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노머신 재벌 3세-92화 (92/202)

< 46. >

46.

1998년 2월.

국회의원 김중대가 대통령에 당선되어 '국민의 정부'가 출범하였다.

이번 대선에서는 한국민당의 이창희가 이길 것이라는 의견이 많았었는데, 놀랍게도 김중대가 이창희를 1.3% 차이로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된 것이었다.

사실, 그가 선거에서 우세할 수 있었던 이유는 꽤 많았다.

그건 바로 자금력.

이창희하면 떼놓을 수 없는 것이 비자금 스캔들이었다.

세풍, 총풍 등, 한국민당과 이창희가 대한민국 보수정당을 수렁으로 밀어 넣었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이 시기에 천우가 김중대와 손을 잡았던 것은 이창희의 한국민당이 비자금으로 맥질이 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그 정도로 검은 돈에 집착하는 이창희였기 때문에 천우는 애초에 그쪽으로는 관심도 두지 않았던 것이다.

다만, 정세가 바뀐다면 다시 생각해 볼 여지는 있기는 했다.

2월 25일 아침.

천우는 대한민국의 재벌 12명과 함께 청와대를 찾아갔다. 대통령 서신으로 초대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물론, 천우는 엄연히 말해서 미국에서 온 사업가이기 때문에 청와대에 초청될 이유는 없었다.

허나 그의 초청에 의문을 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비록 의도한 바는 아니었으나 대한민국의 금융위기를 천우가 막아냈고, 그로 인해서 아시아의 금융위기까지 사그라졌으니 그와 일면식이 없는 사람이라도 당연히 초대를 하고 싶었

을 것이다.

붉은 융단이 깔린 청와대에 들어서자, 복도에 횡대로 늘어서 있는 재벌들이 보인다.

1세대 재벌부터 재벌 2세, 혹은 3세들이 오찬장의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오, 저기 오는군."

천우는 오늘 개인사정으로 인해서 초대에 약간 늦게 도착했다.

헌데 아직도 오찬이 진행되지 않은 것에 그의 고개가 좌로 살짝 기울어졌다.

바로 그때, 오찬장의 문이 열렸다.

철컥!

우연인지 필연인지 천우가 오자마자 문이 열렸다.

각 회장들의 표정이 별로 좋지가 않았다.

"···동네 장사하는 사람은 서러워서 살겠나, 이거."

원래 오찬시각이 9시 30분이었다.

헌데 지금 시각은 10시 10분, 만약 청와대가 천우를 기다리느라 오찬장을 늦게 연 것이라면 대기업 총수들은 40분 동안 이곳에서 멀뚱멀뚱 서 있었다는 소리였다.

허나 그 어떤 누구도 천우에게 대놓고 불만을 토로하지는 못했다.

천우는 미국은 물론, 일본과 한국, 태국 등의 비호를 받는 엄청난 투자세력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제 3차, 4차 중러 에너지 개발 팀을 구축한다는 소식이 들렸기에 재벌들은 그저 입을 꾹 다물고 있을 뿐이었다.

청와대 비서실의 안내를 따라 오찬장으로 가니 대통령과 그 내각이 보인다.

김중대는 총수들을 향해 악수를 건네 왔다.

"먼 길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초대에 감사드립니다."

다소 형식적인 인사치례가 지나간 후, 마지막에 천우 차례가 돌아왔다.

그는 천우의 손을 잡곤 아무런 말없이 계속 흔들기만 했다.

흐뭇한 눈빛, 아주 대놓고 편애하는 입술 모양까지.

총수들의 얼굴이 일그러졌지만 김중대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의 손을 계속 잡고 있었다.

"우리 대한민국의 자랑스러운 영웅이 오셨군요. 다들 박수 부탁드립니다."

심지어 대통령은 천우를 앞에 두고 재벌들에게 병풍노릇이나 하라고 압박했다.

그러자, 그들은 어쩔 수 없이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짝, 짝짝···.

박수에 매가리가 하나도 없었다.

천우는 이렇게 대놓고 편애나 받자고 온 것이 아니라서 김중대가 몹시도 불편했다.

그러자, 김중대는 천우의 표정이 일그러진 것을 보곤 총수들을 나무랐다.

"허참, 아침을 못 드셔서 그런가. 다들 힘이 없으시네요."

"···그럴 리가요."

짝짝짝짝!

여전히 대한민국은 정부가 콧바람만 불어도 그냥 나자빠질 기업이 수두룩했다.

그것이 바로 청와대라는 기관이 가진 힘이었다.

허나 천우는 예외였다.

제 아무리 대통령이라고 해도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인물, 국제적으로 참으로 대단한 입지를 가진 인물.

그게 바로 천우였던 것이다.

"자, 그럼 다들 앉으실까요?"

김중대는 천우를 직접 데리고 상석으로 향했다.

대통령의 바로 옆자리에 천우를 앉히더니 그 아래로 재벌들을 쭈르륵 줄 세우기 시켜버렸다.

'흐음, 대외적으로 나와 청와대가 친하다는 걸 과시하고 싶었던 것일까?'

천우는 분명 청와대와 거래관계에 있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미국이나 일본처럼 계약관계로 묶인 사이는 분명 아니었다.

아직까지 천우에게 대한민국 정부의 뚜렷한 혜택은 나오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혜택을 준 것이라면 오히려 천우 쪽이라고나 할까.

만약 천우가 대한민국 정부에게서 받은 것이 많았다면 이렇게 경직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건 김중대 역시 아주 잘 아는 사실이었다.

그는 오찬이 시작되자마자 이렇게 선언했다.

"HC투자를 대한민국 금융의 직접투자 제 1호로 선정하면 어떨까 싶은데, 다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금융 직접투자요···?"

"HC투자에게 종합금융사와 투자신탁회사 법인 허가를 내리고 그와 더불어 상업금융권 설립을 허가했으면 하는데요."

"네에···?!"

"아참, HC투자에서는 이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생각하시지요?"

아직까지 미국의 은산분리 원칙은 아주 철저하게 지켜지고 있었다.

그건 바로 상업은행과 투자은행의 기능을 분리하여 투자자본이 상업 자본을 침범하는 사례를 방어하기 위함이었다.

허나 2008년 미국의 금융위기 이후, 상업은행과 투자은행의 장벽이 사실상 허물어졌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지금은 금융시장의 다변화를 꾀하기엔 시기상조라고 볼 수 있었다.

한국 역시 금산분리의 원칙을 고수하기 위해 정치권과 상업권의 많은 노력이 집중되고 있었기에 이와 같은 특전은 상당히 파격적이라 할 수 있었다.

재벌들이 반발했다.

"···지금까지 외국 자본을 꾸준히 방어해왔던 청와대에서 갑자기 투자개방을 하겠다는 겁니까?"

"우리도 언젠가는 개방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얼마 전 원화시장의 폭락 사건을 잊으셨습니까? 해외자본의 급작스러운 유입은 기업 생태계를 뒤엎는 일이 될 수도 있단 말입니다!"

재벌들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사실, 천우가 현보일가의 후손이라는 것 때문에 안 그래도 재벌들은 자꾸 신경이 쓰이던 참이었다.

그저 작고 똘똘한 줄만 알았던 아기공룡이 어느 새 육식공룡으로 성장해서 먹이사슬의 최상위 포식자로 군림하고 있었으니, 그걸 지켜보는 다른 포식자들의 입장에서는 답답할 노

릇이었다.

그런데 그런 포식자에게 날개를 달아준다니, 재벌들의 입에서 거품이 뿜어져 나오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한 편, 천우의 입장으로서는 나쁠 것 없는 제안이었다.

다만 문제가 하나 있다면 저쪽에서 천우를 너무 깊게 끌어들이려 한다는 점이었다.

'내 모가지에 개줄을 채우겠다는 건데···.'

천우가 종금사 및 투신사를 개업 후에 상업은행을 인수하게 되면 그는 원화로 꽤나 쏠쏠한 재미를 볼 것이다.

허나 그만큼 한국정부의 압박을 받기에도 좋은 구조가 되기 때문에 나중에 발을 빼야 할 때가 온다면 손해를 볼 수도 있었다.

더군다나 정권이라는 건 언제든 바뀌기 마련 아니겠는가.

다음 정권에 천우가 그들의 공격을 받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천우가 아무것도 가지지 못했을 때에나 해당되는 얘기였다.

"그런 편의를 봐주신다니, 저로선 영광입니다. 하지만 남들 눈치도 있는데 너무 대놓고 은산분리를 깨는 건 좀 그런데···."

"이 세상이야 말로 힘의 논리에 따라 도는 곳 아니겠습니까.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아마 미국에서도 크게 신경 쓰지 않을 것으로 생각됩니다만."

"그렇기는 하겠지요."

당연한 소리다.

항간에는 아시아의 금융위기가 미국의 자금시장이 한국으로 진입하기 위한 절차였다는 의견까지 있었는데, 실제로 미국은 한국의 금융시장 개방을 수차례 요구했었으나 그 절차가

참으로 지지부진 했었다.

그런 가운데 제 1차 개입자본으로 HC를 밀어 넣는다면 미국으로선 이보다 더 좋은 경우도 없을 터였다.

천우는 한 5분 동안 말이 없었다.

나름대로 잠깐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허나 그에 반해 김중대는 상당히 느긋했다.

HC의 특성상 자신이 뿌린 떡밥을 천우가 반드시 물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번 원화 폭락으로 한국정부는 깨달은 바가 꽤나 많았다.

한국의 금융과 기업 구조가 여러모로 문제가 많다는 것을 절감하였기에 그 구조개편에 들어갈 참이었다.

그럼과 동시에 HC와 같은 대규모 투자 자본을 끌어들여 보험을 든다면 무사탄탄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천우도 그의 의도쯤이야 진즉에 간파하고 있었다.

그가 고민하는 것은 과연 김중대가 자신에게 얼마나 도움이 될 것인가, 바로 그것이었다.

재벌 총수들의 눈빛이 모두 천우를 향하고 있었다.

이윽고 그의 입이 열렸다.

***

영국의 신탁회사 미라클 라이트 기획실 안.

이들은 깊은 고민에 빠져 있었다.

"이상하네. 우리는 분명 제대로 회수절차에 들어갔었던 것 같은데. 장부에 기입되어 있는 재산 이외의 재산이 또 있었던 것인가."

"그럴 리가."

"흐음, 그렇다면 우리가 찾아낸 금괴 말고도 또 다른 보물이 있었을 가능성도 있나?"

"전혀."

"제기랄, 그럼 저것들은 다 뭐란 말이야?"

빨간 머리의 중년이 백금발의 중년을 보며 말했다.

"사기지. 뭐긴 뭐야."

"사기?"

"우리가 보물을 발굴한 곳이 어디였는지 기억하나?"

"그야···."

"저들이 지하에 보물이 잠들어 있을 것이라고 말하는 바로 그 지점일세. 단순한 역사의 문헌이 아니라 우리는 그 당사자들의 입장까지 전부 다 들어보지 않았나. 보물이 더 있을 리

가 없어."

백금발의 중년은 걱정스레 말했다.

"제기랄, 다 좋은데 우리가 계약을 파기했다고 생각하면 어쩌지?"

"저들이 바보도 아니고 그걸 믿고 있겠나?"

"하긴, 그런 그렇지만···."

"우리는 그저 계약한 것만 지켜주면 되는 거야. 더 이상 불안해 할 것도, 그럴 필요도 없다는 거지."

그제야 백금발의 사내가 씁쓸하게나마 웃었다.

빨간 머리의 남자는 곧바로 화제를 돌려버렸다.

"신탁으로 넘어갈 집들은 잘 관리하고 있는 거지?"

"물론. 전문가들을 초빙해서 한 달에 한 번씩 관리하고 있어."

"잘하고 있군. 우리의 신뢰를 위해서도 그건 반드시 지켜내야 할 것들이라고."

"그나저나 신탁은 언제쯤 해지할 수 있는 거지? 우리도 이젠 좀 쉬어야 할 것 아니야."

"우선 저쪽에서 법적 만 성인이 되어야 하고 더 나아가서는 한국계 국적을 취득하는데 몇 가지 해결과제들이 있을 거 아니야. 그러자면 시간이 좀 걸릴 거야."

"거참 복잡하게도 만들어놨군. 차라리 그 윗대에게 물려주면 참 좋을 텐데."

빨간 머리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계약에 정확하게 명시되어 있잖아. 가문에서 세운 적법한 후계자, 그중에서도 자질이 가장 뛰어난 사람으로 한다고."

"흐음, 뭐 그건 그렇지."

그는 백금발의 남자에게 웃으며 말했다.

"그렇게 놈들이 거슬린다면 이참에 아예 확 쓸어버리던지."

"그래도 되는 건가?"

"어쨌든 고객과 우리의 관계를 어지럽힐 수도 있었던 놈들이니까. 자네가 청소 좀 한다고 해서 나쁠 것 없을 것 같은데?"

"···그래, 그럼 찝찝하지 않게 한 방에 해치워버리자고."

미라클 라이트는 MI5와의 접촉을 준비하였다.

< 46.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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