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노머신 재벌 3세-106화 (106/202)

< 53. >

53.

이른 아침부터 천우를 찾아온 손님들이 꽤 많았다.

천우의 입대 이후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슈퍼보이를 찾았지만 그는 그저 짧은 서신 몇 장만 되돌려 줄 뿐, 대외석상에 얼굴을 드러낸 적은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천우와 직접 얼굴을 맞대고 조언을 듣고 싶었던 것이다.

가장 문제가 컸던 곳은 바로 러시아, 중국으로 진출했던 에너지 개발회사였다.

이들은 1998년 8월, 러시아의 모라토리움(대외채무지불유예) 사태로 인하여 엄청난 타격을 받았었다.

채무지불유예가 가진 파장은 생각보다 강력했는데, 특히나 이곳에서 에너지를 퍼다 나른 사람들에게 돌아갈 피해는 상상 그 이상이었다.

지금까지 에너지를 개발해주고 그것을 퍼다 한국으로 날라주기까지 했건만, 결국 지불유예가 선언되면서 복합적인 자금압박이 시작된 것이었다.

게다가 조선업계의 경기가 활성화되기는 했으나 여전히 덤핑수주에 제작여건 개선의 부재로 인한 수지악화가 계속되고 있어 관련 업계는 이중고를 겪고 있는 상황이었다.

중러 에너지 개발단 제 6기의 회사들은 전 기수들이 자리를 잡을 동안 거의 공치사로 일을 해주었던 탓에 구조가 많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들은 천우에게 도움의 손길을 요청했다.

"98년부터 99년까지 받은 타격이 아직까지 가고 있습니다. 방법을 좀 알려주시면 좋겠습니다만."

"으음, 정확히 원하시는 것이 채권회수입니까? 아니면 지금융통입니까?"

"둘 다입니다."

천우는 아주 간단히 해결방안을 주었다.

"자원을 사세요."

"무슨 자원을 말입니까?"

"지금 아마 천연가스에만 줄을 대고 있을 겁니다. 맞죠?"

"네, 그렇기는 하죠."

"채굴한 자원만 가지고 들어온다고 생각하지 말고 다변화를 좀 꾀하는 것이 좋겠네요."

"다변화라."

"얼마 전부터 남미의 구리광산에서 노동자 총파업이 간헐적으로 지속되고 있다는 거, 아실 겁니다."

세계 3대 구리 생산업체인 '구포루 멕시코'가 자사의 카나메이라 광산의 생산을 일시중단하면서 단 하루 사이에 무려 1%에 달하는 가격상승을 보였다.

뿐만 아니라 구리 가격은 계속해서 상승세를 보일 것이 분명했다.

"멕시코 노동자들의 불만사항이 폭주하고 있습니다. 임금상승 16%가 아니면 절대 합의를 하지 않겠다는 태세죠. 만약 이대로 파업을 1주일만 지속해줘도 구리 값은 7%이상 오를

겁니다."

"겨우 파업 일주일 밖에 안 되었는데도요?"

"파업은 일주일이지만 투기세력은 이미 파업이 터진 그 순간부터 준비하고 있다가 이틀 차에 매수를 시작할 겁니다. 누군가 직접 나서 화재를 진화하기 전까지는 계속해서 금속가

격은 오르게 되겠지요."

"으음!"

"이미 뉴욕상품거래소(NYMEX)에는 슈퍼 사이클이 도래했다는 소리가 왕왕 들리고 있습니다. 아시겠지만 최근 미국의 주식시장이 영 시원찮다는 것, 그리고 닷컴관련주의 버블이

사실상 붕괴 수준을 밟고 있는 이상 상품은 계속해서 오를 겁니다. 저들의 파업은 그 대세를 잘 보여주는 아주 간단한 예라고 볼 수 있지요."

만약 사방팔방에 구리가 넘쳐난다면 저들이 파업을 하든 말든 아무도 신경을 쓰지 않을 것이다.

허나 최근 파이프 소재를 비롯한 합금기술이 발전하면서 건물 내관 등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구리 값도 덩달아 뛰는 추세다.

게다가 지금까지는 구미의 세력들이 수로 광물을 소비하였었는데, 이제는 공이 개도국을 비롯한 신흥공업국, 동남아시아 신흥국 등으로 옮겨가고 있었다.

특히나 80년대부터남미의 브라질과 아프리카의 남아공, 나이지리아 등이 꿈틀대더니 90년대를 기점으로 폭발적인 성장을 거듭하고 있는 중이었다.

물론, 아직 정치적 여건과 치안의 불안 등이 문제가 되고 있기는 하지만 그 성장세는 상당히 두드러진다고 할 수 있었다.

신흥국이 성장한다는 것은 결국 철이건 구리건 자원이 많이 소모된다는 소리인데, 상품을 많이 찾으면 한정된 자원은 몸값이 뛸 수밖에는 없다.

그런 가운데 구미의 투기세력이 한 몫 해준다면 가격은 빠른 속도로 오를 수밖에는 없었다.

"비철부문에 투자해보세요. 아마 처음 몇 개월은 힘들어도 금방 팔자 펼 겁니다."

"으음!"

"아마 자회사들도 원자재 값 상승을 몸소 체험하고 계시지 않나요? 저는 그런데요."

"뭐, 그야 그렇지요."

"우리 계열사의 공개 자료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호주와 구 영연방 소속 국가 광산회사의 순매출이 무려 50%이상 오른 것을 알 수 있을 겁니다. 주가는 그보다 훨씬 더 많이 올랐죠.

만약 제가 사전에 손을 써서 주가상승을 저지하지 않았다면 아마 지금쯤은 시가총액이 너무 많이 불어서 힘들어졌을 지도 모릅니다."

"허어! 그 정도란 말입니까?"

천우는 답이 없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는 슈퍼보이라는 별칭을 얻었던 그 때부터 저점투자와 더불어 상품시장에 대한 중요성을 누누이 강조했었습니다. 하지만 그걸 등한시하다가 2000년대에 들어서고 나서야 주목

하기 시작하네요. 왜 그런 거죠?"

"크흠!"

다들 헛기침을 하기 바빴다.

일찍이 천우는 펄프, 고무, 커피 등, 상품시장의 사이클이 심상치 않다고 강조했었으며 석유와 금, 천연자원 등이 쓰레기 취급을 받았을 때에도 거의 도박이라고 생각될 정도의 돈을

투자했었다.

이제 천우는 상품관련 시장에서 거의 내로라하는 큰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었다.

불과 20년도 안 되는 시간동안 그는 200년 넘게 이어져 온 전통 큰손들을 제쳐 버린 것이었다.

"다들 눈앞에 이익만 좇지 마시고 제발 멀리 보세요. 이대로 가다간 대한민국의 산업이 폭삭 주저앉고 말 겁니다."

"···명심하겠습니다."

"채권회수가 어렵다면 러시아의 지하광물을 대신 받아서 가지고 오는 것으로 합의를 보세요."

"아아! 그런 방법이!"

천우는 이미 러시아에서 지불유예가 터질 것을 감안하고 꽤 많은 자금을 투여한 바가 있었다.

그것이 바로 일본과 합작으로 시작된 에너지 개발에 고스란히 녹아들었는데, 러시아 정부에서는 해당 채무를 채권으로 정형화해서 주겠다고 선언했었다.

물론, 만기날짜가 다 되어 모라토리움을 선언하였고 천우는 원래 받을 가격보다 무려 1.8배나 되는 돈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게다가 그걸 자원관련 채권으로 전환해버리니 수익이

거의 2.5배는 되었다.

이처럼 블루오션은 얼마든지 있고 천우는 그걸 아주 효과적으로 파고들고 있었던 것이다.

"자, 그럼 돌아가셔서 천연자원부터 들여오시고 자금이 회전되면 덤핑수주는 이만 끊어버리십시오."

"덤핑수주를 끊으면 우리는 뭘 먹고 삽니까?"

"품질경영을 하셔야지요. 임금을 아무리 올려봤자 품질개선은 되지도 않습니다. 조금 더 효율적인 건조방식을 찾아보는 것이 나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호황 속 불황은 다른 속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80년대에 그랬듯, 호황 속에 가격이 내려가는 것이고 그에 회사를 맞추다보면 거품만 끼기 마련이다.

천우는 한국의 조선업이 이대로 정체된다면 향후 10년 안에 본격적인 침체국면을 맞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허나 그것도 별 수 없는 일이긴 했다.

'당사자들이 깨닫지 못한다면 내가 아무리 떠들어봤자 말짱 도루묵이 되어버리겠지 뭐.'

그렇게 중러 에너지 개발단 6기가 모두 돌아갔다.

이윽고 천우에게 예정에 없던 손님이 찾아왔다.

"대표님, 러시아에서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러시아요?"

"경제개발부차관이라고 하십니다."

"······!"

"어떻게 할까요?"

무슨 경제개발부차관이 이렇게 밑도 끝도 없이 찾아온단 말인가.

천우는 아무런 대비도 하지 못했지만 일단 손님을 들이기로 결정했다.

"들여보내세요."

"예, 대표님."

잠시 후, 러시아 경제개발부차관 알렉산더 노바크 차관이 들어왔다.

사람들은 러시아 남자하면 불곰, 즉 엄청난 떡대를 상상하지만 이 남자는 달랐다.

상당히 마른 체격에 키는 165cm남짓 되었다.

허나 그의 두뇌는 타의 추정을 불허할 정도라고 알려졌으며 현 러시아 경제개발에 가장 큰 축을 담당하고 있었다.

-알렉산더 노바크, 평점 5점 만점에 4.5점입니다.

'호오, 평점이 꽤 높군.'

-이 사람은 두뇌가 아주 좋은 대신에 정치를 잘 못합니다. 결국 차관에서 장관으로 치고 올라가지 못하고 생을 마감하고 말 겁니다.

'도감에 나온 바에 따르자면 총리까지 올라가도 이상할 것이 없는데?'

-정치를 못하면 절대 못 올라간다는 거, 잘 아시잖아요?

'하긴.'

천우는 지금까지 머리는 좋지만 정치를 못해서 매장당한 사람들을 수도 없이 봐왔다.

아마도 알렉산더 노바크 역시 그런 사람임이 분명했다.

그는 천우에게 악수를 건네 왔다.

"반갑습니다. 알렉산더 노바크 차관입니다."

"최천우입니다."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HC투자를 러시아로 들여오시면서 꽤 많은 일을 해주셨더군요. 우리에게 채권상환연장을 해주시기도 하셨고요."

"인생은 파도 아닙니까. 정치적으로 안정이 된다면 채권상환이야 언제든 받을 수 있다고 저는 확신하거든요."

"좋게 봐주시니 너무나도 감사할 따름입니다."

인사치례는 이쯤이면 충분한 것 같았다.

천우는 그에게 용무를 물었다.

"보통은 차관정도 인사가 회사로 직접 찾아오는 경우는 생각보다 드뭅니다만."

"그렇긴 하지요. 허나 그만한 이유가 있다면 얘기가 달라지지 않겠습니까?"

그는 천우의 앞에 '1급 기밀'이라고 적힌 두툼한 서류뭉치를 내어놓았다.

아무런 말없이 서류만 내밀었기에 천우는 그걸 열어서 한 번 살펴보았다.

순간, 천우는 깜짝 놀라서 그만 서류뭉치를 내려놓고 말았다.

"···이걸 왜 저에게 보여주시는 겁니까?"

"도움을 청하고 싶으니까요."

서류 안에는 신유고연방과 나토연합의 냉전이 지속되던 가운데 러시아로 들어왔던 신유고연방의 자금내역이 들어 있었다.

도대체 이걸 천우에게 보여주는 이유가 무엇일까.

천우의 궁금증은 얼마 지나지 않아 풀렸다.

"아시겠지만 나토와의 관계가 악화일로를 걷고 있던 90년대 말, 모라토리움이 발생하면서 사실상 러시아의 경제는 잠시 공황상태에 빠져 있었습니다. 헌데 그러던 도중, 누군가 신

유고연방 수장들의 비자금을 대놓고 러시아로 흘려보냈습니다. 2000년도, 민중봉기로 대통령이 물러나면서 정권은 붕괴되었지만 구유고연방이 저질렀던 코소보 학살 등에 대한 책

임은 남아 있는 상태였죠."

"그 상태에서 비자금이 흘러들어왔다는 말은···."

"누군가 신유고연방의 지도세력을 러시아가 빼돌렸다고 아예 대놓고 공작했다는 소리입니다."

"흐음."

"이 사태로 인해서 지불유예가 더욱 가속화 되었고 지금도 경제사정이 썩 나아지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천우에게 대량의 채권을 증여하겠다는 서류와 함께 HC의 이름으로 된 회사를 설립해달라는 조건의 계약서를 가지고 왔다.

"아무래도 나토연방과 그 이하 국가들에 대한 수출규제가 여전히 남아 있는 상태입니다. 지하자원의 수출을 좀 도와주시지요."

엄청난 제안이긴 했다.

허나 나토연합과의 관계를 청산하지 않는다면 천우로서도 쉽지 않은 결정이 될 것이었다.

그는 깊은 고민에 빠져 들었다.

< 53. > 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