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7.(2) >
47.(2)
월요일 아침.
3층 침실에서 내려와 2층 서고를 지나치던 천우가 슬그머니 미소를 지었다.
어제의 일이 잠깐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은근히 귀여운 구석이 있단 말이지.'
전미라는 서고에 가득한 책들을 보며 잔뜩 흥분했었다.
그녀는 주말마다 이곳에서 책을 볼 수 있냐고 물었고 천우는 당연히 오케이 했다.
몹시도 기분이 좋은 천우.
아마도 주말마다 두 사람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다는 것에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이 분명했다.
말끔한 정장을 입고 계단을 내려가는데 비서진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가시죠. 오늘은 상당히 바쁘실 겁니다."
"그럽시다."
월요일은 항상 바쁘다.
이제 천우는 예전처럼 은행과 증권가를 오가면서 환투기나 주식거래 등의 업무를 보는 시기는 한참이나 지나 있었다.
허나 그 시점이 지나니 오히려 더 바빠졌다.
천우를 찾는 사람들이 워낙에 많아졌기 때문이었다.
회사에 출근하니 미국에서 찾아온 지역은행연합과 영국 CDS협회 회원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오로지 천우 한 사람을 만나겠다고 찾아오니 꼭두새벽부터 움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천우의 집무실로 찾아온 지역은행연합 사람들은 투자의 방향을 수정하고 싶은데 최근 유가가 요동치는 바람에 쉽사리 결정하지를 못하겠다고 토로했다.
그들은 이미 HC의 컨설팅을 받고 있긴 했지만 각자의 사정으로 인해 투자의 다분 화가 필요해졌다.
해서 자신들이 원하는 곳에 일부 자금을 투자해서 사업을 확장했는데, 그 안에서 창출되는 수익이 변변치 않은 모양이었다.
지방은행들은 유가가 안정되었다고 판단해서 석유관련 사업에 투자했었고 그게 초반에는 제법 성공을 거두었다.
아랍의 정세는 항상 불안해왔고 한 때는 이란이 미국의 유조선을 수차례 공격하기도 하지 않았던가.
헌데 최근 1년 사이 유가가 큰 폭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국제유가는 1996년, 20달러를 돌파하여 배럴당 평균 26달러를 기록하기도 했었으며 1997년도에도 등락은 있었으나 제법 높은 수준의 유가를 형성했었다.
허나 1998년도 OPEC의 석유부양정책이 사실상 실패로 돌아감에 따라서 3월에는 두 자릿수가 깨져버리고 만 것이었다.
일본 언론에서는 연말까지 평균 5달러 선까지 유가폭락이 이어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는 이라크의 원유수출 재계와도 깊은 관련이 있는데 OPEC 전체가 일제히 감산에 합의하지 않고선 유가의 폭락은 결코 막을 수 없을 것이 분명했다.
"어쩔까요? 이쯤에서 발을 뺄까요? 사실, 차관을 내어준 기업들의 신용도가 이제는 아슬아슬한 수준입니다. 이대로는 대량손실을 입을 지도 모릅니다."
천우는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유가는 오르게 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유가도 결국 환율과 비슷합니다. 물량을 풀면 가격이 내려가고 조이면 올라가죠. 입장을 바꿔서 여러분이 오펙이라고 생각해보세요. 기름 값이 바닥을 찍어서 수지타산이 도저히
나오지 않습니다. 그냥 기름만 퍼 나른다고 돈이 되는 건 또 아니잖습니까."
"으음, 하긴. 이럴 땐 감산이 답이긴 하죠."
"만약 원금손실이 걱정이라면 한 1년만 기다리라 첨언하고 싶네요. 오펙의 인내심도 이제는 한계입니다. 제 생각에는 내년이면 반드시 유가는 오를 것이라 예상됩니다."
"아아!"
저들이 불안해하는 건 어찌 보면 아주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미국 남북전쟁 이후로 망하고 새로 생긴 은행들은 과연 얼마나 될까?
아마 손가락으로 센다면 하루 종일 걸릴 지도 모른다.
대공황, 각종 금융위기 등, 미국에 위기가 찾아올 때마다 소형은행들은 그야말로 줄도산을 겪었다.
저들은 80년대 미국의 금융위기를 이미 겪어봤고 그때 도산한 은행들이 몇 개인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지금까지는 HC에게 기대어 왔지만 어차피 파도 한 번이면 자신들은 그대로 부서진다는 걸 아주 잘 알고 있었기에 조바심이 났던 것이다.
천우는 그들에게 첨언을 해주었고 그제야 그들의 표정이 환해졌다.
"···1년 동안 소화가 안 되었는데 아주 체증이 다 내려가는 느낌이네요."
사실, 저들이 천우를 자꾸 찾아오는 건 자기가 가는 방향이 옳고 그른지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이었다.
정신과에서 약을 받아먹는 것보다 천우를 한 번 만나면 마음이 편해지니 자꾸 그를 찾아오는 것이었다.
미국에서 온 사람들이 우르르 빠져나갔다.
그 뒤를 이어서 들어온 사람들은 영국 사람들이었다.
이번에는 CDS문제였다.
최근 CDS의 제도를 악용한 악성부도가 판을 친다는 것이었다.
"악성부도 때문에 허리가 휘게 생겼습니다. 조치를 좀 취해주심이···."
천우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가 영국으로 CDS를 끌고 갔을 때엔 이미 악성부도에 대한 방어대책을 충분히 강구해 두었었다.
엄격한 심사, 그리고 추적관리, 또한 CDS수령기간 제한 등으로 각종 장치를 마련한 상태였다.
헌데 벌써 악성부도가 말썽이라는 건 페이퍼컴퍼니에 대한 판별이나 대출규제 등을 잘 이행하지 않았다는 소리가 된다.
"가이드라인을 따르지 않는 회사들이 꽤 있는 모양이군요?"
"네, 그렇습니다···."
"게다가 한 술 더 떠서 규제를 뚫기 위한 로비를 받아 챙기는 세력도 있는 것 같고요."
CDS협회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분명 천우는 영국이 가이드라인을 따라야하며 회원들에게 그것을 준수하라고 몇 번이고 강조했었다.
"내부감사를 부실하게 한 여러분 잘못입니다."
"···면목 없습니다."
"제가 해줄 수 있는 것은 제도강화 뿐, 수습은 여러분들이 알아서 하십시오."
회원들은 눈을 질끈 감고 말했다.
"죄송합니다!"
"죄송하다고 끝날 문제가 아니잖습니까."
"하지만 저희들도 할 말은 있습니다."
"할 말이요?"
유구무언,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을 사람들이 항변을 하겠다니 천우는 기가 막혔다.
허나 그래도 뭐라고 지껄이는지 들어는 볼 생각이었다.
"그래요, 어디 한 번 항변 해보세요."
"이걸 좀 봐주십시오."
그들이 건넨 것은 '유니버스 컴퍼니'라고 적힌 유령회사에 대한 보고서였다.
보고서에는 유니버스 컴퍼니는 최근 영국에서 일어난 악성부도 사건과 연관된 회사 70%에 투자를 해두었다고 나와 있었다.
"유니버스 컴퍼니에서는 제조회사 50개를 세웠습니다. 그런 후, 그 회사의 이중장부로 운영하면서 주식상장까지 해두었죠. 그런 후, 관련 CDS상품을 대거 구매했습니다."
"그리고 하나씩 도산시켜서 보상금을 챙겼다는 겁니까?"
"네, 그렇습니다."
"으음."
"사실, 기업의 신용평가제도가 잘못되었다는 건 저희들도 인정합니다. 하지만 현재의 제도가 가진 문제점을 파고들어 작정하고 사기를 친다면 저희들도 어쩔 도리가 없잖습니까."
IT버블이 일어날 정도로 인터넷이 발달하고 있었지만 통신시장은 여전히 걸음마 수준이었다.
이런 과도기적 문제를 파고들어 사기를 친 것은 영국으로서는 참으로 뼈아픈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천우는 이 문제를 직면하자, 2000년대 초반부터 미국이 겪었던 중국 페이퍼컴퍼니의 기생이 떠올랐다.
중국의 페이퍼컴퍼니는 미국 나스닥의 우량주식으로 위장하여 들어왔는데, 이 과정에서 불과 1년 만에 수억 달러에 이르는 시가총액의 증식을 이루면서 어마어마한 달러화 유출을
만들어냈다.
방식이 그와 비슷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허나 지금은 분명 그때와 상황이 달랐다.
"제도가 부실해도 제가 내려준 가이드라인을 잘 따랐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겁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습니다."
"그리고 저는 당신들 보모가 아닙니다. 문제가 벌어지면 수습이나 해달라고 저를 세웠습니까?"
"죄송합니다···."
"앞으로는 이런 일로 물의를 일으키지 말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명심하겠습니다."
금융회사가 사기를 당하는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지다니.
천우는 기가 막혔지만, 일단 어떻게 해서든 사태를 진화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했다.
"손실액이 얼마나 되죠?"
"순손실만 따진다면 대략 7억 5천만 파운드입니다."
"···많이도 먹고 튀었네요."
그는 최대한 자금을 회수하고 새로운 방안을 수립하는 수밖에는 없겠다 싶었다.
"일단 손실을 입은 건 어쩔 수 없습니다. 이 유니버스 컴퍼니라는 놈들 자체도 정체가 불분명한 놈들 아닙니까?"
"네, 그렇습니다. 이들도 페이퍼컴퍼니라고 사실상 결론지은 상태입니다."
"그렇다면 우선 영국과 프랑스 정부를 상대로 구제방안을 요청하고 법안수정을 요구합시다."
"그들이 구제를 해줄까요?"
"우리의 손실이 명백하긴 하지만 금융구제법에 명시된 사항들을 최대한 파고들어야 할 겁니다. 법률전문가들을 모집하도록 하세요."
"소송까지 간다면 아무래도 우리의 손실이 더 클 것 같은데···."
"그렇게 되지 않도록 제가 협상을 해보겠습니다. 우리 쪽 손실이 크다고 해도 저쪽의 손실이 아주 없다곤 장담할 수 없잖습니까."
"아아!"
"솔직히 정부라고 금융업이 휘청거리는 걸 환영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건 프랑스 역시 마찬가지고요."
재수 없으면 프랑스가 덤터기를 쓸 수도 있는 상황이니 협상만 잘하면 손실을 절반으로 줄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회원들은 천우에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제게 감사할 필요는 없습니다. 앞으로는 가이드라인을 철저히 시키도록 하세요."
"네, 알겠습니다!"
말을 맺고도 천우는 찝찝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같이 영국으로 들어갑시다. 제가 회원사들을 일제 점검해야겠습니다."
"그럼 준비하겠습니다."
"점검에 필요한 자료들은 오늘까지 통보해 드릴 테니 준비하세요."
"즉각 지시해두겠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이번 피해에 대한 피드백이 필요합니다. 손실자료는 물론이고 상대회사에 대한 자료를 최대한 수집해두세요. 일이 잘 풀린다면 자금회수도 가능하도록 최대한 디
테일하게요."
천우는 사업가다.
CDS에 대한 로열티를 받는 입장에서 손실액이 이렇게 커지면 그에게도 좋을 것이 없었다.
이건 HC로서도 손실이니 천우가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날 오후, 천우에게는 뜻밖의 손님들이 찾아왔다.
바로 MI5와 MI6이었다.
영국의 정보부가 천우를 찾아온 것은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지금까지 CIA와 일하는 사람이라는 이유 때문에 영국의 정보부는 천우와의 직접적인 접촉을 꺼려왔었다.
헌데 그들이 직접 천우를 찾아온 것이었다.
두 사람의 직급은 부장들이었고 정확한 소속은 본부를 내방하면 알려주겠다고 하였다.
그들은 매우 조심스러운 모습을 보였다.
MI5의 마리아나 로즐리 부장은 천우에게 협조를 구하면서도 기밀엄수를 부탁했다.
"CIA에게 정보가 세어나가지 않도록 해주시면 좋겠습니다만."
"그러겠습니다."
그제야 MI6의 버나드 체이슨도 입을 열었다.
그는 천우에게 사진을 한 장 건네며 말했다.
"혹시 이런 사람을 알고 계십니까?"
사진 속에 나와 있는 사람은 선이 진한 남유럽 남자로 보였다.
천우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처음 보는 사람입니다만."
"그러실 것이라 생각은 했습니다. 지금까지는 베일에 싸여 있었던 렉스테리아의 중간보스이니까요."
"렉스테리아!"
< 47.(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