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노머신 재벌 3세-113화 (113/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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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2)

뉘엿뉘엿 해가 지려하고 있었다.

기울어진 땅거미에 아슬아슬하게 걸친 움막을 예의주시하고 있던 천우는 별안간 움직임을 포착했다.

바스락!

-움막 안에서 누군가 나오려고 하고 있어요!

'그저 땅꾼일까? 왜, 요즘 중국산 뱀이다 뭐다 몸에 좋은 걸 죄다 수입해서 한국에 팔곤 하잖아. 그런 사람들 아닐까 싶기도 한데.'

-보통의 땅꾼이라면 땅거미가 지기 전까지 움직이고 해가 진 이후에는 천막을 치고 잠을 자겠죠.

'으음, 그러고 보니 그러네.'

군사용으로 제작된 마샤는 청각과 후각, 그리고 촉각 등이 엄청나게 발달해서 움막 안에 사람이 숨어 있다는 것을 간파해냈다.

천우는 움막을 그냥 지나쳐갈까 싶었지만 산비탈 한 귀퉁이에 자리 잡은 저 사람의 정체가 너무 궁금해서 대략 한 시간만 지켜보기로 한 것이었다.

어차피 그는 불빛이 없는 상황에서도 앞을 볼 수 있도록 진화했기 때문에 생존시간이 낮이든 밤이든 상관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잠시 후, 산비탈의 움막에서 벙거지 모자를 쓴 수상한 차림의 여자가 나왔다.

그녀는 덩치가 워낙 작고 아담해서 대충 눈대중으로 봐도 성별을 구분할 수 있을 정도였다.

벙거지 모자를 푹 눌러 쓴 그녀는 주변에서 나뭇가지들을 주섬주섬 챙기더니 모자에 꽂기 시작했다.

'뭐하는 거지?'

-위장을 하는 건 아닐까요?

마샤의 말대로 그녀는 주변과 제법 비슷한 계통색의 옷을 입었고 얼굴도 까맣게 칠해서 수풀 사이에 움직이지 않고 그대로 있으면 멀리서는 식별하기가 불가능 할 것으로 보였다.

도대체 뭘 위해서 저렇게 위장까지 하는 것일까.

천우는 그녀가 하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찰칵!

도대체 뭘 하는 가 했더니 그녀 역시 천우처럼 산비탈 어귀에서 청수방직을 감시하고 있던 모양.

천우는 그녀가 무슨 목적으로 저런 행동을 하는 것인지 궁금해졌다.

그는 어둠 속을 틈타 그녀에게로 슬그머니 다가갔다.

혹시라도 그녀가 놀라서 소리를 지를지도 모르니 최대한 기척을 숨긴 채 기어갔다.

"···이럴 수가, 저렇게 해서 남의 돈 떼어먹고 잠적하겠다는 심보였어!"

-그럼 얼른 영상만 따가지고 내려와! 시간 없어, 누가 먼저 터트리기 전에 우리가 먼저 터뜨려야 한다고!

"네, 선배!"

순간, 천우는 그 자리에 우뚝 멈추어 섰다.

혼자서 청수방직의 뒤를 캐는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팀이 있었던 것이다.

그녀의 허리춤에 반짝거리는 발광다이오드가 보였다.

천우는 슬그머니 다가가 무전기의 전원을 꺼버렸다.

딱!

그러자, 그녀가 놀란 토끼눈을 했다.

"저, 저기···."

"쉿, 수상한 사람 아닙니다. 얘기 좀 하려는 것뿐이니 소리 지르지 마세요."

"···저, 저를 죽이실 건가요?"

"내가 당신을 왜 죽입니까? 나도 청수방직을 요절내려고 온 사람인데."

과연 그녀가 천우의 말을 믿어줄까.

하지만 어쨌든 지금은 그녀가 뒤통수에 천우를 매달고 있는 형국이었기 때문에 딱히 뭘 어쩔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천우는 뒤로 한 발자국 물러서며 말했다.

"방송국에서 나오셨나요?"

"···우리는 SBC의 기자들이에요."

"SBC? 한국말입니까?"

"네, 맞아요."

"꽤 멀리서 오셨네요. 그나저나 담도 크십니다. 저 사람들, 상당히 위험한 사람들일 것이라곤 생각 안 해보셨나요?"

"삼합회 같은 조직과 연관되어 있을 것이라곤 생각해봤어요."

아무래도 SBC는 저들이 렉스테리아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까진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이 영상을 가지고 가는 즉시 터뜨릴 것이고, 그렇게 된다면 천우가 렉스테리아와의 접점을 찾는 것이 상당히 어려워 질 수도 있었다.

천우는 그녀에게 한 가지 제안을 했다.

"특종을 원하시는 거죠?"

"기자들은 다 그래요. 안 그런 사람도 있을까요?"

"그렇다면 제가 특종을 드리도록 하죠."

"특종?"

"엄청난 특종입니다. 혹시 앵커자리를 노리는 것이라면 한 방에 출세시켜드릴 수도 있죠."

"······!"

"단,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그게 뭔데요?"

"일단 이 사건에서는 손을 떼세요."

천우는 그녀를 스타로 만들어 줄 수 있는 능력이 충분했다.

허나 그녀의 입장은 조금 달랐다.

"당신이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는 이 사건만 무려 3개월 동안 팠다고요. 그동안 집에서 못 들어가고 저 허름한 오두막 안에서 침낭 하나 덮고 자면서 버텼단 말이에요. 그런데

그런 사건을 포기하라고요?"

그녀의 체구는 분명히 가냘플 정도로 작았지만 하는 말마다 '똑'소리가 절로 나오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런 똑순이라면 천우가 함께 할 가치는 충분할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한 발자국 물러나야 한다는 겁니다."

"어째서?"

"생각해봐요. 저들은 미국 나스닥을 뒤흔들 정도로 치밀한 놈들입니다. 당신들이 아무런 준비도 없이 곧바로 놈들의 정체를 까발리게 된다면 이미 투자자들의 돈은 공중으로 흩어

져 버릴 것이고 관련자들도 해외로 도피해서 남는 것이 없을 테죠."

"그렇다고 저 사람들을 가만히 내버려둔다는 것도 말이 안 되지 않나요?"

천우는 고개를 저었다.

"당신은 지금 아주 단편적인 것만 보고 있습니다. 당신네들이 저 사람들을 건드림으로 인해서 생길 한중 양국 간의 외교충돌은 생각 안 해보셨어요?"

"그야···."

"입장 바꿔서 만약 내가 외교부장관이면 기자 몇 명 쳐내고 국교정상화를 택하겠습니다. 게다가 미국은 또 어떻고요? 자기나라 자금이 하늘로 증발해버릴 텐데, 당신들이 하는 짓을

그냥 두고만 보겠습니까?"

그녀는 약간 일그러진 얼굴로 아랫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그래서 뭘 어쩌라는 건데요?"

"어쩌긴요, 대비부터 해야지. 지금 이대로는 당신들이 역으로 두들겨 맞는 꼴 밖에는 안 된다고요."

"그럼 당신에게는 뾰족한 수가 있고요? 당신이 누구인데요?"

천우는 야광물질이 든 일루미네이터를 터뜨린 후, 그것을 자신의 얼굴에 들이댔다.

그러자, 그의 이목구비가 훤히 드러났다.

"최천우라고, 들어보셨나요?"

"허어! 슈퍼보이···."

"쉿, 누가 듣겠어요."

"세상에나···! 당신 같은 사람이 왜 이런 곳에?"

"설명하자면 좀 길어요. 아무튼 간에 방송 송출은 추후에 꼼꼼히 상황을 살펴보면서 결정해도 늦지 않습니다."

"으음."

그녀는 천우라는 인물이 가진 영향력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방송국 기자가 아니던가.

딸깍.

무전기를 켠 그녀는 동료를 찾았다.

"선배, 지금 거기 계세요?"

-이런 미친···?! 걱정했잖아. 그나저나 무전기는 왜 끈 거야?

"사정이 좀 있었어요. 아무튼 간에 아직 차는 안 뺀 거죠?"

-당연히 안 뺐지. 자네가 잘못되면 우리 모두 끝이라는 거, 잘 알고 있잖아?

"다행이네요. 지금 내려갈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요."

-영상은 다 찍은 거야? 본부장한테 연락하면 되는 거지?

그녀가 천우를 휙 쳐다보았다.

한 박자 쉬는 그녀, 나름대로 복잡한 머리를 정리하려는 것이었다.

-야, 조예진이! 내 말 들려?

"네, 들려요."

-연락한다?

"아니요, 아직 하지 마세요. 제가 더 화끈한 특종을 물어왔거든요."

-오호, 정말?

"일단 내려가서 얘기해요."

약간 떨떠름한 표정이긴 하지만 그녀가 천우에게 협조적으로 나오는 것 같으니, 그는 미소를 지었다.

"자, 그럼 산을 내려가서···."

"잠깐."

"······?"

"당신, 정말 약속 지킬 거죠? 정직한 건 확실한 거죠?"

"속고만 사셨나. 제가 한 점 거짓말이라도 했다면 이 자리까지 올 수 있었을 것 같아요?"

"그러니 더 걱정이죠. 보통 그 자리까지 간 사람들 중에 진짜 정직한 사람이 몇이나 되겠어요?"

천우는 웃으며 말했다.

"후후, 그럼 막말로 내가 만약 사기꾼이라면 손을 안 잡을 것이란 말인가요?"

"그야···."

그녀의 동그란 얼굴이 와락 일그러져 버렸다.

아랫입술이 대발은 나온 그녀에게 천우가 웃으며 말했다.

"중요한 건 내가 정직한 사람인가 아닌가가 아닙니다. 당신을 스타로 만들어 줄 수 있느냐, 아니냐가 중요한 거지."

"참으로 편리한 주관을 가졌네요. 부러워요."

그녀는 어딘지 모르게 잔뜩 뿔이 난 걸음으로 산비탈을 내려갔고, 그녀의 뒤를 따르며 천우는 상당히 재미있는 사람을 만났다고 생각했다.

***

싱가포르 선물시장 안.

웅성, 웅성!

브루스 카렐은 시장 구석에서 싱가포르 식 볶음국수를 퍼먹고 있었다.

그의 옆에는 신문뭉치 하나와 노트북, 그리고 PDA등이 놓여 있었고 머리는 며칠을 안 감았는지 잔뜩 떡이 져 있었다.

얼마 전부터 선물거래 일반 투자전문가 자격으로 이곳에 틀어박혔던 브루스는 거의 매일 이곳에 살다시피 하고 있었다.

시장이 문을 닫으면 숙소로 돌아가서 하루 종일 차트를 분석하고 선물동향에 대해 공부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미 이 부문에서 꽤나 인정을 받고 있었던 브루스는 어리지만 체스터 카렐 가문의 강력한 신성으로 거론되고 있었다.

허나 그는 아직도 자신에게 부족한 무언가가 있다고 생각했다.

'도대체 나에게 없는 그 무언가가 과연 무엇일까?'

얼마 전, 그는 거듭되는 추락으로 인해 자신감을 잃었던 적이 있었다.

그때 그는 자신에게 가문이 없다면 그저 보통의 투자전문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아무리 잘 쳐줘봤자 전문지식이 조금 풍부한 사람일 뿐이지, 절대로 특출 난 뭔가가 있는 사람은 아니라는 것을 절감한 것이었다.

그 특별함을 채워줄 무언가가 과연 무엇일까.

그는 아까 점심에 먹다가 남은 볶음국수를 대충 입에 욱여넣었다.

면이 불어서 밀가루냄새만 나는 국수를 먹으면서도 그는 이게 무슨 맛인지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배가 고프니까 먹는 것이지 뭔가 음식을 즐긴다는 마음은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그는 목구멍 어딘가에 음식이 턱 걸리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켁, 켁! 젠장, 이게 뭐야!"

8월 중순, 그동안 오펙이 그토록 논의해왔던 감산이 수포로 돌아가 버린 것이었다.

그에 따라서 유가는 곤두박질치기 시작했고 관련 주가 역시 연신 파란색 화살표만이 가득하게 되었다.

요즘 시장의 대세에 따라서 유가가 상승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브루스는 큰 충격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국제정세와 시장의 흐름을 완벽하게 분석했고 시장에 죽치고 있으면서 이곳저곳에서 들리는 정보와 찌라시를 총동원해서 내린 결정이 바로 석유관련 선물이었다.

헌데 어처구니없게도 그는 2천만 달러의 손실을 얻고 말았다.

"허어···. 이렇게 허무할 때가 다 있나?"

그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허나 브루스의 눈에 또 다른 정보가 눈에 들어왔다.

그것은 바로 선물옵션에 대한 분산투자의 일환으로 해두었던 소규모 잔돈투자 종목의 성장이었다.

그가 투자했었던 종목은 바로 설탕과 펄프였다.

최근 산림훼손이 슬슬 문제가 되고 있었으나 여전히 설탕과 펄프의 생산량은 꾸준히 늘어나고 있는 추세였다.

브루스는 90년대 후반에 설탕가격이 갑자기 올랐다가 서서히 떨어지던 기점에 투자를 해두었는데, 사실 그 저점에서 올라봐야 얼마나 오르겠냐는 생각이었다.

헌데 그가 절대 유망한 종목이 아니라고 생각했었던 바로 그 종목들이 이번에 크게 올라 상품시장에 큰 변동이 일어났던 것이었다.

그제야 그는 깨달았다.

"대세에 휩쓸리니 당연히 손실을 입을 수밖에···."

브루스는 자신에게 부족한 것은 지식이나 정보를 통해 얻을 투자방법론이 아닌, 진흙 속에서 진주를 찾아내는 경험과 감각이었던 것이다.

이제까지 그는 시장의 대세만을 좇는 어리석은 바보와 같은 짓을 하고 있었던 셈이다.

그는 당장 호텔 사우나로 달려갔다.

그리곤 찬물에 몸을 던져버렸다.

첨벙!

잠시 후, 물에서 나온 그는 결연한 의지를 다졌다.

"3년 간 맨땅에 헤딩하면서 배우는 거다!"

< 56.(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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