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0.(2) >
50.(2)
밥 윌러스는 동생 레이가 실종된 지 3일 째가 되자, 이제는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그러던 그에게 한 장의 즉석사진이 도착했다.
사진을 받은 밥 윌러스의 손과 눈이 덜덜덜 떨려왔다.
"렉스테리아, 이런 개자식들!"
실수가 있었다.
사기의 타깃으로 건드린다는 것이 하필이면 한양의 최가 상단이었고 그 종손이 HC투자의 대표였던지라 펀드는 거의 박살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덕분에 자금수급은 원활하지 못했고 윌러스 탐사 팀은 그 즉시 모은 돈을 들고 도주하려 했었다.
허나 바로 그 전날에 레이 윌러스가 납치를 당하는 바람에 밥 윌러스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잠시 후, 그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전화를 받았다.
"네, 여보세요?"
-어이, 윌러스 씨. 남의 돈 꿀꺽하고도 안녕하신가?
순간, 밥 윌러스의 온몸에 전율이 일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잔악한 마피아, 살아있는 악마에게서 전화가 온 것이었다.
허나 밥 윌러스는 자신의 뺨까지 때리며 정신을 차렸다.
짜악!
"···내 동생은 지금 어디 있습니까?"
-그쪽 동생이 어떻게 되었는지 내가 알 바야?
"그게 무슨 말입니까? 아무리 그래도 사람이 살았는지 죽었는지 정도는 알려줄 수 있는 거 아닙니까."
-뭘 잘못 처먹었나보군. 아무튼 간에 상환날짜가 한참이나 지났는데 태연히 전화를 받는 배짱 하나는 높이 사주겠어.
말을 자꾸 돌리는 걸보면 동생이 아주 멀쩡하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허나 적어도 죽지는 않았으니 전화를 했겠거니, 그는 그리 치부할 수밖에는 없었다.
밥 윌러스는 자신 때문에 동생이 저 지경이 되었다고 생각하니 스스로에 대한 자괴감까지 들었다.
-자, 그럼 어떻게 해줄까? 한 번 골라봐. 어차피 돈 갚기는 글렀으니 어떤 방식으로든 분할상환을 해야 할 거 아니야?
"···마음대로 하세요. 나를 죽이든 반병신으로 만들든 당신들 입맛에 맞게 요리해서 드시죠."
-우리가 미쳤어? 사지 멀쩡한 놈을 도대체 뭐 하러 죽이나, 죽을 때까지 부려먹어서 한 푼이라도 빼먹어야지. 안 그래?
렉스테리아는 이해타산이 빠른 사람들이다.
아무리 깊을 못 갚는다고 해도 그를 즉시 죽이지는 않는다.
죽여서 이득이 된다면 몰라도 보통은 사람을 노예로 전락시키는 방법으로 재화를 창출해냈다.
노예로 부리는 방식에는 여러 가지가 있었다.
대상이 가진 능력에 따라서 평생 새우 잡이나 하다가 죽을 수도 있었고 탄광에서 석탄을 마시다가 폐암으로 죽을 수도 있었다.
다만, 밥 윌러스의 경우엔 발굴과 탐사에 재능이 있으니 쓸모가 아주 많을 것이었다.
-발굴을 잘하면 도굴도 물론 문제가 없겠지?
"···나를 도굴꾼으로 만들어 부려먹겠다는 겁니까?"
-그게 싫으면 유황광산에서 얼굴이 노래져 죽을 때까지 일하는 방법도 있긴 해.
사태가 불거졌을 때 도망쳤다면 이런 끔찍한 협박은 받지 않아도 되었을 지도 모른다.
그는 눈을 질끈 감았다.
'이 모든 것이 내 잘못이다!'
도저히 동생을 버릴 수는 없기에 그는 도굴꾼으로 나서기로 했다.
"좋습니다. 할게요."
-그래도 죽는 건 싫은 가보지?
"그나마 희망이 있는 쪽이 낫죠."
-큭큭, 그래. 최대한 좋은 쪽으로 생각해.
아무리 큰 건을 성사시킨다고 해도 절대 렉스테리아를 벗어날 수는 없을 것이다.
아마 늙어 죽을 때까지 도굴을 하지 않는다면 경찰에 붙잡혀 옥살이를 하다 인생 종칠 것이 분명했다.
밥 윌러스는 그래도 렉스테리아를 따르기로 했다.
-팩스번호를 불러봐. 우리가 겨냥하고 있는 목표를 너에게 던져 줄 테니.
"목표요?"
-사실은 3년 전부터 우리가 도굴에 좀 관심을 갖기 시작했거든.
"···3년 전부터?"
-아무튼 이제야 좀 괜찮은 선수가 나왔어. 제기랄, 지금까지 뽑았던 도굴꾼들은 죄다 꽝이었거든.
밥 윌러스는 렉스테리아가 채권을 매집하고 다닌다고 했을 때, 이들이 단순 금융업에 손을 댈 것이라고만 생각했었다.
허나 이제 보니 자신들의 범죄에 이득이 되는 쪽의 채권을 인수해서 세력을 확장하려는 것이었다.
실로 무서운 일이 아니던가.
그들이 마음만 먹는다면 손을 못 댈 곳이 없다는 뜻인데, 과연 그 마수가 어디까지 뻗어나갈지 알 숙다 없었다.
밥 윌러스는 자신이 한참이나 잘못 생각했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제기랄, 애초에 이놈들에게 부채를 상환하고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 큰 오산이었다.'
그는 이제 입장을 바꾸고 마음을 고쳐먹기로 했다.
어차피 코는 꿰였고 도망치려 하면 할수록 자신만 괴롭다고 판단하여 아예 렉스테리아의 조직에 깊이 파고 들어가기로 마음먹은 것이었다.
그 조직에서 성공하자면 그 조직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고 했다.
밥 윌러스는 렉스테리아가 혹할 만한 아이템을 제시했다.
"이렇게 된 바에 차라리 목표를 제가 정하면 안 되겠습니까?"
-목표를 바꾸겠다고?
"도굴이라는 건 어차피 도둑질입니다. 그럴 바엔 조금 더 큰 목표를 잡는 것이 낫죠."
-호오···?
그는 대단히 큰 결심을 하기에 이르렀다.
***
안기부 조사실 안.
무거운 표정의 김삼영이 안기부 기획실장 이준구와 마주앉아 있었다.
이준구는 김삼영에게 외부로부터 들여온 CD에 대한 추궁을 계속하고 있었다.
"김삼영 씨, 정말 국제사범들이 돌려쓰던 CD라는 걸 몰랐습니까?"
"···우리는 그저 비자금이 필요해서 브로커에게 부탁해서 가지고 왔을 뿐일세. 자네, 나를 정말 그렇게도 모르나?"
기획실장 이준구는 김삼영 정권 시절, 안기부 기획실 제 1 작전과장으로 재직했던 사람이다.
정권이 교체되기 전에도 그는 안기부에 있었으며 대통령령으로 꽤 많은 일을 해주었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이준구가 김삼영에게 정을 가질 이유는 전혀 없었다.
대통령은 어디까지나 스쳐지나가는 철새에 불과하고 안기부는 정권이 교체되어도 존속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준구는 자신을 좀 알아달라는 김삼영의 말을 무시해버렸다.
"그 브로커의 이름이 뭐죠?"
"자네 정말 이럴 건가? 내가 지금까지 해 준 게 얼마인데···."
콰앙!
이준구의 주먹이 철제책상을 두들겨 패는 바람에 책상 중앙에 선명한 주먹자국이 남아버렸다.
"묻는 말에 대답이나 잘 하시죠."
"허, 참."
"브로커의 이름이 뭐죠?"
"그건 나도 잘 몰라. 안기부에서 다 알아서 해줬잖나."
"···왜 그 책임을 안기부로 돌립니까?"
"현직 대통령이 대놓고 브로커를 알아봤다는 것이 말이 되나? 입장 바꿔서 자네 같으면 대통령 명함 돌리면서 비자금 조성했을 것 같아?"
김삼영은 안기부에 소환되었던 그 시점부터 계속해서 안기부를 걸고넘어지고 있었다.
그와 안기부의 팽팽한 기 싸움은 벌써 이틀 째 계속되는 중이었다.
그걸 멀리서 지켜보는 이들이 있었다.
그는 고개를 푹 숙였다.
"···그래, 내가 어떻게 해주었으면 좋겠나?"
"각하께서는 당신을 최대한 배려하라고 말씀하셨고 총리께서는 깔끔한 처리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니 저희들이 어떻게 나올 지는 잘 아시겠지요?"
안기부요원들이 김준익을 스윽 쳐다보았다.
그러자, 김준익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아, 아버지, 감옥은 싫어요!"
"···제기랄, 꼭 이래야겠나?"
"달리 방법이 없습니다."
"차라리 나를 보내면 되잖나."
"그건 각하께서 원하시는 방식이 아닙니다."
"크윽!"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바로 그때, CIA와 MI5가 조사실로 들어왔다.
"다만, 변수가 하나 있다면 우리들이겠지요?"
"···무슨 말입니까?"
"아까도 분명 전해 들으셨을 겁니다. 렉스테리아에 대해서 말이죠."
"물론입니다."
"두 사람이 미끼가 되어주셨으면 좋겠는데요."
"뭐요···?"
"일만 잘 풀린다면 미국으로 망명을 시켜드릴 수도 있습니다."
"만약 잘못 된다면?"
"그거야 알아서 생각하시고."
다른 방법이 없었다.
김삼영은 아들을 위해 눈을 질끈 감았다.
< 50.(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