옳고 그른지를 끝도 없이 의심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한 편으로는 천우를 믿고 싶겠지만 상황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음을 개탄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
허나 천우는 그런 그녀에의 눈빛이 더 마음에 들었다.
"흔들리고 있는 거죠?"
"···네, 그렇습니다. 저도 회장님을 믿고 싶지만 지금 돌아가는 판세가 그렇지 못하잖습니까."
"그래요. 흔들리는 그 마음이야 말로 당신이 옳은 길을 가고 있다는 증거가 되겠죠."
그녀는 드디어 천우가 자신의 얘기를 들어주나 싶었다.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영실의 마음이 후련하지는 않았다.
천우는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어쩌겠어요. 이게 나인 것을. 이런 나를 따라서 지금까지 온 거잖아요?"
"······."
"매번 하는 말이지만, 저는 당신을 절대로 실망시키지 않아요. 두고 보세요. 지금 투자하는 이 돈들이 과연 나중에 어떤 결과를 가지고 오게 될 지를 말이에요."
결국 그녀는 힘이 쭉 빠져 물 먹은 셔츠마냥 늘어지고 말았다.
"···그래요, 도련님을 누가 말리겠어요."
"하하, 고맙습니다."
"대신 실수하면 발바닥을 때려줄 겁니다."
"걱정하실 필요 없어요."
이제는 김영실이 큰누나 같은 천우다.
그럴 일은 없어야겠지만 그녀가 발바닥을 때린다면 기꺼이 맞아줄 의향도 있었다.
< 63(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