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2.(2) >
52.(2)
1998년 12월.
춘천 102보충대로 장병들이 물 밀 듯이 밀려오고 있었다.
그중에는 머리를 빡빡 민 천우도 있었다.
그는 언론에는 철저히 비공개로 군에 입대하였고 이곳 춘천으로 입대하게 되었다.
입대현장에는 마이클과 줄리아가 동행해주었다.
세 사람은 언제나 그렇듯 줄리아만 실컷 떠들고 두 사람은 일방적으로 들어주는 그림으로 시간을 보냈다.
줄리아는 천우의 까까머리가 너무나 마음에 든다면서 연신 카메라의 셔터를 눌러댔다.
찰칵, 찰칵!
"어쩌면 좋아···. 감자야, 너 진짜 감자 같아. 어렸을 때보다 한 100배는 더 감자 같은 거 알아?"
"···놀리는 거야?"
"쿡쿡, 그만큼 귀엽다는 거잖아."
"별게 다 귀엽다고 하네."
세 사람은 보충대 앞에 있는 갈빗집에서 냉면을 한 그릇 먹고 들어가기로 했다.
먹는 내내 줄리아는 혼자서 거의 만담을 했고 두 사람은 그저 묵묵히 들어주다가 대답만 해줄 뿐이었다.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마이클과 천우가 그녀를 귀찮아하는 것으로 보이겠지만 사실 세 사람은 이런 그림이 익숙하고 편안했다.
원래 말이 없는 마이클은 억지로 말을 안 해서 좋고 직업의 특성상 말을 많이 해야 하는 천우 역시 이들과 있을 때만큼은 말을 하지 않아서 좋았다.
줄리아는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다 할 수 있으니 좋았다.
세 사람이 이렇게 지내는 건 어쩌면 서로의 취향이 이상하게 밸런스를 맞추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그렇게 서로에게 기대어 지낸 우정이 벌써 10년이 넘었다.
이제는 눈빛만 봐도 어떤 서로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을 정도였다.
가만히 갈비를 먹던 마이클이 물었다.
"표정이 별로 안 좋네."
"그래 보였나?"
"병영에 갇혀 있을 생각을 하니 심란한 거야?"
"아니, 그런 건 아니고."
줄리아는 배시시 미소를 지었다.
"흐흐, 알겠다! 너 숨겨둔 여자 친구가 있는 거지?"
"···뭔 소리야 그게?"
"씁! 차라리 귀신을 속여라. 이 누나가 눈치 100단이라는 걸 몰라서 잔머리를 굴려?"
사실, 천우는 주변정리를 제대로 하지 않고 입대를 해버렸다.
그냥 최대한 사람이 적은 병과에 지원해서 들어갔기 때문에 무려 한 달 만에 입대영장이 나온 것이었다.
그 바람에 미묘한 기류가 흘렀던 그녀에게는 미처 입대를 통보하지 못한 채 춘천까지 와버렸다.
천우는 그게 가장 마음에 걸리는 것이었다.
줄리아는 호탕하게 천우의 등을 후려 쳤다.
짜악!
"···왜 때려."
"뭐 그런 걸 가지고 침울해 하고 그래? 이 누나가 군대 선배로서 충고하겠는데 말이야, 2년쯤이야 금방 간다. 그리고 그 여자에게 입대를 알리지 않은 건 어쩌면 잘 한 일일 거야. 안
그랬으면 2년 동안 꼬박 너를 기다릴 거 아니야."
"뭐, 그거야 그렇지."
사실, 천우가 말을 하지 못한 건 그녀가 혹시라도 자기를 기다릴까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성격이라면 그러고도 남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어지간하면 웃지 않는 마이클도 이번만큼은 미소를 지었다.
"그래, 꽁치의 말이 맞아. 차라리 말을 하지 않은 것이 합리적이야."
"오호, 웬일이냐? 조언을 다 해주고?"
"친구잖아."
천우는 비록 짧은 시간이지만 그녀가 좋은 남자를 만났으면 했다.
잠시 후, 세 사람이 밖으로 나와 연병장으로 향했다.
-입대를 위해 모인 장병들은 신속히 연병장으로 집합해주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 번 알립니다···.
시간에 딱 맞춰서 나와 보니 다들 침울한 표정으로 입대를 준비하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전미라가 생각나서 살짝 침울했던 천우도 이제는 슬슬 표정이 풀어졌다.
미련이 사라진 것이었다.
세 사람은 짧은 입소식을 마쳤다.
그리고 돌아서는 천우에게 두 친구가 손을 흔들었다.
"잘 다녀와!"
"그래, 나중에 또 보자!"
천우는 일말의 미련도 없이 입대해 버렸다.
***
2000년 2월.
막판 폭설이 미친 듯이 몰려와 대한민국 전체를 아예 눈덩이로 만들어버렸다.
강원도 화천의 한 수색대대 막사에도 눈난리가 났다.
"이런 씨부랄! 이놈의 하늘에는 구멍이 뚫렸나, 2월만 되면 지랄이야!"
천우는 연일 계속되는 재설작전에 거의 지쳐 죽기 일보직전이었다.
99년 2월에도 그렇게 눈이 내리더니 이놈의 부대인근에는 눈이 내리면 그칠 줄을 모른다.
이럴 땐 차라리 말뚝 근무를 나가거나 작전을 나가는 것이 훨씬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막사를 신축하고 화천군에서 재설차를 운행한다고 했지만 그게 도대체 언제인지는 발표되지도 않았다.
담당 재설구간을 다 치우고 나면 막사 안을 치워야하고 그게 끝나면 인근 마을 주민들도 도와준다고 대민지원까지 나갔다.
헌데 눈이 하루아침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문제였다.
"···군대에 눈치우려 온 건지 수색하러 온 건지 모르겠네."
재설작전 때마다 모두가 다 하는 생각이다.
도대체 이놈의 눈은 왜 쉬지도 않고 내리는 걸까. 혹시 내가 있는 곳에만 누군가 일부러 눈을 만들어 뿌리는 것은 아닐까.
어찌되었건 시간은 흘러 고통의 재설작전이 끝났다.
거의 일주일 동안 지옥과 같은 시간을 보냈던 천우는 다시 일상으로 되돌아갔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상병 최천우, 중대본부로.
한참 장비를 손질하고 있던 천우는 중대본부로 들어갔다.
"상병 최천우, 중대본부에 용무 있어 왔습니다."
"최천우, 당장 전투화 손질하고 외출복으로 환복하고 와라."
"잘 못 들었습니다?"
"면회 왔다고 이 새끼야. 얼른 들어가서 환복하고 와라."
지금까지 천우는 100일 휴가를 제외하면 외박이며 외출, 휴가 등을 나가본 적이 없었다.
그나마 포상으로 나오는 휴가는 분대 원들에게 다 뿌리고 정기휴가도 반납했다.
행여나 매스컴에서 파파라치라도 동원했을까봐 걱정이었기 때문이었다.
괜히 시끄러워 구설에 오르느니 그냥 휴가 따위는 반납하는 것이 속편했다.
처음에는 저놈이 미쳤나 싶었던 중대원들도 천우에게 뭔가 사정이 있겠거니 하고 이해했다.
그 정도로 밖으로 나가는 걸 꺼려하는 천우였다.
천우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한데···. 저희 부모님은 미국에 계신데 말입니다?"
"숨겨뒀던 애인이라도 찾아왔나보지."
"그럼 근무는, 아니 작전은 어떻게 합니까?"
"그 새끼, 말이 많네. 그냥 좀 닥치고 나갔다와. 정 불만이면 면회 온 사람한테 돌아가라고 직접 말하던지. 우리는 그럴 권한이 없어서 말이야."
뭔가 좀 떨떠름했다.
그렇게 돌아서던 천우에게 중대장이 말했다.
"아참, 그리고 어지간하면 남자답게 행동해라."
"······?"
"뭘 꾸물거려? 얼른 사라져."
"예, 옙!"
일단 천우는 대충 전투화만 닦고 대대 입구로 향했다.
도대체 누가 찾아왔다는 것일까.
혹시라도 기자라면 고소를 해버려야겠다고 생각하며 걸었다.
바로 그때였다.
"···천우 씨?"
몹시도 익숙한 목소리.
천우는 기겁해서 옆을 돌아보았다.
"허억! 미라 씨?!"
설마하니 미라가 자신을 찾아왔을 것이라곤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천우였다.
너무나도 뜻밖이라 천우는 그 자리에 그저 얼음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그런 그에게 다가온 미라.
그녀는 천우의 가슴팍을 주먹으로 힘껏 후려 쳤다.
퍽퍽.
"···어쩜 사람이 그럴 수가 있어요? 일언반구 한 마디 말도 없이 그렇게 가버릴 수가 있냐고요!"
"아니, 그게···."
"1년 동안 생각하고 또 했어요! 나는 당신을 좋아했는데 당신은 아니었던 건가?! 나를 가지고 논 건가?!"
"아, 아닙니다! 그런 거 아닙니다! 나도 미라 씨를 좋아했다고요!"
그녀의 울음에 몹시도 당황했던 천우, 위병소 앞은 그야말로 적막강산이 따로 없었다.
꿀꺽!
긴장감이 감도는 위병소 앞.
천우는 남자답게 외쳤다.
"저는 당신이 2년 동안 저를 기다리느니 그냥 자유롭게 살았으면 했습니다! 그래서 피를 토하는 심경으로 조용히 입대했습니다! 당신이 그렇게 괴로울 줄은 몰랐어요!"
"···거짓말."
"정말입니다! 이게 거짓말이면 저는 천벌을 받아 지뢰를 밟을 겁니다."
"정말이죠?"
"물론이죠!"
"···난 또, 혹시 다른 여자를 만난 건 아닌 가 걱정했잖아요."
"하하, 저는 그럴 재주가 없는 남자인데. 모르셨어요?"
"피이, 말이나 못 하면."
사실 그녀도 천우가 무슨 생각으로 그랬는지, 어떤 사정인지 다 알고 있었다.
다만 사람의 마음이, 아니 여자의 마음이 그렇지 않았을 뿐이었다.
그간 속상했던 마음은 천우를 만나면서 봄날의 눈처럼 사르르 녹아버렸다.
그녀는 천우의 손을 꼭 잡았다.
"가요. 아까 중대장님께서 1박 2일 외박을 수락해주셨어요."
"아아, 중대장님을 만나셨습니까?"
"아주 친절하시더라고요. 제가 정중히 부탁을 드리니까 외박을 허락해주시는 거 있죠?"
"뭐라고 부탁하셨는데요?"
"나를 버리고 도망간 남자 좀 찾으러 왔으니까 도와달라고요."
"···도망이요?"
"맞잖아요. 도망친 남자."
그제야 천우는 중대장이 왜 그런 소리를 했는지 알 것도 같았다.
'어쩐지!'
***
세월은 유수와 같이 흘러간다.
2001년, 천우가 군에서 전역했다.
비록 지독한 재설작전을 넘기고 나서야 바깥세상으로 나올 수 있었지만 그래도 밖으로 나오니 좋기는 했다.
위병소 앞으로 최고급 승용차가 달려와 멈추었다.
이제는 구설수에 오를 일이 전혀 없었기에 김영실이 그를 마중하려 나온 것이었다.
"대표님, 고생 많으셨습니다."
"별 말씀을요."
"전투화는 꽉 묶으셨습니까? 줄리아 씨의 말이 제대 할 때 전투화 끈이 풀리면 다시 돌아온다는 말이 있답니다."
"하하, 어쩐 일로 농담을 다 하세요?"
"한 번쯤은 해보고 싶었습니다."
잠시 후, 차의 뒷문이 열리며 한희연과 최호명이 나왔다.
천우는 군에 입대한 이후에 전화도 잘 안했기 때문에 한희연의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그녀는 천우의 얼굴을 매만지며 한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 아들, 몸 성히 잘 다녀왔구나! 수색대대로 갔다기에 걱정 많이 했는데, 이놈은 전화도 한 통 안하고!"
"잘 다녀왔으면 됐죠. 엄마는 그세 주름이 몇 개 더 늘었네요?"
"···누구 때문에 그렇지!"
곧이어 천우의 곁으로 최호명이 다가왔다.
그는 말없이 천우를 안아주었다.
"고생 많았다. 매스컴에 가십거리 안 만들어주려고 휴가도 반납하면서 지냈잖냐. 쉽지 않았을 텐데, 정말 잘 참았어."
"아버지에 비하면 저야 뭐."
"나야, 그냥 그땐 잠깐 미쳐서 그랬던 거고. 아무튼 장하다, 우리 아들."
세 가족은 김영실과 함께 서울로 향했다.
서울에 도착한 김영실은 천우에게 일주일 내로 회사에 복귀해달라면서 스케줄 표를 전해주었다.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일주일 내로 복귀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음, 그러죠."
아마도 김영실은 이 말을 전하기 위해서 온 것 같았다.
원래는 보름정도 쉬려고 했던 천우는 어쩔 수 없이 일주일 휴식에 만족해야 했다.
허나 그래도 불만은 없었다.
비록 몸이 고생이긴 했어도 아무런 중압감 없이 지냈던 2년 동안 그는 꽤 많이 힐링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거기서 인생을 되돌아보았고 머리를 비우고 나올 수 있었다.
만약 강원도 산골에 쳐 박혀있지 않았다면 절대 느낄 수 없었을 감정들이었다.
부모님과의 2박 3일 후, 천우는 다시 집으로 돌아갔다.
그 앞에는 전미라가 서 있었다.
"한 잔 할래요?"
그녀의 손에 있는 소주병을 보며 천우는 환하게 웃었다.
"얼마든지요."
< 52.(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