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8. >
48.
MI6은 드디어 렉스테리아의 정체를 밝힐 수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그 생각에는 중간보스 닉스 굿맨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닉스 굿맨, 이탈리아계 미국인입니다. 혹시 87년도 블루마운틴 호텔 피랍사건을 기억하십니까?"
"미국 캘리포니아 블루마운틴 호텔에서 이탈리아 대사가 피랍된 사건 말입니까?"
"네, 그렇습니다. 그 당시에는 플라자합의로 인해 사업이 망한 청년이 벌인 사건으로 알려져 있었습니다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닉스 굿맨은 이탈리아 대사를 피랍해서 실랑이를 벌이다가 FBI저격수가 쏜 탄환에 맞고 경찰에 연행되어 연방감옥에 수감되었었다.
허나 그 이후에 교도소를 탈출해 사라진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버나드 체이슨은 천우의 앞에 빛바랜 사진 한 장을 올려놓았다.
사진 속에는 저격 총을 든 닉스 굿맨의 모습이 보였다.
"알아보니 닉스 굿맨은 미 해병대 저격수 출신으로 상사로 제대했다고 합니다. 당시에는 CIA의 러브콜을 받을 정도로 엄청난 실력자로 명성이 자자했다고 하더군요."
"해병대 출신의 저격수가 저격수의 총알에 맞아 감옥에 갔다···?"
"아이러니 하죠?"
"그런데 이 사람이 어째서 마피아가 된 거죠?"
"몰타회담이 있기 전, 닉스 굿맨은 러시아와의 냉전 중 모종의 작전에 투입되어 부하들을 모두 잃고 정신병원에 들어갔다고 합니다."
"···정신병원이요?"
"부하들을 잃은 충격이 너무 컸던 거죠. 그 이후로 닉스 굿맨은 자취를 감추었다가 87년도에 갑자기 사업가출신 테러리스트로 변신해서 돌아온 겁니다."
"흐음, 해병대 출신에 오래도록 종적을 감추었던 사람이 테러를···?"
"누구에게나 사정은 있습니다만, 확실한 건 그가 종적을 감춘 이후부터 세계 각국을 돌면서 살인청부를 했다는 점입니다."
"살인청부요?"
버나드 체이슨은 천우에게 또 다른 한 장의 사진을 보여주었다.
사진 속에는 길리슈트를 입은 남자가 아주 흐릿하게 찍혀 있었다.
"이게 닉스 굿맨의 사진이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이목구비도 제대로 나와 있지 않은데요."
"그렇죠. 84년도 레바논 내전 당시, 베이루트에서 찍힌 사진이니까요. 하지만 여길 잘 보십시오."
그는 닉스 굿맨의 소총에 빨간색 볼펜으로 동그라미를 쳤다.
상당히 긴 총신의 저격이 보였고 그 총의 생김새가 상당히 특이했다.
-1981년, 미국에서 만들어진 대물저격총 M79소총입니다. 사실상 실패작이라고 거론되며 전 세계에 딱 두 정만 만들어져서 실전에 배치된 적이 있습니다. 활동연대는 80년대 초~
중반으로 추측됩니다.
'오호, 특이한 저격 총이라 이 말이네?'
마샤의 설명이 끝나자마자 버나드 체이슨이 말했다.
"M79저격 총, 미국 콘지니아 사에서 만들어낸 당시 최장거리 대인용 저격 총입니다. 유효사거리가 2,100미터나 되죠. 내구성도 좋고 저격 총 치고는 구조도 상당히 단순했습니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사수에 따라서 집탄율이 너무 많이 변동되어서 실전적용에는 적합하지 않다고 평가되었죠. 다만, 이 총을 실전에서 다룬 사람이 딱 한 명 있었습니다."
"그가 바로 닉스 굿맨이군요."
"그는 '장인은 장비 탓을 하지 않는다'라는 격언을 아주 잘 보여준 예라고 회자되곤 했다죠."
"그렇다면 저 총은···."
"이 세상에서 딱 한 사람, 닉스 굿맨만이 다룰 수 있으니 총이 신원을 확인 해 준 셈이라고나 할까요?"
닉스 굿맨이 전역 이후, 세계를 돌면서 히트맨 생활을 했다는 것은 총의 종류로서 증명이 된 셈이었다.
허나 그런데 저 사람이 렉스테리아를 잡는 열쇠라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천우는 그런 궁금증을 품고 있었다.
그 속마음에 대한 해답은 마리아나 로즐리가 주었다.
"닉스 굿맨은 아들이 있습니다. 이름이 앤드류 굿맨으로 되어 있는데, 앤드류 굿맨은 현재 부신백질이영양증을 앓고 있답니다."
"ALD말입니까?"
천우는 경험에 의지하지 않는 지식 정도야 옆구리를 툭 치면 바로 나올 정도의 데이터베이스를 가지고 있다.
ALD는 뇌의 백질이 차츰 파괴되어 가는 희귀병으로서 주로 10세 이하의 남자아이에게 발병한다.
증상으로는 신경과민, 발작, 경련, 청력상실 등이며 사지마비에 혼수상태까지 이어져 끝내는 숨지고 마는 안타까운 유전병이다.
치료법으로는 골수이식이 거의 유일하지만 10~20%의 확률로 사망한다는 엄청난 단점을 가지고 있기에 사실상 치료법이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바로 이 병을 아들이 앓고 있었고, 닉스 굿맨은 아들을 살리기 위해서 별에 별 짓을 다해봤을 겁니다. 우리는 그가 정신병원에 들어간 이후, 아들이 병에 걸린 것을 알았고 닉스 굿
맨은 치료방법을 찾다가 렉스테리아와 엮인 것 같다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렉스테리아가 아들의 치료를 빌미로 그의 코를 꿰었다는 말이 되겠군요?"
"네, 맞아요. 하지만 이제 그 코를 우리가 역으로 꿸 수 있게 되었죠."
"어떻게 말입니까?"
"제가 아이를 살릴 수 있습니다."
"무슨 근거로요?"
"우리가 닉스 굿맨의 아들과 100% 일치하는 도너를 찾아냈거든요."
"허어, 그게 사실입니까? 그 사람은 지금 어디에 있는데요?"
그녀는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바로 저요."
"당신이 그 도너라고요? 그렇다면 당장 골수를 주면 되잖습니까."
"뭐, 그렇긴 하지만."
"설마···."
"우리도 남는 게 있어야 하잖아요?"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아이의 목숨이 경각에 달렸는데?!"
"저 사람이 우리에게 투항한다면 기꺼이 도너가 되어 줄 의향이 있습니다."
영국의 정보기관들은 렉스테리아를 찾아내 없애는데 아주 혈안이 되어 있는 모양이었다.
천우가 생각하기에는 단순히 CDS 때문에 한 방 먹어서 이러는 건 아닌 것 같았다.
역시 그의 생각과 같았다.
"다만, 그렇게 된다면 몇 가지 문제가 좀 있습니다. 렉스테리아가 영국계 석유회사 순위 3위인 '리지드 오일'의 지분을 상당수 가지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는데, 이들 계열사들이 렉
스테리아와 합작으로 문어발식 계열사 확장을 시도했습니다. 석유 값이 내려간 바로 이 타이밍을 노리고 말이죠."
"석유 값이 내려간 타이밍을 노린 확장이라···. 렉스테리아답네요."
"헌데 문제는 이 계열사들이 도미노로 무너진다면 가뜩이나 유가역류로 인해 경영부진을 겪고 있던 석유회사가 큰 타격을 입을 지도 모른다는 것이죠. 그리고 이 회사들에 대한 CDS
가 꽤 많이 풀려 있습니다."
"허어, 설마···."
"만약 저쪽에서 우리가 닉스 굿맨을 빼돌려 정보를 캐려는 걸 알기라도 하게 되는 날엔 곧바로 석유회사가 부도를 맞게 될 겁니다. 그럼 CDS의 배상금이 상상 그 이상으로 터지게
되겠죠."
도대체 렉스테리아라는 마피아가 가진 저력은 어디까지란 말인가.
이들이 대단한 것은 마피아치곤 자금력이 대단하기도 하지만 그 방법들이 아주 비상하고 치밀하다는 점이었다.
'단순한 마피아가 아니다. 이놈들, 우리가 모르는 뭔가가 있어. 분명하다···!'
이제는 마피아 치고 대단하다고 생각할 정도의 규모가 아닌 것이 밝혀 진 셈이었다.
천우는 이제 그들을 마피아가 아니라 하나의 투기세력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얘기를 들어보니 나에게 석유회사 부도를 막아달라는 것 같은데, 맞습니까?"
"네, 맞습니다. 아예 인수를 해주신다면 더 좋겠고요."
"렉스테리아의 자금이 엮인 회사를 제가 인수하는 건 좀 껄끄러운 일인데요."
"압니다. 뭔가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건 저희들도 익히 잘 알고 있었던 일입니다."
그들은 대단히 파격적인 제안을 해왔다.
영국이 제안한 조건은 리지드 오일을 HC에게 1/3가격으로 양도한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부가적으로 따라오는 옵션들도 꽤 많았다.
"아시겠지만 영국의 북부에도 유전이 있습니다. 그밖에 북유럽의 유전들에 대한 지분이 상당한데, 그걸 리지드 오일에 끼워서 팔아드리겠습니다."
"그렇게 해서 영국이 남는 건 뭡니까?"
"렉스테리아라는 위험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다는 이점 정도가 되겠죠. 하지만 그들을 우리가 직접 감아 칠 수 있다면 그에 대한 이득도 상당할 것이라고 생각됩니다만."
설마하니 렉스테리아의 재산을 영국령으로 몰수하겠다는 생각인 것일까.
만약 그런 무식한 생각을 진심으로 가지고 있다면 영국은 그야말로 '깡패'라고 천우는 생각했다.
게다가 이 일을 CIA가 모르게 진행한다면 천우와 미국의 관계는 상당히 복잡해 질 것이다.
다만, 천우가 저들을 도와준다면 실로 엄청난 이득을 취하게 되는 셈이었다.
"어떻게 하실래요?"
"흐음."
유전이냐, CIA이냐.
천우의 고민이 깊어져만 갔다.
***
CIA정보본부 부본부장 이실리아 테론은 뜻밖의 정보를 전해 들었다.
"렉스테리아가 미국에서 빼돌린 자금을 아시아로 퍼 날랐다고?"
"남은 비자금을 탈탈 털어서 홍콩과 싱가포르로 빼돌렸는데, 그걸 한국으로 돌려 세탁하는 조건으로 CD를 만들어서 주었답니다."
"설마···."
"전 대통령 라인으로 들어간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다들 그저 지례짐작 하고 있었을 뿐이지, 설마하니 그게 실제로 일어났다는 증거가 있을 줄은 아무도 몰랐다.
헌데 우연치 않게도 부본부장의 직속라인인 금융정보과에서 그걸 잡아낸 것이었다.
금융정보과에서 가지고 온 것은 CD의 흐름과 그 수령인, 그리고 자금의 출처 등이 상세히 나와 있었다.
미국에서 돈을 가지고 넘어간 쪽은 렉스테리아의 유령회사가 분명해보였다.
그녀는 입술이 바짝바짝 타는지, 연신 물을 들이켰다.
꿀꺽, 꿀꺽!
껄끄럽고도 민감하지만 그렇다고 그냥 버리기엔 아까운 정보였다.
"빌어먹을. 청와대도 이에 대해 알고 있나?"
"CD를 만들어 돌린 건 알고 있습니다만, 그게 렉스테리아와 연관되어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하는 것 같습니다."
아직도 CIA는 렉스테리아를 뒤쫓고 있었고 최근에 꼬리를 잡았는데, 그게 하필이면 한국의 정치비자금과 엮여 있었다.
이실리아 테론은 난감한 표정이 되어버렸다.
"빌어먹을, 벌써부터 대선 걱정하느라 백악관도 바쁠 텐데 우방국의 비자금을 건드려도 될지 모르겠군."
"하지만 지금의 청와대 정권과는 거리가 꽤 먼 사건 아닙니까? 사실, 정치보복을 계획하고 있다고 가정한다면 이보다 더 좋은 소스가 또 있을까요?"
"그건 그렇긴 하지."
그녀는 이걸 언제 어떻게 터뜨려야 할지 감을 잡지 못했다.
"본부장님도 아시나?"
"부본부장님이 최초로 들으신 겁니다."
리암 로들랜드는 성격이 상당히 급한 사람이다.
이걸 듣는 그 즉시 백악관이고 청와대로 사방팔방에 다 떠벌일 것이 분명했다.
그는 어떻게 해서든 자신이 부국장을 밟고 올라가 차기국장이 되는 것이 꿈이었기 때문이다.
야망과 급한 성미, 리람 로들랜드는 분명 사고를 칠 것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일단 함구해."
"본부장님께 함구했다가 잘못되면···."
"나를 믿어."
아이러니하지만 CIA 안에서 누굴 믿는다는 것이 생각보다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
출세도 출세지만 자기 방어를 위해선 10년 지기의 뒤통수치는 걸 서슴지 않는 사람들이 바로 CIA이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과연 이 조직에서 누굴 가장 믿을 수 있는지 생각해보았다.
"기획실장님과 은밀히 접촉할 수 있나?"
< 48.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