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7. >
47.
10월 포브스지에서 선정한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00명에 천우의 이름이 들어갔다.
이른 아침, 어제 자 신문으로 그걸 접한 천우는 미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허참, 살다보니 별일이 다 있네 그려."
오늘은 일요일 아침이다.
주말에는 어지간하면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는 천우였기 때문에 일요일은 언제나 한가로웠다.
그는 집에 있는 커피포트에 물을 받아놓고 원두커피가 내려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면서 충식이 일가에게 밥을 주고 개집을 정리해주었다.
천우는 이제는 잘 걷지도 못하는 충식를 보며 안쓰럽게 웃었다.
"힘들지?"
"헐헐···."
얼마 전, 충식이의 동생 충태가 무지개다리를 건넜다.
수의사의 말에 의하면 충식이도 그리 오래 살지는 못할 것이라고 했다.
그는 녀석의 심장기능이 많이 떨어졌고 관절이 다 상해서 걷지도 못하니 병환은 날이 가면 갈수록 깊어질 것이라고 설명했다.
천우는 수술을 문의했지만 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지금은 수술보다는 충식이가 좋아하는 걸 해주세요. 이게 최선입니다.'
그는 충식이의 곁에 앉아서 녀석을 쓰다듬어주었다.
"충식아, 형이 너무 오래 나갔다 왔지?"
"···헐헐."
개도 표정이 있다고 한다.
원래 천우는 잘 몰랐지만 충태가 무지개다리를 건너던 날, 수의사가 그에게 말해주었다.
충태가 웃으며 갔다고 말이다.
그 표정을 빼다 박았으니 충식이가 웃는지 우는지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충식이는 씁쓸하게 웃고 있었다.
"아니라고?"
"헐헐!"
이제야 녀석이 환하게 웃었다.
이번에는 천우가 씁쓸하게 웃었다.
"짐승이 오래 살면 산신령의 전령이 된다고 하더니, 정말인가보네."
원래 충식이가 머리는 좋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말이 통하는 건 아니었다.
헌데 최근 들어 충식이를 보고 있자면 어쩐지 말이 통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참으로 묘한 일이었다.
하긴, 개의 평균수명을 훌쩍 뛰어넘었으니 영물이 되었을 법도 했다.
충식이는 천우의 무릎을 베고 누워 있다가 별안간 고개를 스윽 들었다.
그러자, 인절미처럼 생긴 강아지들이 우르르 현관을 향해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멍멍멍!"
와글, 와글!
이 집에는 누가 오기만 하면 개들이 우르르 달려 나가서 무슨 강아지의 홍수라도 난 것 같았다.
누가 왔나 싶어서 대문으로 나가보니 그 앞을 서성이는 사람이 있었다.
바로 전미라였다.
"어라? 미라 씨!"
"아, 안녕하셨어요?"
"오셨으면 초인종을 누르시지."
"아니에요! 저는 그냥 아침이나 먹자고 말할까 하다가···."
천우는 웃으며 대문을 열었다.
"들어오세요. 마침 커피를 내리고 있었어요."
"그래도 될까요?"
"물론이죠."
강아지들은 붙임성이 아주 좋았다.
전미라를 보자마자 그녀를 향해 껑충껑충 뛰고 나름대로 묘기도 부리면서 아주 난리법석을 떨어댔다.
물론, 그중에는 밖으로 나가려는 놈들이 하나 둘은 있기 마련이었다.
천우는 녀석들의 뒷목을 잡은 후, 번쩍 들어버렸다.
"이놈들, 누구를 고생시키려고?"
"왈왈!"
누가 꼬리에 모터라도 달아놓은 것 같았다.
사고를 치려다가 적발되었으나 이렇게 애교가 많으니 뭐라 할 수가 없었다.
천우는 대문을 닫고 전미라에게로 향했다.
그녀는 강아지들을 무척이나 좋아했다.
"어머, 이 인절미들을 어쩌면 좋아!"
"개를 좋아하세요?"
"네! 저는 원래 동물을 다 좋아해요!"
원래 웃음이 많기는 했지만 그녀는 이렇게 환하게 웃은 적이 별로 없었다.
심지어 천우는 그녀에게 덧니가 있다는 걸 오늘 처음 알았다.
천우는 그 모습을 한동안 지켜보기만 했다.
사람이 저렇게까지 행복해하는데 그 시간을 방해하는 건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이제 슬슬 밥을 먹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자, 그는 강아지들의 밥그릇에 간식을 담아놓고 수저로 쇠그릇을 톡톡 때렸다.
땡땡땡!
그러자, 강아지들이 썰물처럼 빠지더니 개집으로 우르르 뛰어 들어왔다.
"촵촵촵!"
"정말 엄청나게 먹네. 너희들도 나중에 한 덩치 하겠구나."
천우는 녀석들을 스윽 쓰다듬은 후, 전미라를 데리고 집으로 들어갔다.
전미라는 다소 경직된 미소를 지었다.
"그럼 들어갈게요···."
"하하, 얼마든지요."
동서양의 오묘한 조합, 이 저택의 전체적인 느낌은 그러했다.
전미라는 들어서자마자 감탄사를 연발했다.
"우와! 이렇게 특이한 집은 처음 봐요!"
"어렸을 때 할아버지께 여쭤보니 전통을 지키는 건 좋은 일이지만 고리타분한 것을 고수한다면 꼰대나 다를 바가 없을 것 같아서 이렇게 지으셨다고 하더라고요."
"아아, 그렇구나!"
천우는 일단 그녀와의 식사를 준비하기로 했다.
"책을 좋아하신다고 하셨죠?"
"네! 저번에 보셨잖아요."
"우리 집에는 고서가 많아요. 구경하고 계시면 제가 식사를 가지고 갈게요."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저는 같이 준비하는 것이 좋아요."
"하지만 손님 손에 물을 묻히는 건···."
"그 시간도 우리가 함께 있는 시간이잖아요."
천우의 머리에 느낌표가 찍혔다.
그러자, 그녀는 수줍게 웃으며 주방을 향해 다다다 달려갔다.
"···주방이 이쪽이죠?!"
"네, 맞아요!"
천우는 그녀의 뒤를 따라가며 슬그머니 웃었다.
'가끔 깜빡이도 안 키고 훅 들어올 때가 있단 말이지.'
저번에는 집으로 불쑥 데리고 가더니 이번에는 천우의 집으로 직접 찾아오기까지 했다.
그는 전미라의 이런 과감함이 전혀 싫지가 않았다.
-거봐요. 호르몬의 주파수가 딱 맞죠?
'···다 좋은데 AI의 부작용이 하나 있구나.'
-사생활 침해를 받는다고 생각하신다면 묵음기능을 사용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럼 주인님이 다시 켤 때까진 조용히 하겠습니다.
'뭐야, 그래봤자 말만 안하다뿐이지 네가 다 지켜보는 건 마찬가지잖아!'
-어쩔 수 없습니다. 저는 주인님과 항상 화장실도 함께 가잖아요.
'그거야.'
10년을 넘게 한 몸에 살아서 그런지 이제는 수치나 부끄러움을 느낄 시기는 한참이나 지나 있었다.
허나 이건 조금 다른 문제였다.
-제가 많은 부분에서 도움을 드릴 수 있을 것 같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그건 아닌 것 같은데.'
-그게 맞는지 틀린지는 두고 보면 아실 겁니다.
과연 무슨 서포터를 해준다는 것일까.
천우는 그녀의 말은 까마득히 미뤄두고 그대로 주방으로 달려갔다.
주방에는 예전에 할머니의 어깨 너머로 익혔던 크림스튜 재료가 놓여 있었는데, 그녀는 벌써 그것을 깔끔하게 손질하고 있었다.
탁탁탁!
칼을 쓰는 솜씨가 역시 대단해보였다.
천우는 그녀의 옆에서 같이 재료를 손질했다.
"천우 씨는 노래 좋아해요?"
"좋아하죠. 개인적으로는 셀린 디온이나 머라이어 케리를 좋아합니다."
"어머, 저랑 취향이 비슷하시네요."
"그럼 노래나 들으면서 할까요?"
"좋죠!"
이 집에는 현보전자의 물건이 가득한데, 그 중에는 최근에 최호명이 심혈을 기울여 개발한 CD플레이어도 있었다.
최근 현보는 다품종 다량생산에서 변화를 주어 기업의 시그니처가 될 최고급 가전을 생산하는 라인을 확보하였다.
최고급 가전을 개발하면서 생기는 노하우를 바탕으로 다품종 다량생산의 품질을 높이겠다는 의지였다.
그 의지는 바로 이 CD플레이어를 통해서 알아볼 수 있었다.
머라이어 케리의 1991년 앨범에 수록된 곡이 차례대로 흘러나왔다.
그 노래를 들은 전미라는 깜짝 놀라서 천우를 쳐다보았다.
"음질이 상당히 좋은데요···?"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많이 발전했죠?"
"이정도면 일본이나 독일 제품도 한 수 접어주겠는데요?"
실제로 현보의 시장점유율은 점점 올라가는 추이를 보이고 있었다.
일본의 버블붕괴 이후, 전자제품 시장이 침체국면에 접어들면서 외부는 물론이고 내수시장까지도 위축되었던 것이다.
예전의 아키하바라는 한국의 용산과 비슷한 역할을 하면서 엄청나게 발전했었지만, 지금은 그 흔적을 찾아보는 것조차 힘들 지경이었다.
그밖에 수많은 전자제품 상가가 망해서 침체기에 빠졌고 최호명과 천우가 점령한 금융, 소재 시장을 제외한다면 게임, 애니메이션 정도가 선방한다고 볼 수 있었다.
최호명은 이를 기회로 삼았다.
그가 현보의 대주주가 된 시점부터 연구에 엄청난 자금을 투자하기 시작했고 결국엔 1990년대 후반에 들어서 일본과 독일을 따라잡게 된 것이었다.
심지어 최근에는 일본의 거대 전자기기 회사들의 매출을 넘어서기까지 했다.
전문가들은 슈팅스타라는 초거대 자본을 등에 업은 현보가 5년 안에 전 세계 전자기기시장을 선도하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미 반도체, 메인보드, 음향기기 등은 세계 최고의 기술력을 갖추었고 MPU시장은 현보의 독주가 시작되었다.
천우 역시 전문가들의 예언이 사실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뿌듯한 표정으로 음악을 듣고 있었다.
전미라는 미소 띤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아버지를 참 좋아하시는 것 같아요."
천우는 채소를 손질하다가 말고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래보이나요?"
"당신의 얼굴에 다 나타나요. 특히나 아버지의 업적을 얘기할 때면 더더욱 그렇죠."
"그, 그랬나요?"
"저도 아버지를 사업가로서 존경하긴 하지만 아버지로서는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굳이 말하자면 친분이 별로 없다고나 할까요?"
생각해보면 최호명은 그 괴로운 상황에서도 천우에게 아버지 노릇을 하기 위해서 무던히도 노력했었다.
그는 최충의가 어려서 자신에게 주었던 기대보다는 관심을 주고 싶었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천우는 성공한 남자가 되자면 아버지의 뒤를 따르기만 한다고 생각했었다.
"아버지는 제 롤모델이세요. 그대로만 산다면 죽을 때쯤엔 후회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렇군요."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다보니 재료손질이 끝났다.
천우는 할머니에게서 배운 그대로 쇠고기 크림스튜를 만들어냈다. 그런 후, 곁들여서 먹을 빵과 시저샐러드를 뚝딱 만들어서 꺼내놓았다.
전미라는 깜짝 놀라서 천우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실력이 좋으신데요?"
"한식은 모르겠는데 양식은 좀 해요. 할머니가 이탈리아계 미국인이시잖아요."
"아아! 회장님의 솜씨를 어깨너머로 배운 것이로군요!"
"그럼 먹을까요?"
두 사람이 식탁에 앉으니 평소의 적막은 자취를 감추어버렸다.
분명 천우 혼자서 먹을 때보다는 손이 많이 가는 것이 사실이지만 뭔가 가슴 속 한 구석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꼈다.
밥을 먹는 동안에도 대화가 끊이지 않았다.
"이곳에는 주로 어떤 책이 있나요?"
"한양 최 씨의 조상님들께서 최가 상단을 이끌고 유럽을 누비면서 가지고 오신 동서양의 고서적이 많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주류를 분류할 수가 없네요."
"아아! 한마디로 아주 오래된 도서관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하하, 말하자면 그렇게 되겠군요."
책 얘기로 이야기꽃을 피운 후, 설거지를 하는 데도 둘은 함께 했다.
천우가 식기를 닦아서 건네주면 그녀가 물기를 닦아서 수납해주는 형식이었다.
"앞치마가 너무 잘 어울려요."
"그런가요?"
"좀 많이 작기는 하지만 상당히 귀엽네요."
190cm가 넘는 거구가 앞치마를 하고 설거지를 하고 있으니 꽤 이색적이긴 했다.
천우는 겸연쩍게 웃었다.
"···하하, 남자가 살림을 너무 잘해도 매력이 없나요?"
"아니요. 오히려 멋져요. 저는 그런 천우 씨가 너무 좋아요."
"고맙습니다. 제가 좋다니, 저도 미라 씨가···."
그저 상투적으로 내뱉은 말들이 아니었다.
두 사람은 동시에 얼굴이 새빨개졌다.
-주인님과 전미라 씨의 심장박동은 평균이상으로 올라갔습니다. 호르몬 수치 역시 기준치를 훨씬 웃돌고 있습니다. 아마 지금이···.
'쉿!'
머리가 어지러웠다.
지금까지 살면서 이런 감정을 느껴본 적이 있었던가.
바로 그때였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뭔가가 천우의 허리를 감쌌다.
"······!"
순간, 천우의 머리에서 스팀이 확 올라왔다.
-···지금이 그때인 것 같은데요?
< 47.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