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2. >
62.
루이스 윈터스가 내민 계약서에는 일전에 프랑스에서 잡아냈던 렉스테리아의 유령회사의 이름이 떡하니 적혀 있었다.
"그러니까, 당신은 지금 렉스테리아라는 범죄단체를 위해서 장갑차를 팔아주신 거네요?"
"그때는 정말 몰랐습니다!"
"···그게 말이나 됩니까? CIA가 그렇게 난리브루스를 추었는데 말입니다."
"억울합니다! 저는 이 회사가 그저 자금줄이 탄탄한 회사라고만 알았지, 인터폴에 수배까지 된 사람들인 줄은 미처 몰랐단 말입니다!"
"그건 계약서를 작성할 때에 몇 줄만 더 확인해 봐도 나올 것들인데 그걸 몰랐다는 건 도대체 어느 나라 식 핑계입니까?"
그는 진심으로 억울한 모양인지 천우의 앞에 눈물까지 보였다.
"으흑흑! 정말입니다! 저는 몰랐단 말입니다!"
"정말요? 내가 볼 땐 아닌데."
저게 악어의 눈물인지 뭔지 천우가 그 진위여부를 판단할 수는 없었기에 이제부터는 시뮬레이터를 통해서 알아보는 수밖에는 없었다.
마샤는 루이스 윈터스의 증언이 거짓일 확률은 대략 45% 정도라고 판단했다.
-기업의 CEO가 렉스테리아와 관련된 회사의 이름을 몰랐다는 건 쉽게 납득하기 힘듭니다. 허나 만약 기획안을 작성하고 그것을 바꿔치기했거나 결재과정에서 서류가 조작되거나 내부의 조력자가 개입을 했다면 얘기가 달라지겠지요.
'그러니까, 제러드 다이내믹에 첩자가 숨어있다는 소리야?;
-그럴 가능성도 있다는 소리죠.
'으음.'
그는 일단 이 일을 CIA와 공유하기로 했다.
"CIA 부국장에게 이 사실을 알려야겠습니다."
"···어떻게 이러실 수 있습니까! 저는 회장님만 믿고 찾아온 건데요!"
"저를 믿고 찾아왔다고요?"
"회장님이라면 충분히 처리해주실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어째서요?"
"우리는 협력관계 아닙니까? 한마디로 우리는 동맹이라고요."
말이 좀 이상하긴 했다.
동맹관계라면서 한 순간에 사람을 침몰시킬 수도 있는 일에 끌어들인다니, 이게 도대체 말이나 되는 소리던가.
'만약 저놈이 첩자라면 나를 찾아온 이유는 도대체 뭘까.'
-두 가지의 경우가 있겠죠. 한 가지는 도망갈 수 있는 구멍을 파려는 것, 남은 한 가지는 주인님께 뭔가 원하는 것이 있어서겠죠.
'원하는 것이라.'
상황이 어찌되었던 간에 이 사람이 천우를 찾아온 것만으로도 충분히 오해를 살 수 있는 입장이었다.
그는 일단 선을 긋기로 했다.
"당신이 성실하게 CIA의 수사에 임해주신다면 이후의 일들에 대해서는 약간의 도움을 드릴 수도 있을 겁니다."
"···결국 저를 버리시겠다는 겁니까?"
"그럼 반대로 제가 하나 묻도록 하죠. 내가 제러드 다이내믹이 아닌 당신과의 개인적인 의리를 지켜야 할 이유가 있습니까?"
"그야···."
"나는 집단의 이익을 추구해야 할 협회장이지 개인적인 친분에 휘둘려 누군가를 무조건 두둔해줘야 하는 사람은 아닙니다. 이해하셨어요?"
선을 긋기는 했지만 앞으로 저 사람이 어떻게 행동할 지는 미지수였다.
루이스 윈터스의 행동이 참으로 비관적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당신을 찾아온 건 내 인생 최대의 실수가 되고 말았네요. 내가 깜빡하고 있었습니다. 당신은 결코 이득이 없이는 절대 움직이지 않는 사람이라는 걸 말입니다."
그는 이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더니 집무실을 나가버렸다.
잠시 후, 김영실과 브루스가 집무실로 들어왔다.
"무슨 일이십니까?"
"사실은 그게···."
어차피 알려질 일이었다.
김영실과 브루스는 천우가 한 얘기를 가만히 듣더니 저마다 한 마디씩 건넸다.
"선을 그은 건 아주 잘하신 일입니다."
"으음, 다만 한 가지 아쉬운 건 저놈을 이대로 그냥 보냈다는 거야."
"저 사람을 그냥 보내지 않으면 뭐 어쩔 건데요?"
"뭐 하나라도 건지는 게 있어야지요. 만약 정말로 무기밀매의 진범이라서 CIA의 조사가 필요한 시점이 온다고 칩시다. 그럼 CIA가 저놈과의 접선을 의심하게 될 텐데, 그에 대한 증언은 도대체 누가 해 줄 건데요?"
"아아···!"
"저놈이 노린 건 결국 그것이었던 겁니다. 천우를 이 일에 엮어버리는 것."
천우는 브루스의 말을 절감할 수밖에 없었다.
루이스 윈터스가 사고를 치자마자 천우를 찾아온 건 그를 이 일에 엮어서 어쩐 방식으로든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기 위함이었다.
그가 첩자이건 아니건 간에 스스로를 방어하자면 천우를 걸고넘어지는 수밖에는 없었던 것이다.
물론, 아까부터 천우는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아예 애초에 그가 천우를 찾아왔을 때 일언지하에 만남을 거절했다면 몰라도 그가 천우를 찾아왔을 때엔 그 목적이 무엇인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김영실은 이쪽에서 먼저 움직이자고 제안했다.
"CIA에게 연락하시죠."
"으음, 만약 그랬다가 도둑이 제 발 저린 것이라고 여겨진 다면요?"
"최소한 변명의 여지는 생기겠죠."
"아니, 차라리 MI6에게 갑시다."
"영국으로 가자고요?"
"그쪽에서는 최소한 천우를 의심하지는 않을 겁니다."
"어째서?"
"천우가 이 사건과 관련되어 있다는 심증이 있더라도 그들은 HC와의 관계 때문에 함부로 나서지 못할 겁니다. 소극적인 수사를 하게 될 것이고 그것은 오히려 천우에게 득이 되겠죠."
여기까지는 이미 마샤의 시뮬레이터가 예상했던 답변들이었다.
허나 아직 나오지 않은 답변이 하나 있었다.
***
미국의 채권시장이 빠르게 성장함에 따라서 이미 모든 금융사가 모기지 관련 채권시장에 뛰어들고 있는 판국이었다.
심지어 외국의 자본까지 미국으로 들어와 담보부채권 파생상품에 손을 댔음으로 시장의 성장력은 전문가들조차 예상하기 힘들 정도였다.
그러나 아직 HC와 더불어 모기지 시장에 뛰어들지 않은 사람이 한 명 있駭?.
그는 바로 록 베鳧潔駭?.
록 베넷은 CDS가 재계를 무너트릴 시한폭탄과도 같다고 말했었고 모기지 채권 시장 역시 비슷한 맥락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그의 이런 이론은 같은 카렐학파 내부에서도 의견이 분분하였는데, 아무리 가치투자와 마이너스투자 이론이 중요하다곤 해도 이미 밀물 중에서도 대세가 되어버린 모기지 시장을 포기하는 것이 과연 옳은 판단인지 의심해보자는 것이었다.
록 베넷은 굳은 의지로 현재의 부동산 채권시장을 비난했다.
'더 이상의 투자는 다이너마이트의 개수를 늘리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월스트리트 유명 비즈니스 매거진인 타임스뉴욕과의 인터뷰에서 록 베넷이 한 말이었다.
허나 그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모기지 시장은 빠른 속도로 성장해나갔다.
다만, CDS협회에서 회장 특권으로 모기지 관련 CDS 배포를 용인하지 않겠다고 말했기 때문에 관련 시장은 오히려 하락세를 보이고 있었다.
이제 관련 사업자들은 판단을 내려야만 했다.
대세를 따를 것인가, 마이너 세력을 따를 것인가.
이 문제는 체스터 카렐 센트럴과 슈팅스타에게도 큰 골칫거리였다.
이미 체스터 카렐 센트럴은 모기지 시장에 대량의 투자를 해두었고 그렇게 취득한 담보부증권으로 돈놀이를 시작한 상태였다.
슈팅스타는 이와 약간 다른 상황이었다.
최호명은 미국계 채권을 보유자산 중 가장 많이 가지고 있었는데, 그 채권들이 지금 모기기 시장의 팽창과 엮여서 투자를 하거나 매각을 하거나,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 놓여 있었다.
만약 최호명이 지금 이 상태에서 채권을 매각하기로 마음먹는다면 어떤 파장이 일어날 지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미래를 위해 투자한 금액을 지금 빼느냐 마느냐의 기로에 놓인 것이었다.
최호명은 오랜만에 제이미 골드너와의 술자리를 가졌다.
과연 상무부차관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을지, 최호명은 그게 궁금했던 것이다.
"팔아버려."
"그렇게 된다면 블랙하워드 뱅크에 묶여 있는 자산까지 한 방에 다 털어버려야 해. 그래도 괜찮겠나?"
"뭔 상관이야. 어차피 자네가 매각한다고 해도 그걸 사겠다고 달려들 사람들이 번호표를 뽑고 기다리고 있을 것이 뻔한데."
최호명이 채권으로 거두어들이는 수익이 전체매출의 대략 1/15를 차지하는데, 이는 그가 벌인 사업규모 대비해 상당히 큰 비중이라 할 수 있었다.
제이미 골드너는 그에게 아주 간단한 진리를 일깨워주었다.
"잠자는 돈은 죽은 돈이나 마찬가지야. 자네가 미국계 채권을 사들였던 것이 언제였지? 80년대였던가?"
"그래, 맞아. 플라자 합의 이후, 블랙먼데이가 지나고 나서 빠르게 채권을 회수하기 시작했지."
"벌써 10년이 넘었어. 자네가 거부로 발돋움 했던 바로 그때부터 지금까지 그만큼의 시간이 흘렀다고."
"벌써 시간이 그리 되었나?"
"그동안 자네는 미국에서 얻은 부를 전 세계로 퍼트려나갔네. 그리고 전례에 없던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지."
최호명의 머리에 그때의 희열들이 주마등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허나 제이미 골드너가 그 희열들이 주는 기억의 미화를 한 방에 파괴시켜버렸다.
"지금보다 부동산시장이 포화상태로 간다면 자네는 부도채권만 안고 사라지게 될 것이 분명해. 그럴 바엔 차라리 당장의 수익을 포기하고 그동안 뿌려두었던 원금부터 회수하는 편이 낫지 않겠나."
"자네는 미국의 부동산시장이 위태롭다고 생각하는 건가?"
그는 실소를 흘렸다.
어쩐지 예전의 누군가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80년대의 나와 같은 소리를 하는군. 미국불패 말이야."
"······!"
"어느 새 자네도 머리에 때가 낀 건가? 그렇게 팽팽 잘 돌아가던 머리는 다 어디로 갔어?"
최호명은 제이미 골드너의 말처럼 어느 순간, 자신이 정체되어 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끝까지 의심하고 끝까지 확인하고 끝까지 물고 늘어졌던 자네의 근성은 다 어디로 갔나?"
"그렇군···."
"미국이라는 나라, 그래 철옹성이지. 하지만 그 철옹성에도 위기는 닥치기 마련이야. 그 모진 풍파가 미국을 더욱 강하게 만들지는 모르겠지만 그동안 그 안에서 살고 있던 모든 것들은 한 차례 홍역을 앓아야 할 거야."
제이미 골드너는 최호명에게 다시 한 번 매각을 제안했다.
"팔아버리시게. 박수 칠 때 떠나서 다시 시작하는 거야."
"으음!"
"언젠가는 예전에 그랬듯이 자네가 크게 활약할 수 있는 날이 올 거야."
한 때 최호명은 미국에서 진공청소기라는 별명을 얻었었다.
그만큼 닥치는 대로 빨아들여 미국 금융계의 큰손이 되었던 것이다.
"자네에게 기회는 또 오게 되어 있어."
"···고맙군. 역시 친구 밖에 없어."
"후후, 잊었나? 자네와 나는 영원한 파트너야. 공생관계에 있는 자네가 무너지면 내가 너무 곤란하지 않겠나?"
"허참, 이 친구가 나를 방패로 삼고 있었군 그래!"
"어라? 그럼 안 되는 거였나?"
"하하하, 뭐 그렇긴 하지."
두 사람은 마주앉아서 그렇게 한참을 웃었다.
이윽고 제이미는 최호명에게 서류뭉치 한 권을 건네주었다.
"끝까지 의심하게."
"의심이라!"
"아무것도 믿지 마. 심지어 월스트리트의 천재들이라고 씨불이는 그 거만한 새끼들의 말까지도 말이야."
최호명은 친구가 건네준 자료를 받아보곤 심각한 표정이 되어버렸다.
'상승세가 정말로 무섭군! 이러다가 만약···.'
누군가 말했다.
보통 미국의 경제는 일정 주기로 호황과 불황이 번갈아 찾아온다고 말이다.
허나 최호명이 생각하기에 그 주기와 비슷하게도 미국은 큰 폭탄을 맞고 그것을 치유하는 시기가 있는 것 같았다.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랬듯, 만약 연준이 기준금리를 인상한다면 이 시상은 어차피 무너지게 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최호명이 해야 할 일은 정해져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 6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