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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가 상단의 교역루트를 연구하던 천우는 뜻밖의 사실을 알아냈다.
조선 후기 영조 재위기인 1727년 정미환국 이후, 최가 상단은 영국으로 거처를 옮긴 적이 있다고 나와 있었다.
1727년의 정미환국으로 급진주의 소론세력은 정치적 위협을 느끼게 되는데, 그 다음 해에 3월 15일에 상여에서 무기를 선적해서 난을 일으키게 된다.
이것이 바로 '이인좌의 난'이다.
최가 상단은 숙종 시절에 빈번했던 환국으로 인해 세력이 약해져 있었지만 다시 남인과의 줄이 연결되면서 기반을 다질 수 있었다.
허나 문제는 남인의 몰락으로 다시 세력이 흩어졌고, 소수 남인들의 소개로 소론과 손을 잡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괴산 송면의 소론 인사에게 정부의 병참을 보충해야 하니 무기를 조달해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당장 유럽과의 군상들과는 거래를 하지 않았던 터라 최가 상단은 청나라 등지에서 물건을 들여다가 외상으로 건네주었다.
얼마 후, 충청병사 이봉상이 살해당하고 청주 성이 점령당하는 엄청난 일이 벌어졌다.
최가 상단의 대행수 최인억이 외상으로 무기를 주었던 괴산 출신의 소론 인사가 바로 이현좌, 이인좌였던 것이다.
만약 거병이 성공적으로 이뤄져 밀풍군이 왕좌에 올랐다면 최가 상단은 전무후무한 권력을 키울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
허나 이인좌는 도순무사 오명항이 이끄는 관군과 안성에서 붙었다가 대패하여 도주하고 말았다.
뜻하지는 않았지만 잘못하면 최가 상단이 역적으로 몰릴 수고 있는 일이었다.
해서 최가 상단은 재물을 인도와 아랍 등지로 옮겼고, 일부는 영국으로 옮겨두었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최가 상단이 지금까지 꾸준히 해외교역에 나선 덕분이었다.
비록 조선과의 직접적인 무역을 영위할 수는 없었으나, 동남아시아와 영국을 이어주는 교두보 역할을 하면서 꾸준히 성장해왔던 것이다.
그렇게 세력을 불려왔건만, 정적 본국에서는 역적 신세가 될 판이었으니 최가 상단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한 셈이었다.
그들이 재물을 옮기고 추국에 대비하고 있을 무렵에 최인억이 관군에 체포되어 고문을 받았다.
최인억은 억울함을 호소하였지만 역적으로 몰려 참수되고 만다.
이후에 최인억의 억울함이 풀리긴 하지만 최가 상단은 이 과정에서 세력이 다소 약해지게 되었으며 근거지가 세 곳으로 찢어져 버렸다.
예전에 천우가 전해 들었던 영국계 신탁이라는 것은 아마도 이때 만들어진 기반이 내려져 온 것이 아닌가 싶었다.
천우는 이 영국계 세력이 가졌던 최가 상단의 재화가 과연 어느 정도인지 궁금해졌다.
그 궁금증을 해결해 줄 수 있는 기회가 왔다.
신탁회사 미라클 라이트에서 천우를 찾아온 것이었다.
미라클 라이트의 회장 휴 머피는 투자신탁회사로서는 드물게도 고객을 직접 찾아왔다.
그는 천우에게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도련님."
"네, 저도 영광입니다."
그나저나 천우를 도련님이라 부른다는 것은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
게다가 그는 한국어가 무척이나 유창했다.
혹시 한국과 깊은 관련이 있는 사람들일까.
휴 머피는 신탁에 대해 설명할 뿐, 그 부연설명은 굳이 하지 않았다.
"신탁은 한양 최 씨의 장손에게 증여됩니다. 이에 대한 조건이 몇 가지 있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전대 장손이 누구를 대외적으로 장손으로 알려두었냐는 것이었죠."
최충의는 사전에 천우를 대외적 장손으로 알려두었다.
심지어 그건 최충의의 비즈니스 파트너들도 잘 아는 사실이었다.
어째서 천우에게 경영권 승계가 이뤄지지 않았는지는 상당히 의문이었지만 그래도 한양 최 씨의 장손하면 천우가 거론되곤 했었다.
그건 종친들도 부정하지 않는 사실이었다.
휴 머피는 천우에게 신탁관련 서류를 건네주었다.
"그런 고로, 도련님께 신탁이 전달될 것입니다. 신탁은 저택 세 채, 채권, 주식, 부동산 등으로 이뤄져 있습니다."
"으음, 그렇군요."
"허나 여기에는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정상적으로 한국의 국적을 유지하며 신탁을 받을 법적 성인으로 인정받아야 한다는 겁니다."
아마도 휴 머피는 천우가 한국의 국적을 포기하고 미국의 시민권을 받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건 걱정할 필요가 없는 문제였다.
"그 조건에는 부합이 되겠네요. 저는 한국의 국적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럴 생각도 없고요."
"네, 이미 전해 듣기는 했습니다. 한양 최 씨의 장손으로 살아가겠다고 공표하셨더군요."
휴 머피의 말에는 천우의 진심에 대한 약간의 의구심이 깃들어 있었다.
허나 휴 머피는 괜한 걱정을 했다는 듯 한 표정이었다.
"만나보니 과연 그것이 사실인 것 같네요."
"다행이네요."
"아무튼 한국의 국적을 쭉 이어나갈 수 있다는 검증이 끝나면 신탁은 곧바로 해제됩니다."
"병역 문제로군요."
"해결 방안은 많다고 생각됩니다. 충분히 면제를 알아볼 수 있도록 저희들이 도와드리는 방안도 있습니다."
천우는 슬그머니 미소를 지었다.
"됐습니다."
"입대를 하시려고요?"
"그러면 안 되는 건가요?"
"뭐, 그럴 건 없지요. 지금 군대에 간다고 HC를 건드리거나 할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요."
HC를 건드렸다간 미국에게 압살을 당하겠지만 아마 그 전에 슈팅스타에게 초전박살이 나버릴 것이다.
문제는 군대를 가서 생길 트러블이 아니라 천우의 각오였다.
허나 천우는 정말 별 것 아니라는 듯 한 입장이었다.
'한 번 더 간다고 죽나?'
전생에 한 번 다녀왔던 것인데 무서울 것이 있겠냐는 생각이었다.
결국 군대도 사람 사는 곳이니 별 문제가 없었던 것이다.
"그럼 입대일자가 정해지면 알려주십시오. 전역 일에 맞춰서 신탁을 해지해드리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아마 늦어도 내년 봄에는 들어갈 것 같은데요?"
"으음, 그리 알고 있겠습니다."
오늘 미라클 라이트에서 찾아온 것은 각종 인터뷰를 통해서 신탁을 해제할 수 있는 상황이 되는지 알아보려는 것이었고 그와 더불어 몇 가지 서류를 작성하기 위함이었다.
서류를 꾸미는 와중에 휴 머피가 천우에게 물었다.
"그나저나 미국 쪽에서 어떤 미친놈들이 최가 상단을 들먹이며 다니던데, 그에 대해서는 알아보셨습니까?"
"안 그래도 의문투성이라 고소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사기를 치고 있다고 확신하시는 모양이네요."
"모든 정황이 그렇게 돌아가고 있잖아요."
휴 머피는 웃으며 말했다.
"후후, 물론 그렇죠. 그들이 인양하겠다는 보물은 이미 우리 미라클 라이트가 회수해서 채권 및 펀드로 만들어서 신탁에 넣어두었거든요."
"네에···?!"
"미리 말씀드리지 못한 점은 송구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신탁에 나온 대로 행동했을 뿐이고 그에 대한 수수료 7.5%를 저희들이 챙겼습니다. 아마 신탁이 해지된다면 그 모든 내
용을 확인하실 수 있을 겁니다."
"발굴에 들어가는 비용은 어떻게 해결하셨는데요?"
"7.5% 안에 다 들어가 있지요. 덕분에 우리도 예상보다 많은 수익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발굴에 들어가는 비용은 정말 한두 푼이 아니다.
게다가 그곳은 바다 속이 아니었던가.
'도대체 금이 얼마나 가라앉아 있었으면 7.5%로 미라클 라이트 같은 회사가 아주 만족해하는 거지?'
그 양에 대해 묻고 싶었지만 휴 머피는 더 이상의 말은 아끼는 모습이었다.
"아무튼 간에 저놈들이 사기를 치는 건 확실하니까 보복을 하시겠다면 말씀만 하십시오. 안 그래도 저희들이 사전작업은 마무리 해두었습니다."
"보복을 도와주시게요?"
"저희들은 최가 상단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회사입니다. 신탁이 해제될 때까지는 클라이언트의 명예가 추락하는 일은 좌시할 수 없는 입장이죠."
다소 모호한 입장이긴 했지만 천우는 미라클 라이트를 한 번 믿어보기로 했다.
영국 내에서 미라클 라이트는 꽤나 전통이 깊은 투자신탁으로 통하기 때문에 그 회장이 거짓말을 할 리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야 도움을 조금 청해도 될까요?"
휴 머피는 웃으며 답했다.
"물론이지요. 다만, 한 가지만 감안해주셨으면 합니다."
"감안이요?"
"MI5와 연계해서 일을 처리할 생각인데, 괜찮으신가요?"
MI5에서는 천우에게 러브콜을 보냈었다.
그걸 거절했던 천우로선 MI5와의 공조에 약간 찝찝한 감이 있었다.
"남의 손 타는 건 조금 그런데요. 차라리 CIA라면 몰라도."
"아아, 그렇다면야. 저희들의 생각이 짧았습니다. 단독으로 처리하겠습니다."
"그래주시면 고맙죠."
"아무쪼록 믿어주신 만큼 확실히 조져서 끌고 오겠습니다."
항간에는 미라클 라이트가 마피아 뺨치는 사람들이라는 소리가 있었다.
과연 그 실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천우는 한 번 지켜보기로 했다.
***
렉스테리아의 아시아 시장 CD공작에 대한 아론 테이트의 수사망이 전 세계로 확대되었다.
일단 국장에게 보고하기 전에 그의 이목을 집중시킬 수 있는 몇 개의 아이템이 더 필요하다고 생각된 것이었다.
그는 이 과정에서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해냈다.
렉스테리아가 미국에서 빼돌린 자금을 아시아로 유입시킨 후, 그것을 다시 이탈리아로 돌려 채권을 매입한 정황이 드러난 것이었다.
아론 테이트는 놈들이 사용한 CD의 정보를 가지고 있었고 그것이 전환되어 자금이 흘러간 뒤를 추적하니 이탈리아계 채권에 도달했는데, 그 채권 중에는 요즘 금시장을 달구고 있
는 윌러스 탐사 펀드와 관련된 것들도 있었다.
CIA 기획실에서 얻은 자료에 의하면 윌러스 탐사 팀에서 넘어간 채권은 생각보다 광범위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우선 윌러스 탐사 팀과 운명을 함께하는 학자와 펀드, 투자신탁까지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엮여 있었다.
헌데 우연치 않게도 탐사에 참여한 사람들의 명단을 보면 채권에 엮인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CIA는 윌러스 컴퍼니의 재산현황을 은밀히 파악해보았는데, 그들의 적자행진은 꽤나 오래된 고질병과 같은 것이었다.
아론 테이트는 실소했다.
"재미있는 놈들이군. 청년재벌이었다는 건 순 거짓말이었잖아?"
그는 윌러스가 그동안 진행했었던 탐사에 대한 조사를 지시했다.
지시를 받은 요원들은 약간의 의문을 가졌다.
"렉스테리아를 잡는데 그들의 황금 쇼까지 필요할까요?"
"보통의 쇼였다면 그랬겠지. 하지만 그놈들은 렉스테리아에게 코가 꿰였잖아. 채권만기일이 도래하면서 쫓기듯 쇼를 벌였다면 적어도 지금의 쇼는 거짓일 확률이 높다는 소리지."
"으음."
"만약 그렇다면 저놈들을 낚싯바늘로 사용해 볼 수도 있지 않겠나?"
미끼는 많이 끼울수록 물고기를 잡을 확률이 올라간다.
아론 테이트는 최대한 많은 바늘을 꿰어놓고 기다리는 것, 그것이 사건해결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럼 어디 대물이 낚이기를 기다려볼까?"
그로부터 며칠 후.
아론 테이트는 윌러스 컴퍼니가 초대형 소송에 휘말리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바로 한양 최 씨 일가에서 직접 나선 것이었다.
그는 보고서를 받으며 슬그머니 웃었다.
"슈퍼보이가 놈들을 어떻게 요리할지 자못 궁금하군."
아론 테이트는 CIA의 개입을 최소화 하며 상황을 한 번 지켜보라고 지시해두었다.
< 49.(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