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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2)
앙드레 파르밀로는 떨리는 손으로 천우의 제안서를 받아들었다.
수기로 작성한 천우의 제안서에는 프랑스 국영 자동차기업을 비롯해 철도, 전자, 항공 등, 프랑스 브랜드 파워의 정수라 할 수 있는 모든 사업영역들이 들어있었다.
"이 모든 것을 다···."
"싫다면 현물로 주시면 되고요."
갑과 을의 관계에서 오히려 을이 갑을 묶으려 이러한 꼼수를 쓰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를 테면 CDS의 갑을관계에서 프리미엄을 꼬박꼬박 지불했던 구매자가 피보험 기업의 도산으로 인해 거액의 보상금을 받아야 할 때, 오히려 을의 입장에서는 배상금 지급을 할 수 없다면서 배짱을 튕기는 경우가 있었다.
한마디로 못 주겠으니까 협상을 해서 금액을 절충하든 법정공방으로 가든 마음대로 하라는 식이었다.
지금이야 CDS에 관한 법률이 개정되어 그럴 일이 없어졌지만 초기에는 이런 '을의 치킨게임'이 제법 많았었다.
그보다는 조금 나은 축에 속하지만 프랑스는 천우의 70억 달러를 주식으로 전환하여 리스크를 분산시키려 했다.
추후에 천우가 주식을 처분하게 되었을 경우엔 프랑스에서 얼마든 제재를 가할 수도 있었다.
공기업의 대주주는 누가 뭐래도 프랑스 정부당국이 아니던가.
게다가 아무리 프리미엄을 받았어도 처분과정에서 매각손이 벌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니, 아무리 봐도 천우가 손해인 장사였다.
'짱구도 적당히 굴려야지.'
천우는 70억 달러에 달하는 금을 요구했다.
만약 프랑스 화폐나 달러였다면 그나마 좀 나았을 지도 모르지만 순금 70억 달러는 얘기가 다르다.
갑자기 이렇게 많은 황금을 구해다 주는 건 아무리 봐도 약간 무리가 있는 일이었던 것이다.
허나 계약은 계약이다.
지킬 수 없다면 프랑스 정부 얼굴에 먹칠을 하게 되는 것이기에 천우는 갑의 위치에 서게 된 것이었다.
"자, 어떻게 하실래요?"
"이건 좀···."
"그럼 노른자위 다 빼고 간당간당한 뒷방 늙은이 같은 주식만 뽑아다 주려고 하셨습니까?"
저들은 잘 모르겠지만 천우는 프랑스 공기업의 향후 20~30년을 전부 다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사실은 저들이 뭘 감추고 있고 어떻게 은폐하고 있으며 언제 손절하게 될지 이미 다 알고 있다는 소리였다.
지금 저들의 제안을 있는 그대로 다 받아들인다면 당장은 꽤나 우량한 회사의 주식을 수령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허나 그 속을 파고들면 그게 아니니 문제였다.
"돈을 받는 입장에서 조건을 설정하는 것이 맞죠. 안 그래요?"
"···그렇다면 프리미엄을 약간만 하향조정해주시죠."
"하향이라. 제가 그럴 이유가 있다면 그렇게 하겠죠. 하지만 가문의 재산이 걸린 일에 아무런 이유 없이 프리미엄을 낮춘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이 세상은 명분에 의해 돌아간다.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명분이 없다면 비난을 받거나 법적인 책임을 짊어져야 할 수도 있다.
그것이 바로 명분이 갖는 힘인 것이다.
가문의 이름이 나오니 앙드레 파르밀로도 별 수 없다는 것을 부정할 수가 없었다.
"결코 물러서지 않으시겠군요."
"사실 이정도도 많이 양보한 겁니다. 어디 감히 가문의 금을 함부로 주식에 투자하겠습니까? 그렇다면 프리미엄으로 선산이라도 좀 으리으리하게 가꿔 드리는 것이 장손의 도리라고 생각합니다만."
사실 최 씨 일가는 조상들이 잠든 선산은 존재하지 않지만 천우가 마음만 먹는다면 추모공원 정도는 설립할 수 있었다.
아마 5% 프리미엄으로 추모공원을 짓는다면 엄청난 규모가 될 것이었다.
앙드레 파르밀로는 계약서에 프랑스 정부의 직인과 함께 담당자의 서명 란에 날인했다.
쿠웅!
이로서 천우에게 가문의 재산 중 일부가 귀속된 셈이다.
천우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앙드레 파르밀로가 꾸벅 고개를 숙였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저야말로."
프랑스 정부의 배웅을 받으며 다시 비행기에 오른 천우는 곧장 스페인으로 향했다.
비행 중, 데이비드 오셔필드가 아주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잘하셨습니다. 프랑스 놈들, 주인님 앞에서 괜히 머리를 굴리다가 한 방 제대로 얻어맞았네요."
"조금 아쉽긴 하네요. 조금 더 뜯어낼 수 있었는데."
"과유불급, 앞으로의 이미지도 생각하셔야지요. 이정도 선에서 끝내신 건 아주 잘 하신 겁니다. 만만히 보이지 않지만 그렇다고 너무 욕심을 부리지도 않은 지금, 아주 적당한 선을 지켰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만약 천우의 개인 사업이었다면 프리미엄에 각종 배네핏까지 몽땅 챙겨서 아주 프랑스를 벗겨먹었을 지도 모른다.
허나 이제는 그럴 수 없는 처지가 되어버렸다.
그렇게 아쉬운 마음을 달래며 도착한 스페인.
스페인 정부는 바르셀로나의 초호화 호텔인 그랜드 바르셀로나 호텔에서 펠리페 카를로스 왕자가 직접 사람을 보냈다며 연락해왔다.
천우는 스페인 총리내각이 사람을 보낼 것이라고 생각했다가 왕자가 관련되어 있다고 하니 미간이 저절로 찌푸려졌다.
현 국왕의 인기가 사상 최고인 점을 고려한다면 왕자의 개입은 어떻게 해서든 천우를 압박하겠다는 계산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랜드 바르셀로나 호텔 스위트룸에 도착하니 말끔한 차림의 남자가 천우를 반겼다.
"어서 오십시오. 제 2 재무차관보 후안 소리아노입니다."
"반갑습니다."
과연 펠리페 카를로스가 천우를 어떻게 압박하고자 자신이 직접 사람을 보내왔을까.
천우는 온 신경이 바짝 곤두서 있었다.
허나 뚜껑을 열어보니 그건 아니었다.
후안 소리아노는 펠리페 카를로스가 보낸 친서를 꺼내놓았다.
"왕세자께서 보내신 친서입니다. 읽어보시지요."
친서의 내용은 대략 이러했다.
16세기 에스파냐 왕조가 최가 상단에게 진 빚을 황금으로 충당하는 것이 마땅하나, 현재 왕조의 재정상 이 엄청난 양의 황금을 일시에 지불할 수 없으니 현 왕조의 사업 파트너십 채결과 함께 해당 지분으로 갚겠다는 것이었다.
최가 상단은 황금으로 빌려준 돈은 반드시 황금으로 받는 원칙이 있었다.
당시, 에스파냐 왕조는 신대륙 발견과 함께 유럽의 해상패권을 장악하고 있었으나 급속한 황금의 유입으로 물가가 상승하는 극도의 인플레이션을 경험한 이후였다.
재화의 공급은 엄청나게 늘었지만 그것을 소모할 수 있는 내수적 요인이 마땅치 않았던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이후 스페인은 극심한 재정적자에 허덕이게 되는데, 특히나 전쟁과 식민통치에 들어가는 자본을 충당하기가 상당히 힘들어졌다.
게다가 스페인은 전쟁에 필요한 병사를 대거 용병으로 채워 넣는 방식이었기 때문에 정규군으로 구성된 영국에게 참패하면서 해상패권을 빼앗기기까지 했었다.
이 과정에서 에스파냐 왕조는 최가 상단에게도 빚을 지게 되었고 그 왕조의 빚이 지금까지 내려져 온 것이었다.
그 금액을 현재의 가치로 환산하면 대략 82억 달러에 달했다.
프랑스 왕조가 졌던 빚보다 훨씬 더 많은 양이었다.
이러나 상황에서 왕자가 친서를 보낸 것이었다.
그는 아주 겸손하고 겸허한 필체로 천우에 대한 예우를 깍듯하게 갖춰주고 있었다.
물론, 대필을 했을 수도 있고 전문가의 도움을 받았을 수도 있다.
허나 중요한 것은 이러한 구절구절을 왕세자의 이름으로 보내주었다는 것이었다.
'흐음, 나와 조금 더 친하게 지내고 싶은 건가? 조만간 스페인이 본격적인 CDS시장에 진입하게 될 것을 의식하는 것일 수도 있겠고···.'
여러 가지 경우의 수가 있기는 했지만 과연 무엇이 진실인지는 천우 본인조차도 가늠할 길이 없었다.
아무튼 간에 중요한 것은 스페인 왕실에서 천우를 사업 파트너로 끌어들이려 한다는 점이었다.
스페인 왕가의 이름으로 출자한 스포츠, 관광, 서비스 계열 사업부터 농업, 공업에 이르기까지 아주 다양한 종목에 대한 지분을 천우에게 제공해준다는 조건에 시장진입에 대한 특혜까지 주겠다고 하였다.
천우로선 나쁠 것 없는 제안이었다.
"돌 직구네요. 군더더기 하나 없이 아주 깔끔하네요."
"아마도 그분의 성품이 그대로 묻어났기에 그런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만약 프랑스처럼 대놓고 돈을 묶겠다는 교묘한 줄다리기 판을 놓았다면 천우는 일언지하에 이 제안을 거절했을 지도 모른다.
허나 왕자의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처지를 있는 그대로 털어놓고 양해를 구한 것은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적어도 지금 이 모습 그대로라면 사람이 그리 나쁠 것 같지는 않군.'
그는 마샤의 데이터베이스에서 펠리페 카를로스에 대해 검색해보았다.
펠리페 카를로스는 평점이 상당히 후한 사람이었다.
-평점 4.76점에 미래지향적 성향을 가진 인물로 평가됩니다, IT를 비롯하여 차기에너지 사업 등, 미래지향적 산업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그에 대한 사업을 추진했던 인물입니다. 혁신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인물이나, 국가의 재정상황이 여의치 않았던 것이 걸림돌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을 듯합니다.
'인성이 제법 괜찮은 인물이라 이거지?'
-예, 그렇습니다. 다만, 파격적인 행보를 좋아하는 인물이라서 어디로 튈지 모른다는 것이 약간의 불안요소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 요소 때문에 손해를 본 적도 있었나?'
-네, 그렇습니다. 크고 작은 사건사고가 잇따랐던 인물입니다.
'으음!'
-미래의 국왕이기는 하나, 스페인 왕조에 대한 폐지논란이 있음으로 지금의 선택은 약간의 도박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래도 사업체가 통으로 날아가는 일은 없을 것 아니야?'
-그렇기 때문에 딱히 의견피력을 하지 않은 겁니다.
마샤의 시뮬레이터에 의하면 지금의 이 계약은 앞으로 400%가 넘는 시너지를 낼 수 있을 것이라고 분석되었다.
물론, 2010년대 진입까지 순차적으로 수익이 늘 것이긴 하지만 확실한 것은 지금의 이 계약이 천우와 가문에 도움이 된다는 것이었다.
천우는 왕자의 제안에 따라 그리하겠다고 제안을 수락했다.
"시장진입에 대한 특혜가 아주 마음에 들었습니다. 이대로 계약하시죠."
"아주 현명한 판단이십니다! 앞으로 스페인 관련 자금시장으로의 진입은 타 국가에 비해서 훨씬 더 수월해 지실 겁니다."
사실, 스페인은 그리스와 함께 2010년대 유럽의 부실금융국가로 거론되던 나라다.
미래를 알고 있는 천우로서는 스페인 시장으로의 진입이 다소 부담되었던 것이 사실이긴 하지만 정부, 왕가와의 긴밀한 협조 하에 진입이 치러진다면 충분히 승산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는 천우가 스페인 왕가와 손을 잡는다면 앞으로 스페인의 재정은 조금 달라질 수도 있을 터였다.
천우는 후안 소리아노에게 악수를 건넸다.
"앞으로 한 번 잘 해봅시다."
"감사합니다, 지금의 이 결정을 절대 후회하지 않도록 제가 최선을 다해서 돕겠습니다."
인물도감에 따르면 후안 소리아노는 미래의 국왕인 펠리페 국왕의 측근으로서 스페인이 경제위기를 돌파하는데 중추적 역할을 한다고 나와 있었다.
물론, 스페인이 입헌군주제 국가이긴 하지만 명목상으로나마 왕조가 남아있으니 그 후광과 함께 능력이 빛을 발하게 된다는 말이었다.
"앞으로 자주 연락합시다."
천우는 그에게 명함을 한 장 건네주었다.
그러자, 후안 소리아노는 기뻐하며 자신의 명함과 함께 개인 연락처를 천우에게 알려주었다.
"만약 도움이 필요하신 일이 있다면 언제든 말씀해주십시오. 제가 두 발 벗고 달려 나와 돕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이로서 HC와 최가 상단이 스페인 왕조와 긴밀한 사이로 묶이게 되었다.
< 60.(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