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5. >
아랍에미리트의 수도 아부다비의 골드인 호텔 안.
호텔 로비에는 지배인 애나 롤리스가 캐리어를 끌고 오는 한 남자를 마중하고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VIP룸을 마련했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죠."
남자는 호텔리어의 도움을 거절한 채 직접 캐리어를 끌고 스위트룸 아래층에 있는 VIP룸으로 향했다.
애나 롤리스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는 동안 그에게 깍듯한 어투로 물었다.
"몇 박 며칠로 묵으십니까?"
"아직 정해진 것은 없습니다."
"그럼 무기한으로 숙박 장부에 기입해두겠습니다."
"그래주시지요."
VIP룸은 스위트룸보다 작지만 개인의 프라버시를 최대한 유지해주기 위한 설비가 완벽하게 구비된 방이었다.
이곳에서라면 바주카포를 연발로 쏴대도 밖에선 그저 작은 울림으로밖에 들리지 않을 것이었다.
강화철판에 45cm 이상의 특수콘크리트옹벽, 특수합금으로 만들어진 골조가 진동을 잡아주어 그 어떤 장비를 들이대도 소리를 완벽하게 차단할 수 있었다.
VIP룸으로 들어선 남자는 애나 롤리스에게 팁을 전달해주었다.
"고맙습니다."
"네, 그럼 좋은 숙박 되십시오."
그렇게 애나 롤리스는 밖으로 나갔다.
남자는 그녀를 내보내놓곤 이내 읊조리듯 말했다.
"···손님을 이런 식으로 맞습니까?"
"에이, 샤워하는 모습이라도 좀 훔쳐보려고 했더니."
기다렸다는 듯 사방천지에서 하나 둘 모습을 드러내는 사람들, 그들은 하나같이 까만 양복을 입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레몬과 같은 색의 백금발을 길게 늘어뜨린 여자가 너스레를 떨었다.
"거참, 좋은 구경 좀 하려고 했더니."
"사람을 아랍에 짱박았으면 보상이라도 줘야지, 이건 뭐 아무것도 없이 부려먹는 수준 아닙니까?"
"짱박아···?"
그녀의 눈빛이 예리해졌다.
아까의 장난기는 오간데 없이 사람을 산채로 회 치고도 남을 기세였다.
"CIA가 빽 좀 써서 아랍에 기름장사꾼으로 짱박아줬으면 뭔가 가지고 오는 것이 있어야지, 뭐가 어째?"
"저는 시키는 대로 움직였습니다. 아시잖아요, 제가 사우디와 이라크를 오가면서 수니파의 움직임을 감시했다는 것을···."
CIA공작본부 제 4 작전과장 세실리아 요나스는 정보원 론 블루길의 따귀를 후려쳤다.
짜악!
그 손이 어찌나 매서우면 190cm의 거구가 목이 획 돌아간 채로 휘청거렸다.
"크윽!"
"부랑자 새끼를 사업가로 만들어줬더니 뭐가 어째?"
"저, 저는 시키는 건 다 했습니다!"
"시키는 걸 다 하긴 했지. 하지만 건질 것이 하나도 없었다는 게 문제지."
"···그럼 어쩝니까? 그렇다고 정말 죽을 수는 없잖습니까."
세실리아 요나스는 눈물을 머금는 론 블루길에게 손짓했다. 그리곤 그를 욕실 간이의자에 앉혔다.
순식간에 제 4 작전과 요원들 6명이 그를 순식간에 에워쌌다.
"자, 그럼 여기서 문제. 아랍 새끼들이 더 위험할까, CIA가 더 위험할까?"
"정말 왜 이러십니까···? 저는 시키는 대로 다 했다고요!"
"아까도 말했지만 유효타수가 없으면 정보원은 그냥 쓰레기야."
"끄응···."
"정말 제대로 된 사업가가 되고 싶다면 정보를 가지고 와. 수니파를 비롯한 극단주의세력과 더욱 견고한 관계를 맺으란 말이야. 그러라고 밀수 길도 열어주었는데 왜 자꾸 딴소리를
하지?"
CIA는 극단주의세력과의 유착을 위해서 정보원들을 밀수꾼으로 위장시켜 잠입시켜두었다.
정보원들은 목숨을 걸고 돈을 벌 수 있는 대신에 정보를 얻지 못하면 차라리 죽는 것이 나을 정도의 고통을 겪게 될 수도 있었다.
세실리아 요나스는 론 블루길에게 선박의 보험 증권을 건네주며 말했다.
"서류작업 끝냈고 미 해군과도 얘기 끝냈어. 중국으로 천만 달러 상당의 원유를 운반하게 해줄 테니 가서 거한 정보 좀 물어와."
"···천 만!"
"대신 실패하면 그 즉시 네놈은 물론이고 그 가족들까지 극단주의세력에게 노출되어 죽을 거다. 우리가 너의 신상명세를 놈들에게 보내버릴 거거든."
"허어!"
"신중하게 행동해라. 정말 한 방에 골로 보내버리는 수가 있어."
남들이 볼 때엔 세실리아가 론을 너무 더럽게 다루는 건 아닌가 싶지만, 그건 론이 지금까지 챙긴 돈이 얼마인지 잘 모르기 때문이었다.
석유사업가로서 챙긴 돈이 수 십 만 달러, 그러면서 뒤로 챙긴 돈도 결코 만만치가 않았다.
CIA로서는 돈만 날리고 얻는 것이 별로 없으니 더 이상 그를 살려둘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그걸 너무나도 잘 아는 론이기에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 있었던 것이다.
"그나마 내가 인내심이 좀 있어서 다행이야. 저 친구들이 담당자였다면 이미 너는 죽어서 백골이 되고도 남았어."
"···알겠습니다. 이번에야 말로 한 방 제대로 해보겠습니다!"
"일주일 주겠어."
"넵!"
***
1998년 겨울, 유럽에는 엄청난 한파가 닥쳐왔다.
160여 명이 동사한 이 엄청난 기상이변 때문에 국제유가는 요동쳤고 경제상황도 급격하게 곤두박질 쳤다.
그 즈음, 중국의 거대자본이 유럽의 채권시장을 잠식하기 위해 봇짐을 쌌다.
중국은 97년도 전당대회를 통하여 13,000개였던 국유회사를 3,000개 수준으로 줄이고 남은 1만 개의 회사를 사유화함과 동시에 주식회사 제도를 전면도입 했다.
88년도부터 시작된 주식시장 개방이 9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 본격화 되었고, 수차례의 법안개정으로 확대되었다.
이로서 중국은 공산당이 지배하는 이중체제의 자본주의가 출범하게 된 것이었다.
개방물결과 함께 중국의 자본은 구미시장 전역을 파고들기 시작했고 심지어는 아프리카의 자원시장에 막대한 자본을 투자했다.
이 과정에서 의도치 않게 유럽시장에 악재가 겹치면서 중국계 자본이 채권을 싹쓸이하는 현상이 벌어진 것이었다.
천우는 이 시점에 주목했다.
제 아무리 중국자본이 대단하다곤 하지만 그렇게 짧은 시간 동안 미국에 뿌리를 박을 수 있을 것이라곤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88년도부터 지금까지 미국으로 유입된 중국자본들을 추적하기 시작했다.
CIA는 물론이고 미국 상무부의 자료까지 탈탈 털어서 현금의 흐름을 추적해 나가기로 했다.
나노머신의 연산능력은 나날이 발전하고 있었기에 자료만 수집하면 가상의 데이터를 만들어서 자체적 시뮬레이션이 가능했다.
마샤는 천우가 준 자료를 가지고 시뮬레이터를 돌려서 몇 가지 가설을 만들어냈다.
-최근의 데이터를 바탕으로 미국으로 들어온 중국계 자본의 데이터를 보면 중국의 자본은 88년도에 비해 무려 1200%나 늘어났습니다. 투여된 자본에 비해서 가중치가 비정상적
으로 높다는 것이죠. 만약 저들이 중국에서 자본을 가져다 날랐다면 우회하여 자금을 유통시켰을 가능성이 큽니다.
"자금의 우회라. 저 중에는 순수한 자본도 있긴 하겠지?"
-그게 가장 큰 문제라고 할 수 있겠죠?
중국 사람들이라고 다 나쁜 것이 아닌 것처럼 중국의 기업들이라고 전부 페이퍼컴퍼니는 아니었다.
허나 주식회사법이 개정되면서 10,000개의 국영기업은 대부호들을 만들어냈고 그 산하로 엄청난 자본이 풀리면서 이루 셀 수조차 없이 많은 기업들이 생겨나고 사라져갔다.
분명 건강한 회사도 미국으로 들어와 기업을 경영하고 있으니 그 진위여부를 가리기가 참으로 힘든 것이었다.
어찌되었건 간에 마샤가 선택한 가상의 시나리오에는 영국을 영유한 자본과 아프리카를 경유한 자본, 그리고 한국을 경유한 자본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우회한 자본 중에서 가장 덩어리가 큰 자본이라면 당연히 영국계 자본이 될 겁니다. 하지만 미국으로 유입되기 가장 좋고 간편한 것을 따진다면 한국이 유력합니다.
"퍼센트로 따진다면?"
-대략 56%로 한국계 자본의 유입이 가장 유력합니다.
자금을 액면 그대로 양성적으로 퍼 나르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하지만 그걸 음성적으로 돌린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환치기, 스와프, 이중장부···. 헌데 범죄루트가 너무 많아서 잡을 수 있겠어?"
-가능합니다. 환치기나 스와프는 잡을 수 없지만 이중장부는 확실히 잡을 수 있을 테니까요.
아무리 교묘하게 속여도 이중으로 작성한 회계에는 반드시 구멍이 존재한다.
이를 테면 1200원의 가치를 가진 A라는 물건을 2000원에 팔아치운 후, 그에 대한 리베이트를 돌려받는 형식이 현재 중국계 범죄자들의 이중장부 스타일이다.
그러니까 돈이 아예 전무한 상태에서는 주가를 뻥튀기 할 수 없을 테니, 돈이 오간 정황만 잘 잡아내면 색출이 가능하다는 소리였다.
물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사소한 물건, 심지어는 바늘 하나의 단가까지 전부 따져봐야 한다.
일반적인 경우라면 수 백 명이 달려들어도 모자랄 판이지만 천우는 일주일이면 충분했다.
다만 정보가 풍부해야한다는 것이 문제이긴 했지만, 그건 상무부에서 알아서 해줄 것이었다.
그런 가운데 천우는 한국정부와도 접촉했다.
자금이 한국을 통해서 들어갔다면 분명 그곳에도 흔적이 남아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산자부에서는 관련 자료를 내어주면서 자신들인 중국계 자본과의 결탁에 대해선 협의가 없다고 적극적으로 부인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동맹국가의 경제에 직접적으로 타격을 가하는 범죄에 연루했다면 관계가 상당히 껄끄러워 질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천우는 일단 알겠다고 대답은 했으나 CIA는 의심을 지우지 못했다.
산자부 자체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 아니고 그 안에 잠입해 있을 지도 모르는 인물들이 문제라는 것이었다.
어쨌든 자료는 받았고 천우는 그것을 빠르게 분석하기 시작했다.
헌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뭐야, 이게?"
95년도부터 98년까지 총 50차례에 걸쳐 프랑스의 투자회사인 렉스 컴퍼니에서 대량의 자본이 한국으로 들어온 정황이 나와 있었다.
그러니까, 다시 말하자면 렉스테리아가 한국으로 직접 자금을 쏴서 비자금을 조성했다는 소리였다.
천우는 조용히 산자부차관 정청수와 접촉했다.
정청수는 무척이나 조심스럽고도 민감한 사안이라면서 운을 뗐다.
"쉽사리 답을 드리기 힘든 부분이네요. 게다가 이 안건은 통산부 시절에 일어났던 사건이기에 뭐라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그래도 내부자가 있을 가능성이 있으니 색출에 협조를 해주시긴 하시겠지요?"
"그야···."
그의 눈치를 보아하니 이 사건에서 빠지고 싶어 하는 것이 뻔히 보였다.
천우는 사태의 심각성을 잘 인지하지 못하는 듯해서 그에게 첨언을 해주었다.
"잘 들으세요. 공을 토스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상공부, 통산부 등으로 이어지는 갈래 모두를 통틀어 범죄사실을 깔끔하게 정리하지 않으면 두고두고 화근이 될 겁니다."
"으음."
"그리고 한 가지 더, 한국의 재계는 깔끔하다고 자신하실 수 있습니까?"
"···네?"
"주식시장 작전으로 치고 빠지는 세력이나 역합병으로 회사를 먹어치우는 세력은 없냐는 말입니다."
코스닥의 대규모 작전주 사태는 빈번하게 일어나는 사건 중 하나였다.
의례 그렇듯, 불법으로 모집되는 작전주의 경우엔 공정위 등에서 단속을 하겠지만 100% 검거가 가능한 것은 아니다.
게다가 아직은 100% 법이 완벽하게 정립이 된 건 아니지 않던가.
천우가 거듭 물었다.
"자신하세요?"
"아아···!"
"탄식이 나오시는 걸 보면 그게 아니라는 걸 잘 알겠네요."
산자부차관은 그제야 깨달았다.
미국이 바보라서 혼자 당하는 것이 아니고 가장 큰 시장이라서 도드라져 보일 뿐이라는 것을 말이다.
< 55.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