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7. >
57.
한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 안.
천우와 조예진, 그리고 카메라맨 이준석이 서로 정보를 교환하고 있었다.
"한국 정부에도 끄나풀이 있는 것 같다···?"
"그저 그런 것 같다는 정도가 아니라 확실하다니까요."
조예진은 얼마 전부터 정부 모처의 관련자가 SBC에게 자꾸 압박을 가해온다는 사실을 알아냈고, 그 뒤를 밟아봤더니 산자부의 수뇌부가 압력을 행사하고 있음을 밝혀 낸 것이었다.
그녀는 천우에게 녹음된 음성을 들려주었다.
-···장사 하루 이틀 하시나, 사람 말을 그렇게 못 알아들어요? 당신들 말이야, 대기업 광고에 스폰서까지 죄다 잘려봐야 정신 차리죠?
-아니, 그러니까···. 우리도 명분이 있어야 뉴스를 자르던 엠바고를 걸던 할 텐데, 도대체 무슨 수로 보도국을 단속한단 말입니까?
-우리가 그런 것까지 신경 써줘야 해요? 아예 SBC 문을 닫아줘야 속이 시원하겠어요?
딸깍.
그녀는 이 음성을 들려주면서 원래 보도되었어야 했을 기사원문을 발췌한 서류를 천우에게 내밀어보였다.
기사원문에는 중국의 유령회사가 한국으로 유입되면서 생기는 주식시장의 거품에 대해 나와 있었는데, 이는 현재 미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상과 아주 흡사한 방식의 패턴이라고
볼 수 있었다.
"이걸 덮으려고 안달복달 하고 있었던 것을 보면 아무래도 청수방직과 연관 된 어떤 세력에서 방송국에 압력을 가하라고 정부의 프락치에게 지시를 내린 것 같아요."
"으음."
"만약 당신을 만나지 못했다면 이 퍼즐 역시 맞출 수가 없었을 거예요."
그녀는 중국의 한 유령회사를 추적하기 시작했었고, 그 과정에서 청수방직이라는 회사를 알아낸 것이었다.
허나 미국과의 관계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었고 렉스테리아의 존재 역시 알 수가 없었다.
헌데 천우를 만나면서 그 모든 연결고리를 찾아낸 것이었다.
이준석은 더 이상은 자신이 없다는 듯이 말했다.
"···일이 너무 커지는 것 같은데. 나는 이만 여기서 빠지는 것이 좋겠어."
"선배, 그게 무슨 말이에요? 기껏 여기까지 왔는데 그만 빠지겠다고요?"
"특종도 좋지만 나도 일단 살아야 할 것 아니야. 자네도 잘 생각해봐. 진짜 출세를 하고 싶으면 누구의 편에 붙어야 좋을지 말이야."
천우는 이준석이라는 인물에 대해 알아보았다.
그의 인물평점은 5점 만점에 2.5점이었다.
-1981년도, SBC에 입사했다가 2003년에 퇴사했습니다. 대체적으로 입이 무거운 편이지만 워낙 겁이 많고 담이 적어서 보도국 일이 적성에 맞지 않아 퇴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
니다. 다만, 이해타산이 제법 빨라서 이후 UCC사업에 진출하게 됩니다.
'아무튼 입은 무겁다 이거지?'
-수지타산만 맞는다고 한다면요.
천우는 이준석에게 이 일에 대해서 함구하라고 부탁했다.
"그렇다면 이 일에서 빠지는 대신 비밀을 좀 지켜주셨으면 좋겠는데요."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었습니다."
천우는 주머니에서 두툼한 봉투를 꺼내어 이준석에게 내밀었다.
이준석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게 뭡니까?"
"아까 공항 근처 은행에서 뽑아왔습니다. 현금 만 달러입니다."
"···저에게 돈을 먹이시는 건가요?"
"세상에 돈보다 더 확실한 것도 없죠. 만약 제가 일을 마무리 할 때까지 함구해주신다면 만 달러를 더 드리겠습니다."
이준석의 동공이 일순간 흔들렸다.
천우는 그 찰나에 그의 호주머니에 봉투를 욱여넣어버렸다.
"사람이 일 한 만큼 대가는 받아야 하지 않겠어요? 석 달 내리 고생한 대가라고 생각하시죠."
조예진은 돈으로 맥질하는 천우를 바라보며 너스레를 떨었다.
"이야, 역시 재벌이 좋기는 하네요. 석 달에 2천이면 꽤나 괜찮은 벌이 아닌가요?"
"험험!"
이준석은 은근슬쩍 봉투를 꺼내어 그 안의 내용물을 살펴보았다.
이 세상에 현금 싫어하는 사람은 없는 법, 그는 꽤나 만족스러운 표정이 되었다.
이제 그의 입막음은 90%이상 성공한 셈이었다.
한국에 도착한 후, 천우는 그에게 다시 한 번 비밀을 강조했다.
"앞으로 좋은 협력관계가 되었으면 좋겠네요."
"걱정하지 마세요. 다른 건 몰라도 입 하나는 정말 무거우니까요."
"믿겠습니다."
이준석은 집으로 돌아갔고 조예진은 천우를 따라나섰다.
그녀는 천우를 도와서 렉스테리아의 동남아 자본을 추적해서 아주 리얼리티한 특종을 건지기를 원하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 바로 동남아로 갈 거죠? 저도 데리고 가요."
"당신은 한국에서 해야 할 일이 있잖아요."
"할 일?"
"산자부의 수뇌부를 마킹하셔야죠."
조예진은 실소를 흘렸다.
"후후, 저를 너무 모르시네요."
"······?"
"설마하니 제가 보험 하나 안 들어놓고 왔을까봐 그러세요?"
"보험을 들어놨어요? 어떻게 말입니까?"
"제가 잘 아는 언니를 그 수뇌부 놈의 측근과 연결시켜놓았어요. 아마 지금쯤이면 뭔가 썸씽이 생겨도 벌써 생겼을 걸요?"
천우는 그녀의 수완에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발이 넓어도 산자부에 끄나풀을 심을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되겠는가.
이런 사람이 적이 아니라는 사실이 천우에겐 참 다행이었다.
"좋습니다. 짐 싸서 내일 아침까지 나오세요. 제법 긴 여정이 될 수도 있으니까요."
"그래요. 카메라 좀 손보고 취재장비도 챙기려면 저도 좀 바쁘겠네요. 그럼 내일 봐요."
천우는 여자들은 준비가 많이 필요할 테니 나름대로 배려한 것인데, 아무래도 그녀는 보통의 여자들과는 뭔가 좀 다른 것 같았다.
화장품이며 옷가지는 최대한 단출하게, 하지만 취재장비는 빠짐없이 챙겨서 나왔다.
배낭 하나를 꽉 채운 그녀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공항으로 나왔다.
"자, 그럼 가볼까요?"
"생긴 거랑 다르게 참으로 여장부 스타일이시네요."
"여장부가 아니라 천생 기자인 거죠. 아무튼 갑시다."
천우는 작은 체구에서 어쩜 이런 리더십이 나오는 것인지 궁금했다.
두 사람은 비행기를 타고 태국으로 향했다.
태국 정부는 천우와 상당히 깊은 인연이 있기 때문에 정보를 모으기엔 이보다 더 좋은 지역도 없었다.
그는 청수방직으로 물건을 보내 온 기업들 중에서 몇 개를 추려서 해당 회사를 방문하기로 했다.
그 첫 번째 회사는 치앙마이 북부의 변두리에 위치해 있었다.
쏨차이 방직이라는 아주 작은 간판 하나만 덩그러니 달린 공장 입구에는 을씨년스러운 분위기의 마스코트가 서 있었다.
"도마뱀···을 형상화 한 인간인가?"
노란 눈에 파란 비늘, 그걸 사람처럼 만들어서 보는 이로 하여금 절로 진저리를 치게 만들었다.
허나 그런 강렬한 인상 덕분에 천우가 쏨차이 방직을 찾아오는 것이 어렵지 않았던 것이다.
한데 이상하게도 방직공장이라는 곳에서 비린내가 진동했다.
"···이게 무슨 냄새지?"
안으로 들어가 보니 공장 한 켠에 새우껍질을 모아놓은 봉분이 있었다.
말이 방직공장이지 이곳에서는 부업으로 칵테일 새우를 생산하고 있었던 것이다.
"수익이 안 나서 그런 건가?"
천우는 지나가던 인부를 한 명 붙잡았다.
그는 인부에게 100달러를 쥐어주며 물었다.
"여기가 쏨차이 방직공장 맞습니까?"
인부는 100달러를 받자마자 웃으며 답했다.
"네, 맞아요! 물론 이름만 방직공장이지만."
"이름만 방직공장이라고요?"
"우리는 칵테일 새우를 가공하는 사람들이에요. 원래는 쏨차이 새우공장인데, 얼마 전에 방직공장이라고 이름을 바꾸었죠."
"으음."
"한 3일에 한 번씩은 무슨 면 같은 것들이 들어오긴 하는데, 딱지만 바꿔서 다시 나가는 것 같더라고요."
"이중세탁이구나!"
"아니, 우리는 세탁을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새우를 가공해서 판다니까요?"
렉스테리아는 역시 치밀했다.
상호명만 바꾸어놓고 물건을 세탁하다가 만약 상황이 불리해진다면 새우가공 공장이라고 우길 셈이었던 것이다.
천우는 놀람과 동시에 약간의 의아함을 느꼈다.
'이상하네. 렉스테리아가 아무리 점조직 형태라곤 하지만 수뇌부가 죄다 감방에 들어가 앉았는데, 이렇게까지 치밀한 조직력이 나온다고···?'
예전에 렉스테리아가 거의 반쯤 자의로 감옥에 들어갔을 때만 해도 모두가 정계와의 연관성에 집중하고 있었다.
허나 이제 보니 정말 그보다 더 위의 상부조직이 존재하는 것 같았다.
'아주 헛소리를 지껄인 게 아니었네.'
바로 그때였다.
저 멀리에서부터 트레일러 한 대가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저거, 바로 저거에요! 저기서 물건이 마구 내려와요!"
"오호라."
***
한가로운 오후의 뉴욕 센트럴 파크.
아론 테이트는 그 여유로움을 잠시 만끽하며 앉아 있었다.
"부국장님, 중동에서 소식이 도착했습니다."
"요즘 소식통이 좀 늦는군. 아무래도 물갈이를 좀 해줘야 하는 건가?"
"최근 수니파의 움직임이 활발해져서 아무래도 정보통이 움직이는데 한계가 있는 모양입니다."
"빌어먹을 것들, 돈은 돈대로 처먹고 목숨까지 건지려 하다니. 욕심이 너무 많은 거 아니야?"
"하지만 그렇다고 애써 키워놓은 정보통들을 잃을 수도 없는 노릇 아닙니까."
마음에 드는 구석이 하나도 없었지만 그래도 부하들의 말처럼 공들여 키운 정보통을 개죽음으로 내몰 수는 없었다.
정보본부에서 보내온 전문은 단 한 장에 불과했다.
허나 그 안에 들은 내용은 가히 충격적이라 할 수 있었다.
"···테러분자들이 갑자기 사라졌다?"
"아무래도 테러를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CIA에서는 테러분자들의 본거지를 찾아내 24시간 감시하고 있었는데, 일주일 전부터 이들의 움직임이 포착되지 않고 있었다.
정보통의 말에 따르자면 그들에게서 '뉴욕'이라는 단어가 자주 언급되었다고 했었고 일주일 전부터 수상한 움직임이 있었다고 했다.
"뉴욕에 테러를 자행하기 위해 오는 것인가!"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군 당국과 FBI에게 이 사실을 알려야 하는 것 아닙니까?"
섣부른 판단은 혼란을 야기 시킬 수도 있었다.
허나 그렇다고 지금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가 나중에 걷잡을 수 없는 일을 만들어낸다면 그 누구도 감당할 수 없을 것이 분명했다.
"어떻게 할까요?"
뉴욕을 봉쇄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렇다고 아랍인들을 닥치는 대로 잡아다 족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진퇴양난의 상황이었으나 아론 테이트는 가까스로 정신을 가다듬었다.
"놈들이 사라진 것이 정확히 언제라고?"
"8월 23일입니다."
"지금이 29일이니까···."
"비행기를 타고 왔다면 벌써 준비는 끝났을 지도 모릅니다."
아론 테이트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아직 시간은 있어. 생각해봐. 저놈들도 바보는 아닐 텐데, 우리의 눈을 피하기 위해서 상당히 조심스럽게 움직이지 않았겠어? 게다가 우리는 미국으로 들어오는 비행기의
탑승객 전원의 신원을 조사하고 있잖아. 저들이 그걸 모른다면 몰라도 만약 알고 있다면 일주일 가지고는 시간이 부족하지 않겠나?"
"하긴, 생각해보면 그렇긴 합니다."
미국의 첩보위성은 상상 이상으로 성능이 뛰어나다.
제 아무리 테러분자들이 똑똑하다곤 해도 첨단과학을 뛰어넘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아론 테이트는 출입국사무소부터 찾았다.
"지금부터 미국에 들어오는 아랍인들의 신상명세를 모두 파악해서 조사할 수 있도록. 더불어 미국행 비행기들에 대한 신원조사 역시 철저하게 실시하고 말이야."
"네, 알겠습니다."
이제부터는 정보전이었다.
아론 테이트는 가용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테러분자들을 색출할 계획을 세웠다.
< 57.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