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노머신 재벌 3세-108화 (108/202)

< 54. >

54.

천우의 2년 공백 동안 미스릴은 그야말로 눈부신 발전을 이루었다.

얼마나 무섭게 발전했으면 주가상승을 막기 위해 모회사에서 대대적인 자금출자로 투기를 막았을 정도였다.

주가가 2년 만에 무려 4.5배나 뛰었고 시가총액은 이제 어지간한 대기업들 뺨을 가볍게 후려 칠 수준이었다.

특히나 검색엔진 리어코스와 야호 등이 엄청난 강세였는데, 해당 회사들의 투기열풍을 억누르는데 만해도 족히 수 천 만 달러는 깨졌을 것이다.

허나 미스릴의 이러한 노력 덕분에 거품은 줄어들었고 꾸준한 사업 다변화와 이익창출집약형 경영으로 내실을 다질 수 있었다.

그러나 2000년 1월에 터진 버블붕괴 이후, 미국의 IT주식은 도무지 일어설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었다.

내실다지기로 투자했던 돈이 무색할 정도로 리어코스의 주가는 가파르게 떨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천우는 이 타이밍에 자회사 및 투자회사 합병에 들어갔다.

대주주로서 회사가 더 힘을 잃기 전에 야호와 리어코스를 합병해서 재난을 막으려는 것이었다.

야호는 검색에서 강세였고 리어코스는 이메일과 광고에서 수익이 많이 들어오니 이 회사를 합치면 분명 시너지가 발휘될 것이었다.

이런 식으로 회사 8개를 3개로 축소시키고 나머지 회사들에 대한 대대적인 자금수혈에도 착수했다.

또한, 업무협약을 통하여 계열사 간 시너지를 높이고 이윤창출의 극대화를 노리기로 했다.

김영실은 천우에게 합병 결과에 대한 보고서를 제출했다.

"합병결과, 리어코스가 야호에게 흡수되는 형식으로 합병이 마무리 되었습니다. 또한, 아마존스와 구골이 합병되면서 미스릴 엔진으로 상호가 변경되었습니다."

"미스릴 엔진이라? 굳이 상호를 변경할 필요가 있었나요?"

"대표이사의 결정이랍니다."

"흠, 뭐 그렇다면야."

아마존스와 구골의 창업자는 다들 쟁쟁한 사람들이지만 아마존스는 적자누적과 함께 닷컴버블에 휩쓸려 거의 녹다운 상태가 되어버렸었다.

만약 천우가 아마존스를 인수하지 않았다면 엄청난 양의 중국자본이 아마존스를 집어삼켰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마 그 때문인지 아마존스 CEO의 입김은 그룹 내에서 점점 작아져 만가고 있었다.

'안타깝군. 인재가 어깨를 펴지 못하다니.'

천우는 그에게 새로운 숙제를 내어주어 기지개를 켤 수 있도록 해주기로 했다.

"아마존스에게 물류라인 정비와 함께 효율적인 배송시스템을 설계해서 가지고 오라고 전해주세요."

"기한은 얼마로 잡을까요?"

"혁신에 시간은 필요 없죠. 아무데나 편하게 가지고 오라고 전해주세요. 그리고···."

천우는 나노머신에 내장되어 있던 배송시스템을 차례대로 나열하여 적은 후, 그것을 김영실에게 전해주었다.

"이걸 모델로 삼으면 더 좋을 것이니 시뮬레이션을 통해 꾸준히 고치라고 해주세요."

"···이건 그냥 말 그대로 대표님이 초안을 짜고 저쪽은 그냥 수정하는 정도 아닙니까?"

"아니요. 아이디어의 씨앗이라고 생각하시면 될 겁니다."

절대로 경영에 간섭할 생각은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CEO를 수렁에 빠지도록 내버려둘 수도 없었다.

물론, 그가 이번 기회를 통해서 자존심을 접고 크게 깨달아서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갈 수 있다면 같은 회사 내부의 양대 산맥인 구골의 창업주들도 자극을 받을 것이라, 천우는 그리

확신했다.

그녀는 곧이어 천우에게 HC은행에 대한 보고서를 올렸다.

보고서에는 2년 동안 꾸준히 증가한 부실채권을 철저히 심사하여 매입했고, 그것의 일부는 정크본드로 취급해서 손절했다는 내용이 나와 있었다.

천우는 약간 불만족스러운 표정이었다.

"은행의 규모는 커졌는데 채권으로 인한 수익은 오히려 줄었네요?"

"정크본드로 빠져나간 자금에 대한 이익률이 상당히 적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현재 은행장은 누구죠?"

"조지 레인입니다."

"조지 레인이면 HC금융에서 투자전문3팀장으로 있었던 사람이죠?"

"네, 맞습니다. HC채권담당에서 추심본부장을 역임하기도 했었고요."

"한마디로 채권심사에 너무 재능이 치우쳐 있어서 수익을 내기 힘든 부분이 있는 거네요."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는 우리 HC의 기본 이념인 저점투자와는 달리, 손절에 뛰어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조지 레인과 같은 채권전문가는 치고 빠질 때를 수학적으로 계산하는 사람들이라서 만약 채권의 신용도가 한 등급만 떨어져도 당장 손절을 생각하게 된다.

물론, 그것은 천우가 HC은행의 투자경영에 대한 지표를 내려주지 않았기 때문이긴 했다.

허나 그렇게 쳐도 이 사람은 안전제일, 무사탄탄이 몸에 밴 사람이라서 약간 문제가 있을 것 같았다.

게다가 그와 동시에 경영압박도 상당히 거셀 것이라, 천우는 그리 생각했다.

"오늘 점심엔 HC은행으로 가볼까요?"

"이렇게 갑자기 말입니까?"

"제가 하는 일이 무엇이겠어요. 회사가 잘 돌아가도록 조율하는 일이잖아요."

"하긴, 그런 그렇지요. 알겠습니다,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천우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이번에는 저 혼자 다녀오겠습니다."

"굳이 그럴 필요가···."

"오늘 점심 스케줄은 딱히 없죠?"

"네, 그렇습니다."

"그럼 2시까지 스케줄을 비워달라고 부탁해봐야겠네요."

천우는 비서실로 향했다.

그는 원래 오늘 1시부터 2시까지 미스릴 컴퍼니의 물류라인 점검에 참여할 예정이었으나 돌연 노선을 바꾸기로 했다.

미스릴은 합병을 통해 쇄신하였고 그만큼 성과도 좋았기 때문이었다.

비서들에게 스케줄을 미루라고 말해둔 후, 천우는 지하철을 타고 HC은행 본사로 향했다.

점심시간이라 그런지 거리에 사람은 많았지만 지하철은 제법 한산했다.

'아버지는 요즘도 지하철을 타신다고 했지.'

예전에 천우가 폭설이 내린다고 최호명에게 지하철을 타고 출근하라고 생떼를 썼던 적이 있었다.

그때 최호명은 무사히 위기를 넘겼고 지금도 뭔가 머리가 무거울 때면 서류가방 하나 덜렁 들고 지하철을 타곤 했다.

천우는 조지 레인에게도 그런 경험을 선물해주고 싶었다.

웅성, 웅성!

엄청나게 많은 인파가 운집해 있는 HC은행의 본사.

천우는 비서실을 통해 오늘 조지 레인에게 점심약속이 없다는 걸 전해 들었기에 곧장 안내데스크로 향했다.

"은행장님 계신가요?"

"어디서 오셨나요?"

"본사에서 나왔습니다."

"본사요?"

천우는 슬그머니 사원 증을 내밀었다.

사원 증에는 HC투자의 대표이사라는 명함이 떡하니 박혀 있었다.

깜짝 놀란 그녀에게 천우는 귓속말을 전했다.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는 걸 원치 않아요. 대표이사가 왔다고 그냥 말만 전해주세요. 저는 지하철역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아, 알겠습니다!"

너무 갑작스러운 방문에 놀랐을 것이라곤 생각했지만 천우는 일부러 기습 방문을 해본 것이었다.

자신이 온다고 전하면 어쨌든 간에 뭔가 준비하려 노력할 것이고, 그것은 상당히 비생산적인 행동이기 때문이었다.

천우는 은행 로비에 있는 커피숍에 들러서 가볍게 마실 차를 좀 사서 가기로 했다.

"주문 도와드리겠습니다!"

"따뜻한 녹차 한 잔, 그리고 카모마일 차 한 잔 부탁드릴게요."

"네, 알겠습니다!"

그는 주문을 해놓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카페는 은행에서 운영하는 곳인데, 수익이 제법 괜찮다고 들은 기억이 있었다.

"매출은 좀 괜찮아요?"

"매출이요? 그건 회사 기밀사항인데요."

"하하, 그런가요?"

매출이 얼마나 될지 아쉽긴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허나 그래도 기분은 좋았다.

'입이 무겁네.'

천우는 찻값으로 2만원을 건네며 말했다.

"찻값 4천원에서 남은 건 보너스라고 생각하세요."

"보너스요?"

"아무튼 수고해주세요."

천우는 아르바이트생에게서 일종의 소속감과 주인의식을 느꼈고, 그에 기본이 좋아진 것이었다.

팁을 주니 아르바이트생은 동료들과 기뻐하며 그것의 일부를 떼어서 주었다.

"다 같이 받은 팁이니까!"

"언니, 정말 그래도 괜찮아요? 공부하느라 아르바이트로 번 돈으론 빠듯하다면서요."

"괜찮아. 사람이 어려울 때도 있는 법이지."

점점 마음에 드는 사람이었다.

천우는 나중에 저 사람을 이 회사에 취직시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잠시 후, 그는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여유.

비교적 한가한 시간을 보내고 있던 천우에게 조지 레인이 다가왔다.

"망중한을 즐기고 계시네요."

"오셨습니까?"

"방문하실 것이라면 미리 연락을 주시지 그러셨습니까? 그럼 제가 횟집이라도 알아봐 두었을 텐데."

"됐어요. 일단 좀 걸을까요?"

"어디를 가시는데요?"

"가보면 압니다."

천우는 조지 레인을 데리고 한남역으로 향했다.

그러는 동안 지하철에 나란히 앉게 된 두 사람은 자연적으로 사업얘기를 꺼낼 수밖에 없었다.

특히나 고민이 많았던 조지 레인은 쉴 세 없이 떠들어댔다.

"제가 아무래도 은행을 맡은 건 회사의 실수가 아닌가, 그리 생각됩니다. 수익이 너무 저조해서 이정도면 차라리 미국계 펀드에 짱박아두는 편이 나을 정도입니다."

"하하, 정말 그렇게 생각하세요?"

"저는 능력이 없습니다···."

"하지만 은행장님, 한 번 잘 생각해보세요. 우리는 분명 밑지고 들어왔습니다. 아무리 특혜를 많이 받았다곤 해도 초기에 투자한 자금이 상당히 많았죠. 하지만 지금은 어때요? 투자

금의 1/3 이상은 건졌다고 생각되는데요."

"대표님이셨다면 벌써 투자금 상환은 물론이고 은행의 순위가 바뀌어 있겠지요."

그 이후로도 조지 레인은 쉴 새 없이 신세한탄을 했다.

천우는 그의 자존감이 너무 낮아졌다고 생각했다.

지하철은 정거장마다 멈추었기 때문에 HC은행이 있는 여의도에서 한남역까지는 생각보다 제법 오래 걸렸다.

천우는 그동안 조지 레인의 말을 묵묵히 들어주었다.

아마도 그는 외지에서 혼자 회사를 짊어지고 가느라 상당히 압박이 심했을 것으로 보였다.

해서 천우는 그의 얘기를 끝까지 듣기만 했던 것이다.

"휴우···."

조지 레인은 한남역에 도착하고 나서야 후련한 듯, 웃었다.

"이제 좀 낫네요."

"그렇죠? 사람이 그렇더라고요. 누군가 끌어주는 사람이 없으면 항상 외롭고 힘든 법이죠."

천우는 그를 데리고 대폿집으로 들어갔다.

조지 레인은 대낮부터 무슨 술을 마시나 싶었지만 그저 웃고 말았다.

"한 잔 쭉 마시고 털어버려요."

"···그래도 될까요?"

"지금부터는 제가 채권이며 투자에 대한 지표를 짜드리겠습니다. 그걸 가지고 투자를 하는 건 당신의 몫이에요."

"예전처럼 말입니까?"

"그래요, 예전처럼."

"그렇다면야!"

그제야 조지 레인의 표정이 밝아졌다.

두 사람은 대폿집에서 가볍게 한 잔 마신 후, 다시 돌아와 집무를 마무리하였다.

그리고 다시 만나서 진탕 마신 후에 헤어졌다.

그로부터 얼마 후.

HC은행의 행보가 완벽하게 달라졌다.

지금까지는 계속 손절에만 매달렸던 HC은행이 돌연 이익금 비율을 줄이고 버티기에 들어간 것이었다.

처음에는 주변에서 조지 레인의 판단력이 흐려진 것이 아니냐고 걱정했지만 그건 기우에 지나지 않았다.

그가 손에 꼭 쥐고 있던 부실채권들이 돌연 가치가 확 올라서 단 한 달 만에 손실을 싹 털어버렸던 것이다.

이제 조지 레인은 깨달았다.

지금부터는 과거의 이론을 버리고 저점투자이론을 따라야 산다는 것을 말이다.

< 54. > 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