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0. >
50.
미국 오리건 주의 한적한 시골마을.
어지간한 사람은 이곳의 지명도 잘 모를 정도로 외지라서 사방에 적막만이 맴돌고 있을 뿐이었다.
레이 윌러스는 손발이 꽁꽁 묶인 채 농막 안에 갇혀 있었다.
"살려주세요! 거기 누구 없어요?!"
그는 이곳에 온 지 벌써 이틀 째였다.
간혹 칼을 든 사람이 왔다 갔다 하는 것 말고는 이렇다 할 움직임조차 없었다.
대략 두 시간 간격으로 식칼을 든 남자가 웃는 얼굴로 그를 찾아왔다.
식칼을 든 남자는 광기에 가득 찬 눈동자를 치켜뜬 채로 웃었다. 그리곤 레이 윌러스의 앞에 사람의 것으로 보이는 신체 일부를 던져두곤 유유히 사라지곤 했다.
온몸이 꽁꽁 묶인 채로 죽은 사람의 조각을 뜬 눈으로 지켜본다는 건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이었다.
허나 그보다 무서운 것은 공포감이었다.
나도 언젠가는 저런 몰골이 될 지도 모른다는 압박.
끼이이익.
어김없이 두 시간이 흘렀다.
이번에도 빙그레 미소를 지은 미치광이 살인마가 농막 안으로 들어왔다.
아마 이대로는 정신병에 걸릴 지도 몰랐다.
그는 소리쳤다.
"으흑흑! 살려주세요! 시간만 주신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돈을 갚을게요! 제발요!"
"큭큭큭···."
"살려만 주신다면 무슨 일이든 할게요! 정말이에요! 지금까지 모은 돈이 꽤 됩니다! 다 가지고 가세요!"
바지에 오줌을 하도 지려서 이제는 지려봤자 몇 방울 나오지도 않았다.
방광이 바짝 마를수록 레이 윌러스의 정신력도 서서히 고갈되어 가고 있었던 셈이다.
살인마는 그제야 입을 열었다.
"으흐흐, 난도질, 재밌다!"
어벙한 목소리, 덜떨어진 것 같은 말투.
차라리 유창한 영어를 내뱉었다면 나았을 텐데, 살인마는 다소 지능이 떨어지는 사람 같았다.
그래서 오히려 훨씬 더 공포감이 극대화 되었다.
"크으으윽!"
레이 윌러스가 바지에 또르르 오줌을 지렸다.
그러자, 어눌한 살인마 뒤로 한 남자가 스윽 다가왔다.
"이제야 좀 정신이 들었나?"
"누, 누구세요?! 살려주세요!"
"살고 싶어?"
"무, 물론이죠! 살려만 주신다면 무슨 일이든 다 하겠습니다!"
"그렇게 목숨이 아까운 놈이 남의 집안 얼굴에 똥칠을 하고 다녔나? 너희들 눈에는 최가 상단이 동네북으로 보였나보지?"
레이 윌러스는 아까부터 빚을 못 갚아서 이곳까지 끌려왔다고 생각했었다.
허나 그건 크나큰 착각에 불과했다.
"저, 저희들은 그저 살기 위해서···."
"누구나 살기 위해서 그랬다고 변명하곤 하지."
"아닙니다! 저희는 렉스테리아에게 빚을 지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사기를 쳤단 말이에요! 믿어주세요!"
"···렉스테리아?"
금발 남자의 눈빛이 순간 반짝거렸다.
허나 그는 계속해서 포커페이스를 유지했다.
"살기 위함이었다면 차라리 경찰에 자수를 하고 신변보호를 받았어야지. 너희들은 그저 돈에 눈이 멀어버린 미치광이들일 뿐이다."
남자는 획 돌아서버렸다.
"미치광이에겐 미치광이가 잘 어울려."
"저, 저기요···?"
"참고로 저놈은 지능이 한참 떨어져. 다만 몸 쓰는 건 잘해서 사람을 도축하는 법을 배웠지. 보통은 마취라도 해놓거나 사람을 죽여 놓고 오체분시를 하는데 이놈은 달라···."
미치광이가 웃었다.
"으헤헤헤헤!"
"···산 채로 사지를 절단해버리지!"
순간, 레이 윌러스의 눈동자가 미친 듯이 흔들렸다.
사내의 말과 미치광이의 눈동자가 너무나도 완벽한 앙상블을 자아냈기 때문이었다.
"으, 으흑흑! 살려주세요! 제발요! 최소한 고통스럽게 죽이지만 말아주세요!"
"우헤헤헤, 고기다!"
"히이익! 제발 좀 살려주세요!"
금발의 사내는 그제야 다시 돌아섰다.
그리고선 즉석사진기를 들이댔다.
찰칵!
즉석사진기에서 직각의 사진이 출력되었다.
생생한 공포, 그것이 사진에는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금발의 사내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진심으로 뉘우치고 있나?"
"흑흑! 물론입니다! 아주 가슴 깊이 뉘우치고 있습니다!"
"좋아, 그렇다면 기회를 주도록 하겠어."
"···저, 정말이십니까?!"
"속고만 살았나. 지금 나를 의심하는 건가?"
어찌나 고개를 좌우로 세게 흔들었으면 레이 윌러스의 목이 어깨에서 떨어질 것 같았다.
"그럴 리가요!"
그의 즉각적인 부정에 금발의 사내는 만족하는 표정이었다.
"당연히 그래야지."
"살려만 주신다면···!"
"정말 내가 시키는 일은 뭐든 다 할 건가?"
"물론입니다!"
"좋아, 한 번 두고 보겠어. 하지만 지은 죄가 있으니 거기서 하루 더 있으라고."
"네···?!"
"싫어?"
"아, 아닙니다!"
금발의 남자는 미치광이 살인마를 데리고 농막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대략 10분쯤 걸었을 무렵.
금발의 남자가 돌연 폭소하기 시작했다.
"크하하하!"
"···제기랄, 이놈의 덜떨어진 연기도 이젠 못해먹겠군. 다른 레퍼토리는 없어?"
"원래 연기라는 게 하면 할수록 는다잖아. 큭큭큭! 그나저나 대단해! 자네 정말 이제는 이골이 나 버린 모양이지?"
"웃겨? 누군 아주 색소 냄새랑 썩은 고기 냄새 때문에 미쳐버릴 지경이라고."
미라클 라이트의 회장 휴 머피는 자신의 친구이자 동료, 사촌인 잭 머피의 어깨를 다독이며 말했다.
"아마 이번이 마지막이 되지 않겠나?"
"그래, 은퇴하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면 다시는 이따위 덜떨어진 살인마 연기는 하지 않았을 거야."
"그나저나 요즘 특수효과는 정말 대단하군."
"그래, 덕분에 사람 죽일 필요가 없어졌지."
잭 머피는 얼굴에 묻은 빨간 색소를 닦아내며 말했다.
"난 정말 할 만큼 했어. 자네도 분명 빈틈없이 일을 처리해두었겠지?"
"물론, 자네 나를 못 믿나?"
"못 믿었으면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겠지."
"하긴. 그랬으면
'으흐흐, 난도질, 재밌다!'
라고 말하지는 못했겠지."
잭 머피는 자신을 놀리는 사촌의 엉덩이를 발로 차 버렸다.
퍼억!
"으흐흐, 난도질, 재밌다!"
"···진짜 난도질을 해주마!"
장난기 넘치는 그들, 두 사람은 세월이 지나도 여전히 어린 시절 그 모습 그대로였다.
***
첼시왕립병원 안.
중환자실 한 복판에 허무한 표정으로 앉아있는 소년이 보인다.
그런 소년을 지켜보는 사람이 있었다.
닉스 굿맨, ALD환우인 루카스 굿맨의 아버지였다.
그는 씁쓸한 표정으로 아들을 바라보았다.
"···빌어먹을 새끼들아. 정말 사람 목숨가지고 이렇게까지 해야겠냐?"
"거래는 거래일뿐. 우리도 이러고 싶어서 이러는 건 아니야. 우리도 사람이라고."
"그게 인두겁을 뒤집어쓰고 할 얘기인가?"
닉스 굿맨이 으르렁거리자, 마리아나 로즐리는 잔뜩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그럼 당신은? 그렇게 떳떳한가?"
"···제기랄."
"범죄자를 무조건 혐오하는 스타일은 아니지만 렉스테리아는 그 정도가 좀 심하지 않나?"
사실, 사람 목숨을 담보로 돈을 벌었던 닉스 굿맨이 인두겁을 운운하는 건 무리가 있기는 했다.
그는 더 이상 그 얘기는 하고 싶지가 않았다.
"뭐, 아무튼 간에 내가 렉스테리아의 수뇌부만 잡아서 데리고 온다면 내 아들은 살 수 있다는 거지?"
"물론. 바로 당신 옆에 골수를 이식해 줄 사람이 있잖아. 아까 검사결과 봤지?"
골수가 정확하게 일치하지 않는다면 안 그래도 낮은 성공확률은 거의 0% 가까이 내려갈 것이다.
그런 위험을 없애준 마리아나가 있기에 닉스 굿맨은 조직을 등지기로 결심한 것이었다.
"약속은 지킬 것이라고 믿는다. 만약 내가 임무를 완수했는데도 딴 소리를 지껄였다간···."
"그럴 일은 절대로 없을 거야. 내가 장담하지."
전쟁 트라우마를 극복하지 못하고 결국 타락의 길을 걸었던 닉스 굿맨을 수렁에서 건져 준 사람이 바로 아들이었다.
만약 그에게 루카스가 없었다면 지금쯤 폐인이 되었거나 극단적인 선택을 했을 지도 모른다.
이제 아들은 그에게 세상 전부나 마찬가지였다.
"좋아, 그럼 나도 목숨 한 번 걸어보도록 하지."
"각오가 좋군. 하지만 정말로 목숨을 잃으면 곤란해. 알지?"
"내가 그런 바보로 보이나?"
닉스 굿맨은 중간보스 중에서도 중추세력이 가장 가까운 사람이다.
그는 조직의 정기모임이 언제 열리는지 알고 있었고 거기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명단도 이미 가지고 있었다.
허나 모임장소는 수뇌부들만 알고 있기 때문에 일망타진의 정보를 MI5에게 넘겨줄 수는 없었다.
때문에 MI5는 그에게 수뇌부 중 한 명을 납치하라고 주문한 것이었다.
상당히 어려운 주문이었다.
허나 적어도 수뇌부 중 몇 명에 대한 신상명세는 충분히 파악이 가능했고 그들을 납치하는 청사진을 짜기도 좋았다.
어렵지만 목숨을 건다면 성공할 수도 있다는 소리였다.
50 대 50의 상황, 그러나 MI5는 그가 성공할 확률이 높다고 봤다.
이 세상에 부정을 이길 수 있는 건 없기 때문이었다.
마리아나 로즐리도 그걸 잘 알기에 그를 이용하는 것이었으나 사실상 마음이 썩 좋지는 않았다.
어쨌거나 MI5도 사람이 굴리는 집단이고 그녀 역시 감정을 가진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돌아서는 닉스 굿맨에게 말했다.
"약속은 반드시 지킨다."
"당연한 소리를."
이윽고 그녀는 곧바로 천우와 접촉했다.
천우는 리지드 오일을 수렁에서 건져내기 위해 4천만 파운드를 출자했고 그 돈은 계열사 지분 매입으로 이어져 도산이 예정되어 있던 계열사 두 개가 살아남았다.
이로서 일단 CDS사태의 1차 방어는 성공한 셈이었고 이제는 본사의 지분을 털고 튀려는 작전세력만 일망타진하면 사태는 일단락 될 것이었다.
두 사람은 노팅힐의 영화관에 나란히 앉았다.
"됐어요. 이제 곧 닉스 굿맨이 대어를 낚아 올 겁니다."
"그럼 저는 이만 여기서 빠져도 되는 건가요?"
"원하신다면. 하지만 듣자하니 윌러스 탐사 팀도 렉스테리아와 엮여 있는 것 같던데, 이참에 손을 잡는 것이 어때요?"
천우는 최대한 MI5와는 접촉하지 않는 선에서 사태를 정리하려 했었다.
허나 렉스테리아가 하도 여기저기 똥을 싸놓고 다니는 바람에 그걸 밟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마리아나 로즐리는 웃으며 말했다.
"안 그래도 CIA에게 공문을 보낼 예정입니다. 이렇게 하면 당신의 입장도 난처하지 않을 테니 일단 손은 잡아주시는 게 어떨까요?"
"으음."
지금까지 슈퍼보이는 미국의 히든카드처럼 여겨져 왔었다.
허나 만약 MI5가 천우와의 협조를 공식화 한다면 CIA의 기분이 아주 묘해 질 것이다.
'내가 MI5에 한 다리 걸쳤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은 건가.'
이렇게까지 해서 천우를 데리고 가려는 그녀의 목적은 과연 무엇일까.
그건 아주 간단했다.
정보기관이 모집한 정보를 분석할 수 있는 세계 최고의 두뇌를 얻고 싶은 것.
MI5는 적어도 천우의 두뇌를 CIA와 공유하는 선에서라도 자유롭게 사용하고 싶었던 것이다.
"저번에 리지드 오일을 인수해도 CIA가 걸려서 못 움직이겠다고 했었죠? 그렇다면 우리가 그 물꼬를 터 줄게요."
"나를 두고 CIA와 경쟁이라도 하겠다는 겁니까?"
"할 수 있다면 해야죠. 아마 CIA도 이번에는 찔끔 할 겁니다. 그동안 당신을 너무 무급으로 부려먹었잖아요? 하지만 우리가 당신에게 리지드 오일을 떡하니 안겨준다면 CIA에서도
뭔가 큰 걸 하나 줘야 할 겁니다."
과유불급, 욕심이 크면 화를 당한다는 걸 천우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최대한 조심스럽게 행동했으나 MI5는 그걸 일방적인 이용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이미 저도 예전에 큰 이득을 챙겼습니다만?"
"아아, 곡물 시장에서 한 건 챙긴 거요? 그거랑 유전이랑 같아요?"
"뭐, 그거야···."
"그리고 한 번 잘 생각해봐요. CIA를 정말 100% 믿을 수 있어요? 당신도 보험 하나는 있어야죠."
"그렇다고 당신들은 100% 신뢰할 수 있습니까?"
"그래서 CIA가 있는 거잖아요."
"양쪽에서 줄타기를 잘 해봐라?"
무작정 신뢰하긴 어려워도 그녀의 말에 일리는 있었다.
< 50.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