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9. >
49.
저녁 7시 30분.
천우는 이 시간만 되면 하루의 일과를 운동으로 마무리 하곤 한다.
저택 지하에는 바벨과 덤벨, 벤치프레스 등, 현 보디빌딩 전문가들이나 가지고 있을 법한 수준의 하이테크 장비들이 즐비했다.
그는 미국에서 보디빌더들의 맨투맨 레슨을 6개월 동안 틈틈이 받으면서 이론만으로 남아있던 지식들을 경험을 통해 재정립해두었다.
이제 그에게는 미래의 보디빌딩 지식과 인체해부학, 영양학, 생체병리학 등의 지식이 있으니 어지간한 전문가보다 훨씬 나을 것이었다.
원래는 이곳에서 홀로 외로운 사투를 벌일 테지만 최근에는 좀 달랐다.
전미라가 하루에 한 번씩 천우와 함께 운동하면서 구슬땀을 흘리고 있었던 것이다.
두 사람은 스트레칭과 마사지 등으로 몸을 풀고 있었다.
"그러니까, 누군가 최가 상단을 팔아먹으며 사기를 치고 있다는 거죠?"
"아무래도 그런 것 같아요. 금괴에 직인이 없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잖아요."
"그렇다면 FBI에게 신고를 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안 그래도 CIA에게 의뢰를 할 생각입니다. 윌러스인지 뭔지 하는 놈들이 얼마나 위험한 짓을 하고 있는지 일깨워줘야죠."
"흠, 그렇다면 그에 상응하는 증거들도 모아둬야겠네요. 제가 오늘부터 자료 수집을 도와드릴까요?"
"그래도 됩니까?"
"물론이죠!"
사실, 자료 수집을 한다는 건 핑계일 뿐이다.
자료 수집은 천우 혼자해도 하루면 충분하다.
나노머신에 있는 자료들을 바탕으로 혐의입증에 필요한 사료들만 뒤져서 증거들을 구축하면 끝이기 때문이었다.
그건 전미라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녀가 아무리 책에 대한 조예가 깊다고 해도 이런 일은 법무 팀이나 비서실에서 진행하는 것이 훨씬 간단하고 쉬울 것이다.
그들은 이 방면에 대해선 누구보다 뛰어난 전문가들이기 때문이었다.
허나 이걸 핑계로 둘이 더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으니 일부러 돕겠다고 나선 것이었다.
운동을 끝내고 샤워를 마치니 9시 20분쯤 되었다.
두 사람은 단백질로 이뤄진 간식들을 먹으면서 윌러스의 사기행각을 증명할 자료들에는 어떤 것이 있는지 정리해보았다.
전미라는 천우의 서재에 있는 길이 3미터의 화이트보드에 차례대로 필요자료들을 나열했다.
"우선은 당시에 최가 상단이 거래하고 있던 상단들이 어떤 국가 소속이었으며 그들이 어디서 금을 조달했는지 알아 봐야 해요. 그러기 위해선 상단일지가 필요하겠네요."
"우리 집 서고에 다 있습니다. 비록 조선 이전의 기록은 약간 부실하지만 그 이후의 기록은 상당히 많습니다. 후손들에게 더 많은 기록을 남기고 싶어 하셨던 선조가 계셨던 덕분이
죠."
"그렇다면 잘 되었네요. 그걸 한 번 자세히 살펴보자고요."
그녀는 상단일지와 항해일지, 그리고 채무를 어떻게 관리했는지 알 수 있는 상단금전출납부 등을 쭉 나열해보았다.
자료의 양은 생각보다 그리 많지는 않았지만 그걸 찾아내서 차트로 만드는 건 쉽지 않을 것 같았다.
허나 그녀는 벌써부터 약간 흥분한 듯, 들뜬 모습이었다.
"좋아! 이정도면 됐어요. 내일부터 당장 시작하자고요!"
"그래요. 도와줘서 고맙습니다."
"아니요, 일요일에 아침점심도 얻어먹는데다 헬스장도 공짜로 쓰잖아요. 도서대출도 해주시고. 이 정도는 당연한 일이라고요. 그리고 이제 우리는 가문은 한양 최 씨와 밀접한 관계
를 맺게 되었어요. 남의 일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아무튼 고맙습니다. 그럼 댁까지 바래다 드릴게요."
"안 그러셔도 되는데···."
"여자 혼자 밤길은 위험해요."
천우는 충식이의 자식들 중에서 덩치가 제일 큰 수컷 상문이를 데리고 나왔다.
상문이도 그다지 젊은 축에 속하지는 않지만 머리가 좋고 가정적이라 천우의 말을 아주 잘 따른다.
게다가 녀석은 전미라를 상당히 좋아했다.
상문이에게 하네스를 채우고 밖으로 나간 두 사람은 걸어서 5~10분쯤 걸리는 전미라의 집까지 가기로 했다.
그녀가 슬그머니 물었다.
"있잖아요, 천우 씨. 남자들은 보통 어떤 여자를 좋아해요?"
"보통이라. 글쎄요."
천우는 거의 반사적으로 자기의 머리에 있는 것들을 꺼내놓기 시작했다.
"우선은 예뻐야겠죠. 몸매도 볼 것이고."
"···그게 그렇게 중요한가요?"
"보통의 남자들이라면 그렇겠죠?"
"그럼 천우 씨는 어때요?"
"저도 사람인지라 확고한 미의 기준이 있기는 합니다."
"확고한 미의 기준?"
"단아하지만 고급스러운 아름다움이 있는 여자가 좋습니다."
"그래요?"
"뭐, 웃을 때 덧니가 살짝 보인다면 더 좋겠네요."
"꽤 구체적인데요?"
"그밖에 콧대가 높고 윗입술이 두툼해야하고 얼굴은 하얗고 눈빛은 깊어야하겠지요."
"그래요···?"
천우가 이상형을 꽤 구체적으로 서술하자, 전미라의 표정이 약간 어두워졌다.
그는 잘 걷다가 말고 전봇대 위에 있는 사고방지용 거울 앞에 멈추어 섰다.
"잘 봐요. 단아하지만 고급스러운 아름다움이 느껴지지 않나요?"
"으음···?"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얼굴이 하얗고 웃을 때 덧니가 살짝 보이네요. 그렇지 않나요?"
그제야 자기 얘기를 한다는 걸 깨닫곤 전미라가 천우의 팔뚝을 찰싹 때렸다.
따악!
"난 또···!"
"하하, 그럼 내가 누구 얘기를 하는 줄 알았는데요?"
"말이나 못하면 밉지나 않지."
"이상형을 뭐 그렇게 멀리서 찾습니까. 바로 옆에 있는데."
천우를 연신 곱게 째려보는 그녀.
어느 새 전미라의 얼굴에는 덧니가 살짝 보이는 환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천우는 그녀의 미소가 참으로 좋았다.
전미라는 웃으며 물었다.
"그럼 그 이상형이랑 물놀이나 갈래요?"
"물놀이요?"
"그리스 산토리니에 별장이 있어요. 당신도 언젠가 휴가를 좀 즐겨봐야 하지 않을까 싶어서요."
"으음, 그러고 보니."
지금까지 천우는 어려서부터 쭉 최고가 되기 위해서 달려오기만 했지 제대로 된 휴식은 가져 본 적이 없었다.
그는 슬그머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일단 저 빌어먹을 놈들부터 좀 쳐부순 다음에요."
"그건 저도 동감이에요. 뜨거운 맛을 보여줄 거죠?"
"아주 제대로요."
"기대하고 있을게요."
어느 새 두 사람은 전미라의 집 앞에 도착해 있었다.
10분이면 올 거리를 그렇게 미적거리며 걸었는데도 벌써 시간은 훌쩍 지나가 있었던 것이다.
두 사람은 쉽게 헤어지지 못하고 전미라의 집 앞을 서성거렸다.
"자판기 커피나 좀 마시고 갈래요?"
"좋죠."
혹자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럴 것이면 집에 그냥 있지 왜 나왔냐고 말이다.
누가 뭐라고 하던 간에 두 사람은 둘만의 시간을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만끽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벌써 11시 30분이 되어버렸다.
"이크, 너무 늦었네요. 그럼 갈게요."
"···네, 들어가세요. 전화할게요!"
이렇게 떠들고 수다를 떨었는데 또 전화를 한다니.
아마도 마샤의 호르몬 주파수가 너무 잘 맞는 모양이었다.
***
뉴욕의 한 커피숍 안.
이실리아 테론이 가지고 온 정보를 받은 아론 테이트는 그것을 테이블 위에 던져두었다.
그는 의외라는 듯, 미소와 미묘한 일그러짐이 공존하는 표정을 지었다.
"왜 하필이면 나지? 부국장도 있을 텐데."
"직급보다는 안전성을 택한 겁니다."
"내가 비교적 안전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단 말이야? 자네, 나를 잘 모르는 것 같은데."
"압니다. 델타포스 교관으로 지내셨다가 CIA로 유입되어 수많은 언더커버 임무를 완수한 베테랑 요원이시죠. CIA스파이 교범에는 실장님의 작전들을 토대로 만든 파트도 꽤 있는
것으로 압니다. 사상 최고의 요원으로 일컬어지고 있는 걸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안전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겠나?"
"위험한 인물이긴 하지만 허구원날 남의 뒤통수를 치는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CIA 내부에서 그런 무조건적인 믿음은 별로 좋지 않은데."
"만약 제 선택이 틀렸다면 어쩔 수 없지요."
아론 테이트는 미묘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는 이 정보 자체가 흥미로운 것이 아니라 그녀가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큰 그림을 그리고 있다는 것이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자네가 원하는 게 뭐야? 출세? 스타가 되고 싶나?"
"제가 이 정보를 취함으로서 가뜩이나 민감한 한국과의 관계 속에서 적당한 이득을 취하고 싶을 뿐입니다."
"적게 먹고 적게 싸겠다고 나를 찾아온 것이군."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지는 꼴보다는 훨씬 낫다고 판단했습니다."
이실리아 테론은 냉정한 스파이 기질이 있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중앙요직으로의 진출은 더 이상 힘들 것이라는 평이 지배적이었다.
허나 아론 테이트의 생각은 달랐다.
"후후, 기회주의자보다 처세를 잘 하는 사람도 없지."
"이 정보를 받아주시는 겁니까?"
"그럼 어째. 이미 나는 자네와 엮이지 않았는가."
"엮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별 걸 다 감사하는군."
"그나저나 이 정보를 취하셨으니 이젠 어쩌실 생각입니까?"
"어쩌긴, 재미 좀 봐야지."
"잘못하면 CIA의 입장이 곤란해 질 수도 있는데 재미를 볼 수 있을까요?"
"아마 CIA 내부에서는 덮자고 하겠지. 나토와 신유고연방의 대치, 아랍과 미군의 대치 등이 걸린 국면에 동아시아와 갈등을 일으켜 좋을 게 있겠어?"
"하지만 어떻게 재미를 보겠단 말입니까?"
"정보 자체를 가지고 이득을 취할 수는 없어. 차라리 그럴 바엔 안기부와 연계해서 낚시를 하는 편이 낫지."
"설마···. 한국의 전 대통령을 이용해서 렉스테리아를 잡겠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녀는 깜짝 놀랐지만 아론 테이트는 정말 별 것 아니라는 듯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어차피 버려질 카드야. 정권교체가 이뤄지면 정치보복이 없을 것 같은가?"
"그래도 전 대통령이 운동권 인사 아닙니까."
"그렇긴 하지만 문제는 쿠데타 세력과 합작해서 거대여당을 만든 전력이 있다는 것이겠지."
"으음!"
"상황이 바뀌었단 말이지. 이제는 자기 식구도 아닌데 살려둘 이유가 없지 않겠어?"
아론 테이트는 정치보복은 어떤 정권이든 일어나게 되어 있다고 역설했다.
그걸 들은 이실리아 테론은 과연 그가 어떤 청사진을 세웠는지 대충 감이 잡혔다.
"그렇다면 저는 뭘 하면 될까요."
"자네의 보스처럼 원칙주의자들에게 들키지 않고 국장에게 이 사실을 알리는 것."
"···그게 가능할까요?"
"불가능하다면 내가 자리를 만들어주겠네."
"그럴 바엔 차라리 실장님께서 직접 전달해주시면 되잖습니까."
아론 테이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쯧, 자네는 순진한 건가, 너무 원칙주의에 찌들어서 그리 된 건가? 내가 자료를 건네주면 자네는 그냥 손가락이나 빨아야해. 잊었나? 그나마 자네의 보스가 공을 가지고 가야 자네
가 이득을 볼 텐데, 이건 기획실만 노 나는 거라고."
"아아!"
"승진을 하고 싶다면 하나만 명심해. 줄을 잘 잡는 것도 중요하지만 보스를 밀어낼 때를 잘 알아야한다는 걸 말이야."
< 49.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