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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2)
1997년 11월.
드디어 해외 투기세력의 본격적인 원화투매가 시작되었다.
현재 원화가격은 1013원 선, 본격적인 1달러 1000원 시대가 도래 한 것이다.
이에 따라서 대한민국 5대 은행의 파산이 거론되고 있었고 서서히 대한민국 금융위기론이 대두되고 있었다.
허나 12월, 이변이 일어났다.
해외에서 원화를 대량으로 매입하는 세력이 나타나면서 불과 일주일 만에 원화환율이 15원 가까이 오른 것이었다.
역대사상 최고의 변동이었다.
전문가들은 수 조원의 원화가 일주일 사이 증발하다시피 매입되었고 이것이 현물경기에 영향을 주면서 급격히 올라가던 당초 예상되었던 인플레이션을 둔화시킬 수도 있다고 판단
했다.
이에, 구미의 투기세력이 원화투매를 멈추었고 원화시장은 대략 2주일의 휴지기에 접어들었다.
그리하여 12월.
이제 원화는 점차 회복세를 거치면서 900원대 중반까지 안정적으로 내려갔다.
허나 문제는 다른 곳에서 발생했다.
홍콩에 대대적인 투기세력이 등장하면서 증시가 한순간에 8%이상 떨어진 것이었다.
실로 엄청난 물량이었다.
홍콩정부는 3시간의 거래정지를 걸었고 그제야 폭락세가 둔화되기 시작했다.
문제는 이 시기에 싱가포르에서 비슷한 현상이 벌어지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신흥공업국 중에서도 증시현황이 가장 좋았던 두 개 국가의 폭락은 곧바로 대만과 인도네시아까지 퍼졌다.
태국의 바트화 투매를 방어하던 시절, 대대적인 통화스와프 및 주식시장의 전략적 투자가 있었기 때문에 홍콩과 인도네시아, 대만, 싱가포르가 연쇄적으로 하락하면 나머지 아시아
전제 시창은 당연히 폭락장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절체절명의 위기.
인도네시아 주식시장에는 긴장감이 가득했다.
총리관저에는 전 내각이 다 모였고 그들은 마른 침을 삼키며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었다.
딩동!
-긴급소식입니다! 외국인 투자자들의 일제매각이 시작되었습니다!
"제기랄, 드디어 이 동네로도 진출한 것인가!"
물론, 최근 국제적인 증시폭락으로 인하여 아시아 시장이 불안한 것은 사실이었다.
허나 그렇다고 해서 이렇게 누군가 짜놓았다는 듯이 증시가 한 방에 쑥 빠져버리는 건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었다.
그것도 10월, 이미 한 차례 투매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대대적인 투매를 시도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과연 이 투기세력은 인도네시아 경제를 어떻게 흔들어 놓을 것인가.
총리내각은 바짝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딩동!
-외국인 투자자들의 매각이 빠르게 진행 됩니다! 현재 증시 3% 포인트 하락했습니다!
"제기랄, 하늘도 무심하시지!"
로이 조로스를 해치웠을 때만 해도 태평성대가 계속될 것이라고 생각했건만, 역시 세상은 그리 호락호락한 곳이 아니었다.
바로 그때였다.
딩동!
-증시하락, 정지합니다! 아무래도 외국인 투기세력이 매각을 멈춘 것 같습니다.
"···하늘이 도왔군."
-어어?!
증권시장에 나가 있던 캐스터가 놀란 투로 말했다.
딱딱하게 굳어버린 그의 표정.
"뭐야, 무슨 일이야?"
-일본 닛케이지수, 폭락합니다!
"닛케이지수?!"
-NDF에서 엔화 투매가 시작되었습니다! 엔 달러 환율, 급락합니다!
"엔화!"
일본의 통화가치가 급락하면서 엔화에 영향을 받는 국가들의 환율도 덩달아 요동치기 시작했다.
더욱이 닛케이지수가 폭삭 주저앉으면서 연쇄반응으로 주변 국가들의 증시도 거의 개판 오 분전이 된 것이었다.
그제야 인도네시아 총리내각은 깨달았다.
저들의 목적은 애초에 일본시장의 침체와 그에 따른 도미노 현상, 그러니까 엔화폭락의 연쇄작용으로 인한 아시아 시장 전역의 폭락이었던 것이다.
***
CIA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설마하니 저들이 엔화를 저렇게까지 저돌적으로 투매할 것이라곤 전혀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물론, 이정도 투매로 일본이 무너지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다만 문제가 되는 것은 일본의 주변국들이 영향을 받아 무너지기 시작하면 아시아시장 전체가 무너질 것이라는 것이었다.
그것은 다시 말해서 일본의 존립 자체도 불투명하다는 것.
CIA는 슈퍼보이의 방어전을 지켜보면서 함께 수많은 공조를 시도해왔다.
아시아 전역을 돌면서 벌어졌던 그 방어전의 뒤에는 모두 CIA와 천우가 있었던 것이다.
허나 이제는 한계에 도달해 있었다.
일본 닛케이지수가 주저앉자마자 슬슬 CIA의 자질부족까지 거론되고 있으니, 미국 정부내각의 눈길도 썩 곱지만은 않았다.
"이 새끼들이 일본까지 타격할 줄이야."
제법 손이 크다는 건 알았지만 닛케이지수를 한 방에 주저앉힐 정도의 능력이 된다는 것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더군다나 더 충격인 것은 슈퍼보이가 절반쯤은 실패했다는 점이었다.
이제 CIA는 마음이 급해졌다.
CIA부국장 리버 테일러는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다.
"···슈퍼보이는 아직 소식이 없습니까?"
"아직 소식이 없습니다. 조만간 소식이 올 것이라고 생각되긴 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조만간 소식이 올 것이라고 말한 지가 벌써 한 달이 넘었다는 걸 알고 있습니까?"
"그야···."
이 작전을 주도한 사람은 아론 테이트였다.
기획실장의 손에서 시작되었고 이제는 그 기간이 상당히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진전이 없으니 이제는 슬슬 국장 쪽에서도 조바심이 나기 시작한 것이었다.
리버 테일러는 이제는 미국이 한 발 빠져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그의 생각에 동조하는 사람이 있었다.
바로 정보본부장 리암 로들랜드였다.
"더 이상은 기다릴 수 없습니다. 우리가 그 한국인 말만 믿고 언제까지 기다릴 수는 없는 노릇 아닙니까."
"으음!"
분위기가 정보본부장 쪽으로 기우는 것 같았다.
허나 기획실장도 절대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조금만 더 시간을 주십시오. 이제 거의 다 왔습니다."
"그러니까, 그 시간이 벌써···."
바로 그때였다.
지이이잉!
아론 테이트의 호출기가 울렸다.
그럼과 동시에 기획실에서 한 요원이 달려 나왔다.
"실장님! 슈퍼보이에게서 호출입니다!"
"드디어!"
리버 테일러는 사실, 그렇게까지 슈퍼보이를 신뢰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다만, 그가 올린 실적이 뚜렷한데다 대부분이 그를 신뢰하니 어쩔 수 없이 자금과 시간을 내어주었을 뿐이었다.
'이번에야 말로 그놈이 거품인지 아닌지 알 수 있겠군.'
슈퍼보이에 대한 거품론은 끝도 없이 재기되어 왔지만 여전히 아론 테이트와 같은 사람들은 그를 추종하고 있었다.
리버 테일러는 그 진위여부가 너무나도 궁금했던 것이다.
그의 전화가 스피커를 통해서 사무실 전체에 울려 퍼졌다.
-실장님, 접니다.
"그래, 자네! 이거 너무 오랜만에 전화하는 거 아닌가?"
-그럴 만한 사정이 좀 있었습니다.
"지금 어디인가?"
-프랑스에 와 있습니다.
"프랑스?"
-그린버드 요원에 의하면 이곳 프랑스 파리에 놈들의 거처가 있는 것 같습니다.
"드디어 성과가 있었던 모양이로군."
-모두 실장님 덕분입니다. 이제는 안심하셔도 됩니다. 더 이상 비밀 같은 건 엄수하지 않으셔도 될 테니까요.
순간, 리버 테일러의 눈살이 구겨졌다.
그가 곁눈질로 기획실장을 쳐다보았으나 아론이 말했다.
"사실은 슈퍼보이가 저희들에게 준 차트가 있었습니다."
"차트?"
"지금까지 우리 CIA가 움직인 것은 그 차트와 최대한 비슷한 시장을 구축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차트라는 소리는 생전 처음 들어보는 리버 테일러였기에 순간적으로 화가 치밀어 오르려고 했다.
허나 이 엄청난 공작이 과연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혹은 이게 정말 잘하는 짓인지는 금방 밝혀졌다.
"부국장님, 자세한 설명이 필요하시죠?"
"물론입니다."
"그럼 슈퍼보이에게 직접 들으시죠."
천우는 스피커 너머로 들리는 소리를 듣곤 곧바로 CIA 전체에게 말하기 시작했다.
-분위기가 정리된 것 같으니 말씀드리겠습니다. 11월, 원화투기가 있었을 겁니다. 그리고 그에 바로 이어서 원화 보합세가 이어졌죠. 아시겠지만 원화를 빠르게 매입하는 세력이 있
어서 방어에 성공한 것으로 보였습니다. 허나 사실, 그건 저 혼자 원맨쇼를 한 것이었습니다.
"원맨쇼···?"
-저번 10월, 전 세계적인 증시폭락의 도미노가 있었죠. 그 시발점이 어디였지요?
"그야 당연히 뉴욕증시였죠."
-그래요, 뉴욕증시가 폭락하면 전 세계 주식시장이 와르르 폭락장이죠. 그걸 보면서 저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만약 내가 투기꾼이라면 자잘하게 일본, 독일, 프랑스 등을 건드리
는 것이 아니라 미국을 한 방에 쳐서 흔든 다음, 도미노 현상이 일어나길 기다리겠다고요.
"아아! 도미노!"
-저는 렉스테리아를 꽤 오래 연구했습니다. 심지어 마이너스 투자이론을 만들 때, 투기도 함께 연구했을 정도였죠. 그때 콘셉트를 잡았던 투기세력이 바로 렉스테리아였습니다. 그
래서 저는 논문에서 투기세력을 지칭할 때 X라고 표현해두었지요.
"으음."
-아무튼 그런 생각에 저는 아시아 시장 중 어느 한 곳을 먼저 건드려보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래서 원화를 한 방에 매도해버렸죠. NDF에서는 물론이고 한국의 현물시장까지 흔들
어 버릴 정도만 말입니다.
"허어! 방어가 아니고 스스로 매각을 했다고요?!"
일동은 탄성을 내뱉고 말았다.
아니, 이제는 탄성 정도가 아니라 경악에 가까운 표정들이었다.
허나 아직 놀라기는 일렀다.
-헌데 이상한 건 제가 물량을 매도한 후, 해외투자자들이 몰려서 한꺼번에 매도세에 참가했음에도 불구하고 렉스테리아는 움직임이 없었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야···."
-놈들이 목표한 수치를 이미 제가 달성했기 때문이었죠. 놈들이 더 이상 움직일 필요가 없었던 겁니다. 실장님, 이제는 차트를 보여주셔도 됩니다.
아론은 프로젝터에 천우가 만든 차트를 올려두었다.
그러자, 주변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가 만든 차트가 현 시점의 아시아 증시 및 환율시장과 정확하게 일치하기 때문이었다.
특히나 부국장이 가장 심란했다.
'뭐지? 이 자식, 인간이 아닌 건가?'
이걸 인간이 혼자서 해냈다는 걸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허나 모든 건 사실이었다.
-처음에는 이 차트를 만들기 위해서 자금을 투여할까 생각해봤습니다. 헌데 제가 생각한 이론이 맞는다면 굳이 그럴 필요가 없이 실험만 해보면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허어, 그래서 그 생각이 정확하게 맞아떨어진 것이었습니까?"
-바로 그거죠. 제 생각엔 한국의 타깃이 홍콩과 싱가포르였는데, 역시나 맞아떨어졌습니다. 그리고 놈들은 딱 자신들이 필요한 만큼만 치고 빠질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것도 찰떡
같이 딱 맞아버렸죠.
"아아, 그래서 폭락장이 어느 한 시점에서 멈추어 선 것이로군요!"
-그런 겁니다.
리버 테일러는 이제야 뭔가 좀 이해가 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저놈들은 아시아 시장의 위기론만 조장해놓고 일본을 타격해서 한 방에 증시를 뒤흔들 생각이었던 것이로군요!"
-잘 아시네요. 일본만 타격하면 아시아 시장을 돌면서 타격을 주는 돈에 1/10만 투자해도 그 열 배의 효과는 낼 수 있습니다. 기조와 자금력, 두 개만 있으면 게임은 끝이니까요.
"그럼에도 결국 닛케이지수는 떨어졌습니다. 그럼 방어에는 실패 한 겁니까?"
천우는 수화기 너머로 실소를 흘렸다.
-아니요, 성공했습니다.
< 44.(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