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노머신 재벌 3세-88화 (88/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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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범세계적 주가폭락 이후, 역외 선물환시장(NDF: non deliverable forwards)에서 원화투기가 있었다.

NDF시장에서의 선물환율은 매입가격 기준 1개월 물 918원, 3개월 물 935원, 1년 물이 995원에 거래되었다.

이는 지난달에 비해 무려 30원이나 오른 가격이었다.

다시 말해서 원, 달러의 환율이 한 달 사이에 이만큼이나 올랐다는 소리다.

사실, 구미 투기세력이 원화를 투기하기 시작한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었다.

저번에 태국에서 로이 조로스가 천우에게 된통 깨진 후, 투기시장이 약간 잠잠해졌으나 최근 주가폭락과 환율시장 불안으로 인해 다시 투기가 극성을 부리고 있었던 것이다.

다시 보름이 지난 후, NDF시장이 꿈틀거렸다.

1년 물 선물환이 불과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1000원대에 진입한 것이다.

심각한 사태였다.

천우는 계속해서 렉스테리아를 추적, 관찰하고 있었는데 그들은 벌써 1년 전부터 꾸준히 투기를 준비해 왔던 것으로 파악되었다.

이 점조직 형태의 투기세력은 로이 조로스가 태국에서 삽질을 하고 있을 무렵, 원화 선물환투기 준비의 일환으로 오히려 홍콩과 싱가포르에 씨를 뿌리고 있었던 것이다.

NDF는 현물 통화를 거래하는 것이 아니라 선물환의 등락만큼만 이익금을 지급하는 형식으로 차액장사를 하는 시장이다.

한마디로 원화가 한국에서 출자되지 않아도 선물환을 거래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만약 NDF에서 홍콩, 싱가포르 딜러들이 투기가 조장할 경우엔 화폐의 몸통이 있는 한국까지 타격을 받을 수 있었다.

이 타격은 현물시장까지 뒤흔들기 때문에 작정하고 투기를 하고자 한다면 이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었다.

이는 대한민국의 경제근간을 아예 뿌리째 뽑아버릴 수 있는 일이기도 했다.

천우는 이 사건의 배후에 렉스테리아가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들이 움직이는 패턴과 방식, 모든 것이 일치했기 때문이었다.

허나 문제는 이런 거대한 환투기는 렉스테리아라는 자금 하나만으로는 절대로 불가능하다.

"조력자가 있다!"

천우는 CIA와 접선했다.

그들은 천우를 만나기 위해 한국까지 직접 날아왔고, 천우가 발견한 사실에 깊게 신음하였다.

올리비아는 짐짓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러니까···. 홍콩과 싱가포르의 환율시장에까지 깊숙이 침투할 수 있는 조력자들이 있다는 소리군요?"

"뿐만 아니라 아예 화폐의 주조국가에도 뿌리깊이 박혀 있을 겁니다. 그 시작이 미국의 재무부일 뿐인 거죠."

"우리는 일전에 곡물시장에서 그들을 찍어 눌렀을 때, 이미 끝난 줄 알았습니다만."

"저도 그런 줄 알았습니다. 더군다나 저는 로이 조로스까지 없으니 이놈들이 더 날뛰는군요."

필요악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다.

로이 조로스를 꺾어버리니 곧바로 치고 올라오는 놈들이 있지 않은가.

올리비아는 과연 이 사태를 어떻게 하면 좋을지 고민이었다.

"파면 팔수록 복잡한 사건이로군요. 재무부만 정리하면 되는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닙니다. 지금의 이 경우엔 재무부를 정리하는 것이 아니라 재무부에 미끼를 던져야 해결이 됩니다. 뿌리를 뽑지 않으면 아시아 전역에 디폴트가 시작될 겁니다. 그럼 미국의

손해도 만만치 않겠죠."

"으음!"

아시아 시장의 디폴트는 사실, 천우에게 있어선 엄청난 타격이라고 볼 수 있었다.

뜻하지 않게 천우가 일본, 태국 등과 너무 깊게 엮이는 바람에 연쇄적 디폴트는 곧 천우의 파산을 의미하는 일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는 이 기회에 아주 놈들에게 본때를 보여주기로 마음먹었다.

"저놈들이 환투기를 한다면 우리는 환율방어를 하겠습니다."

"하지만 저번과는 상황이 조금 다릅니다. 환율방어를 하기엔 한국이 가진 달러화의 물량이 너무나도 부족하다는 겁니다."

천우의 극약처방이 있었으나 한국은 여전히 빚더미에 앉은 형국이었다.

그나마 OECD진출을 포기하고 신흥공업국으로서 중국, 러시아로 진출하여 꾸준히 외화를 벌어들이고 있다는 점이 희망적일 것이었다.

'이정도면 그래도 전생에 비해서는 훨씬 나은 셈이지.'

대출금리 안정화를 비롯하여 대기업의 대대적인 구조조정이 있었기 때문에 천우에게는 승산은 충분했다.

이제부터는 원화투기를 방어하는 한 편, 아시아 전역에 걸친 방어라인을 펼쳐야했다.

"NDF에 연줄이 있으십니까?"

천우의 질문에 올리비아는 즉각 전화를 걸었다.

그녀는 CIA본부에 연결해서 NDF에 줄을 댈 수 있는지 물으려는 것이었다.

섭외는 단 5분 만에 끝났다.

"섭외 끝났습니다."

"···빠르시네요."

"아무튼 간에 섭외가 끝났으니 어떻게 하실 건지 말씀해주십시오."

천우는 A4용지에 쭈르륵 숫자를 적기 시작했다.

그는 지금 마샤의 시뮬레이터를 이용하여 자신이 환율방어에 나섰을 경우, 시장변동이 어떻게 될지 쭉 나열하고 있었다.

눈앞에 있는 데이터를 그대로 베끼고 있는 셈이었다.

그걸 보는 올리비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서, 설마 이거···."

"제가 앞으로 환율방어자금을 투여할 경우, 생겨날 시장변동추이입니다."

"허어! 이걸 혼자서 다 짜셨다고요?"

인간이 어떻게 이런 차트를 몇 초 만에 만들어 낼 수 있단 말인가.

머릿속에서 혼자 치고받고 싸우는 시뮬레이션이 단 몇 초 만에 가능하다는 소리인데, 올리비아는 도저히 이걸 보면서도 믿을 수 없었다.

차트의 앞부분만 봐도 이게 철저한 계산에 의해 나온 것임을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천우는 그녀를 보며 고개를 휘저었다.

"지금은 이런 것에 놀랄 겨를이 없어요. 중요한 건 말이죠···."

"크, 크흠!"

그는 빨간색 볼펜으로 그래프를 그리기 시작했고 그녀는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고 그에게 집중했다.

천우는 그래프를 그리면서 중간에 별표를 쳤다.

"이때, 떡밥을 던집시다."

"이때가 언제인데요?"

"제가 선물환 가격을 한 15원쯤 쳐 버릴 겁니다."

"네에···? 그럴 만한 물량이 어떻게 나옵니까?"

"나옵니다. 큰손이 우르르 달려들면 못 할 것도 없죠. 물론, 그저 한 방에 물량을 확 푼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도 저들처럼 점조직 형태로 움직이려는 겁니다."

"아아!"

"우리가 가격을 깎으면 저들은 손해입니다. 선물환 시장을 뒤흔드는 계획이 이번 한 번으로 끝나지는 않을 테니까요."

"그러니까, 저들이 가진 물량이 워낙 많아서 당신이 대가리를 쳐버리면 그대로 폭삭 주저앉을 것이란 말이군요?"

"그렇습니다. 아마 우리가 매수를 취하면 저쪽에서는 반대로 매도를 하려고 올라올 겁니다. 그럼 우리는 두더지잡기를 하듯이 그들을 때려잡으면 되는 거죠."

"하지만 그걸 어떻게 판별한단 말입니까?"

천우는 슬그머니 미소를 지었다.

"저는 가능합니다."

"······!"

"잡을 수 있어요. 저만 믿으세요."

그저 한 사람만 믿고 벌이기엔 판이 너무 커져버렸다.

허나 그녀는 천우가 이미 한 사람이라고 말하기엔 무리가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이 사람이라면!'

올리비아는 크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좋습니다. 한 번 해보죠!"

"NDF시장에 줄을 대서 점조직을 만들 수 있는 방안을 알아봐주세요. 저는 자금을 동원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저번 바트화 방어에서 보여주셨던 우방과 같은 구성으로 나아가실 겁니까?"

천우는 익살스럽게 웃었다.

"비밀입니다."

***

애덤 카퍼필드의 아파트 안.

아침부터 자신을 찾아온 체스터 카렐의 손자들 덕분에 애덤 카퍼필드는 아주 죽을 맛이었다.

"이제 와서 고모가 등장하다니! 고모가 다시 가문을 찾아올 일은 없을 것이라고 호언장담하지 않으셨습니까!"

"···진정들 하시죠."

"지금 진정하게 생겼습니까! 이미 체스터 카렐 투자와 센트럴 뱅크 계열의 세력 대부분이 고모에게로 붙었단 말입니다! 특히나 그 전 씨 일가에서는 천우인가 뭔가 하는 새끼와 배꼽

을 맞추는 사이라고 소문이 자자하더란 말이죠. 게임은 끝입니다!"

"누가 끝이랍니까? 아직 이사회의 절반이 우리 편입니다."

"그래요, 절반이 우리의 편이죠. 아직까지는 말입니다."

애덤 카퍼필드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으음, 아직까지는 이라는 말은 쓰지 맙시다. 그들은 누가 뭐래도 우리 편입니다. 잘 보세요."

그는 손가락으로 이 자리에 모인 네 사람을 가리켰다.

"나를 포함해 다섯 명. 벌써 다섯 자리는 확보되었죠. 그 나머지 세 자리는 누구의 것입니까?"

"우리 처가의···."

"처가가 배신하겠습니까? 당신들 부부관계는 그렇게 형편없습니까?"

"뭐, 그건 아니죠."

애덤 카퍼필드는 혹시 이럴 상황이 도래할까봐 체스터 카렐의 손자들을 일찍 정략혼으로 묶어버렸다. 그리고 기존의 이사회에서 한 사람씩 내쫓아버렸다.

그 중에서 가장 힘들었던 것이 바로 줄리아나 카렐이었다.

그녀를 내쫓기 위해서는 형제들을 이간질 시킬 필요가 있었는데, 애덤은 무려 15년 동안이나 철저하게 준비해서 줄리아나를 한국으로 내쫓아버렸다.

이건 그녀에게도 큰 상처가 되어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줄리아나 카렐의 시중을 들면서 스스로를 낮추며 살아왔고 그와 동시에 회사에서 두각을 나타내면서 전 회장이었던 리처드 카렐과 가까워졌다.

리처드 카렐은 다 좋은데 의심이 너무 많은 사람이었다.

그는 리처드 카렐이 끝도 없이 최충의를 의심하게 만들어서 줄리아나를 구석으로 몰아갔고, 결국 줄리아나 카렐의 형제들은 그녀를 남자에게 미쳐서 재산만 탐내는 여자로 낙인찍

어 버린 것이었다.

무려 15년 동안이나 그녀를 보필하면서 얻은 정보들로 증거를 조작하니, 형제사이가 틀어지는 건 시간문제였다.

고양이가 생선을 훔쳤다는 말이 사자가 암소를 뜯어먹었다는 말로 둔갑하는 건 순식간이었던 것이다.

그 이후에 외우내환을 스스로 자초하면서 이사회를 실각시켜 하나씩 쳐냈고, 지금에 이르게 되었다.

"저는 오늘을 위해서 여러분들의 처가에 이사회 3석을 준 겁니다. 의결권 세 개를 준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다들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피로 엮인 우호지분, 절대 떨어질 리 없는

동맹이라는 소리죠."

"으음!"

"그러니 다들 진정하고 돌아가시죠. 다음 정기이사회에서 어차피 우리가 이깁니다."

"만약 진다면요?"

"하하, 만약이라는 가정은 없습니다만 그래도 굳이 따진다면 주주총회에서 결정을 내면 됩니다."

애덤 카퍼필드는 자신이 있었다.

어떤 방식으로든 오금자와 그 자손들을 쳐내고 자신이 1등이 될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던 것이다.

'이 회사의 주인은 나다! 내가 이 순간을 위해서 바친 세월이 얼마인데!'

사람들은 애덤 카퍼필드가 중상모략의 대가라고 손가락질을 하지만 이 집안의 남자들은 안 그랬다.

이들은 그 중상모략이 모두 자신들을 위한 것이라고 철썩 같이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애덤 카퍼필드의 자신감은 그런 것에서 나오는 셈이었다.

꼭두각시들이 즐비한 회사, 그리고 그들을 자신이 틀어쥐고 있으니 질 리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반드시 이깁니다."

"헌데, 부회장님. 한 가지 의문이 있습니다."

"뭡니까?"

"우리 회사의 이사회는 총 17석이잖습니까. 그 중에 우리가 8석, 저쪽에 8석 차지했습니다. 그런데 그 나머지 한 자리는 어디로 갔습니까?"

애덤 카퍼필드는 슬그머니 미소를 지었다.

"하하, 별 걱정을 다하시네요. 그는 이미 실종된 지 오래입니다."

"실종이요?"

"제가 알아본 바로는 나머지 한 자리는 실종된 사람의 것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공석이라는 소리죠."

"아아! 그렇다면야."

애덤은 모든 것이 완벽하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자신의 관점에서만큼은 말이다.

< 44.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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