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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1월부터 지구를 단일통화권으로 하는 범세계 이동통신이 시작되었다.
또한, 개인휴대통신과 무선데이터통신, 위성방송 및 케이블TV의 전송망을 통한 인터넷 서비스가 본격 시작되었다.
가전시장에도 변화가 생겼다.
TV와 DVD(디지털비디오디스크), 인터넷과 PC통신 관련 상품과 VOD(주문형 비디오)를 뛰어넘는 3천개 이상의 채널을 가진 방송서비스가 시작된다고 주식시장이 들끓었다.
앨빈 토플러의 '제 3의 물결'이 설명했던 3차 산업의 물결이 밀물처럼 밀려들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미국의 닷컴주 고속성장과 맞물려 산업시장의 근간을 뒤흔들고 있었다.
1997년 10월, 대한민국에 PCS시장이 본격 개통되었다.
천우는 꽤 오래 전부터 대한민국의 전자시장과 통신시장에 거액을 투자하고 있었다.
지금의 PCS시장은 대략 7조원정도, 허나 여전히 한국은 후발주자로서 해외투자자들의 관심은 미비한 실정이었다.
허나 10년만 지나도 상황은 달라질 것이다.
한국의 CDMA기술이 전 세계를 재패하고 돌아올 것이기 때문이었다.
김영실은 현재 HC투자의 호재에 대해 차근차근 설명했다.
"미스릴 컴퍼니의 성장이 2년 사이 600%를 기록했습니다. 게임 산업에서만 500% 이상의 신장을 이뤄냈고 IT부문이 이제 막 고속성장을 시작한 것으로 파악됩니다."
"으음, 슬슬 IT버블을 타고 있군."
"버블이요?"
2000년, 미국은 내실의 부재를 껴안은 채 엄청나게 성장한 닷컴버블과 마주하게 된다.
이는 주식시장에서 회사의 내실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잘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허나 지금 김영실에게 그걸 설명해봤자 헛수고일 것이다.
지금 당장에야 미국의 증시가 한 방에 고꾸라질 것이라곤 아무도 생각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IT부문이 이제 막 활황이라는 거죠?"
"리어코스가 설립 1주년을 맞이해 전미를 휩쓸었습니다. 이제는 아시아 시장으로의 진출을 꾀하고 있죠. 포털 엔진 야호는 북미 동부지역에서부터 천천히 성장 중입니다. 이미 일본과의 계약도 채결했으나 서버구축에 약간 문제가 생겨서 주춤했습니다. 허나
일주일 내로 해결이 가능하답니다."
"구골은 어떻답니까?"
"구골은 이제 막 서버구축에 들어갔습니다. 아마 내년이면 정식서비스를 시작할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지금은 베타테스트 단계에 머물러 있답니다."
"으음, 그래요."
아직 시황은 제법 괜찮았다.
오늘 전까지는 말이다.
"다만, 27일 아침 뉴욕증시가 대폭락을 기록했습니다. 그러다가 어제 아침에 매물이 쏟아져서 다시 폭락장으로 돌입했었습니다만, 오늘 아침부터 천천히 회복세를 거듭하고 있습니다."
"으음. 유럽은 좀 어때요?"
"개장 초기부터 폭우처럼 매물이 쏟아져 단번에 10% 전후로 폭락한 상황입니다. 런던 증시의 경우엔 전날대비 9.5%가 떨어졌습니다. 전문가들의 말에 따르자면 최대폭락을 기록했다고 하더군요."
"독일은 한 10%쯤 떨어졌겠군요? 프랑스는 한 9%?"
김영실은 천우가 독일과 프랑스의 증시 폭락을 정확하게 맞추자, 이제는 질렸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헛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네, 맞습니다. 정말 귀신도 울다갈 예지력이시네요."
"증시를 읽는다는 건 불가능합니다. 그저 분석할 뿐이죠."
사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천우의 경우엔 이미 가지고 있던 지식과 현실을 대조해보는 수준이었다.
유럽의 경제취약국이라 불리는 스페인의 경우엔 14%까지 떨어졌고 러시아는 장이 시작되자마자 3시간 동안 거래가 중단되었다.
도쿄는 닛케이지수가 4.26% 빠져 16,312.69 포인트로 마감되었다.
일본은 매매주문을 일부 제한하여 임시주가안정조치에 들어가기도 했었다.
그건 홍콩 역시 마찬가지.
"홍콩 증시가 13.7%가 하락했습니다. 우리가 투자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말이죠."
"그래요. 하지만 문제는 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 태국 등지에서도 같은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죠."
그의 말대로 HC가 본격 투자를 감행했던 동남아시아까지 증시에 타격을 받았다는 것이 문제였다.
만약 천우가 태국시장의 외환위기를 방어해주지 않았다면 동남아시아는 진즉에 붕괴하고도 남았을 것이었다.
"그에 대한 대응책은 있습니까?"
"우선은 손절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손절가능성이라."
"아무리 일시적 하락국면이라고는 해도 이것이 현재 세계 경제시장을 대변하는 아주 좋은 지표라고 저희들은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녀의 말처럼 현재의 경제시장은 그다지 좋은 상황이 아니었다.
닷컴 시장의 호황은 그저 투자자들의 관심이 높아져 핫머니가 몰린 것 일뿐, 실질적인 내실은 거의 전무하다고 볼 수 있었다.
시가총액은 대기업을 찍어 누를 수준인데 매출이 그 발끝에 낀 때만도 못한 경우가 많았다.
이런 거품덩어리 시장이 미국에만 있다면 다행이지만 전 세계적으로 상황이 좋지가 못했다.
여기서 천우가 내릴 수 있는 결정은 두 가지다.
손절이냐, 버티기냐.
"HC가 버티기에 돌입한다면 얼마나 버틸 수 있죠?"
"글쎄요. 정확한 수치는 계산할 수가 없습니다만, HC의 경우엔 워낙 전 세계적으로 정계와 연줄이 많아서 쉽게 무너지지는 않을 겁니다. HC가 무너지면 그들도 같이 나자빠지는 것이니까요."
이제부터가 HC의 시험이 시작된 것이다.
과연 그들이 세계금융의 지주가 될 것인가, 아니면 증시호황만 만들어놓고 퇴장할 것인가?
모든 결정은 천우의 손에 달려 있었다.
"어떻게 할까요?"
"흐음."
천우의 고심이 깊어져간다.
바로 그때, 팩시밀리가 움직였다.
팩스의 내용은 현 증시폭락장에 대한 데이터였다.
이번에도 투기세력이 움직였다.
허나 분명한 것은 저번처럼 어떤 상징적 인물의 움직임보다는 단순히 글로벌 자본의 매수세가 폭락에 한 몫을 한 것이었다.
다만, 폭락장 사이에서 꾸준한 매입을 펼치는 세력이 있었다.
"이놈들이 의심된다, 이거지?"
렉스테리아는 천우의 마이너스 투자이론과 비슷한 행동양상을 보였다.
이번 대폭락에서 그들이 매물을 던졌을 확률이 높은 만큼 매입에 나섰을 확률도 높았다.
천우는 슬그머니 웃었다.
'한 번 해보자 이건가.'
그는 김영실에게 말했다.
"손절은 없습니다. 우리는 정면 돌파로 나아갑니다."
***
영국 캠브리지 대학교 고고학 교수 빌리 블루버그가 밥 윌러스와 마주앉아 있었다.
빌리 블루버그는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더러 사기에 동참하라는 말입니까?"
"그럼 돈을 어떻게 갚을 건데요?"
"그야···."
"먹물을 하도 많이 먹어서 이쪽으로는 머리가 잘 안돌아가나 본데, 렉스테리아는 사람의 장기정도는 점심식사자리에서 스테이크 썰 듯 갈라버리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게 당신 한 사람의 문제이면 상관이 없는데, 그들은 가족들을 일렬로 늘어놓고 산 채
로 배를 가를 겁니다. 그러고도 남을 놈들이에요."
"허어! 인간이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후후, 뭘 모르시네. 마피아를 인간으로 부를 수 있는 사람도 있다는 것이 신기하네요."
빌리 블루버그는 평생 공부만 해왔고 지금도 계속해서 공부만 하고 있던 사람이었다.
그는 어쩌다가 윌러스 탐사 팀과 엮여서 전 재산을 다 투자하고 빚더미에 앉았지만, 발굴의 목적은 순수한 학구열 때문이었다.
허나 빚더미에 앉아보니 세상은 열정만으로는 살아갈 수 없는 곳이었다.
"마피아는 자기가 받을 돈은 무조건 받습니다. 만약 돈을 회수할 수 없다면 그만큼의 공포를 보여줍니다."
"그렇다고 사람을 산채로 잡아다가 배를 갈라요?!"
"생각해봐요. 채무자의 사정을 다 봐주면 도대체 누가 돈을 갚겠습니까? 저 사람들도 저게 장사수완인 겁니다. 우리를 본보기로 보여줘야 돈을 빌린 놈들이 오줌을 찔끔 지리고 알아서 기지 않겠어요?"
"끄응!"
신음이 절로 나오는 소리였다.
허나 학자의 자존심에 무작정 사기에 발을 담글 수는 없었다.
빌리 블루버그는 눈을 질끈 감았다.
"···안 합니다!"
"뭐, 그럽시다. 다만 나중에 우리가 원금을 상환할 때에 당신의 이름은 없을 겁니다."
"뭐요?! 내가 투자한 지분이 있는데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밥 윌러스는 웃으며 욕설을 씹어뱉었다.
"후후, 이런 머저리 새끼를 보았나. 이봐, 안경잡이. 네 눈깔에는 지금 이 상황이 합법이나 찾을 상황으로 보여? 중요한 건 렉스테리아의 돈을 갚아주는 거라고. 합법은 그 이후에 혼자서 손장난 칠 때나 찾으라고. 알겠어?"
"···제기랄."
"선택해. 나중에 가서 복부 좀 봉합해달라고 사정하지 말고."
더 이상 피할 길은 없었다.
빌리 블루버그는 어쩔 수 없이 이들의 사기에 동참하기로 했다.
"···그래서 내가 뭘 어떻게 해주면 됩니까?"
"이제야 말이 좀 통하시네. 역시, 교수님이라 그런지 사리분별은 참 빠르시네요."
밥 윌러스는 테이블 위에 허위로 만들어낸 자료들을 올려두었다.
자료에는 초음파 장비와 방사능 장비를 동원해서 씩은 것으로 보이는 사진이 들어 있었다.
사진 속에는 해표면 안쪽 30미터 깊이에 금이 매장되어 있는 것으로 나와 있었다.
빌리 블루버그는 깜짝 놀라서 물었다.
"이게 말이 됩니까?! 그렇게 유속이 느린데 도대체 어떻게 보물이 배를 뚫고 나와서 해표면 30미터 아래로 들어갈 수 있단 말입니까?!"
"그거야 당신이 알아서 할 문제고. 좋잖아요, 미스터리! 희대의 미스터리를 당신이 풀어내는 겁니다!"
"제기랄···."
"당신이 약만 잘 쳐준다면 미국과 영국에서 대규모 펀드를 모집할 겁니다. 상자 안에는 블루사파이어와 같은 귀금속들이 넘쳐날 것이거든요."
"투자금은 이미 모았잖아요?"
"탐사라는 것이 원래 그렇잖습니까. 호재가 터지면 투자금은 추가로 모이게 되어 있어요."
빌리 블루버그는 머리가 지끈거리는 듯, 관자놀이를 꾹꾹 눌러댔다.
그런 그에게 밥 윌러스는 웃으며 말했다.
"원래 인상에 굴곡은 누구에게나 있는 겁니다. 당신은 지금까지 고생이라곤 아예 상상조차 해보지 않았던 사람이잖아요? 이 기회에 인생경험 좀 해보라고요."
"사기도 인생 경험에 속합니까?"
"그거야 생각하기 나름인 거고."
어쩔 수가 없었다.
밥 윌러스의 말재간에 놀아난 빌리 블루버그는 그 다음날부터 곧바로 사기를 도와주기로 했다.
그는 학교에 출근하자마자 동료들을 모아놓고 밥 윌러스가 가져다 준 자료들을 건네주었다.
그러자, 학자들은 잔뜩 흥분하기 시작했다.
"···지하에 보물이 묻혀 있다고요?!"
"이게 바로 최가 상단의 그 보물입니까?!"
빌리 블루버그는 떨떠름하게 웃었다.
"하하, 아직 파보지도 않았는데 그걸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럼 파봅시다! 탐사 팀은 어디서 뭐하고 있기에 아직 움직이지 않는 겁니까?"
"지질학은 자기들 분야가 아니라서 입을 닫고 있을 뿐입니다. 자료만 갖추어진다면 당연히 채굴에 나설 겁니다."
"그래요? 그럼 기다릴 것 없이 우리 대학의 교수들에게 부탁을 해봅시다. 지질조사 정도는 해줄 수 있잖아요?"
"그, 그건···."
"비용절감 차원에서도 그게 좋을 걸요? 저 사람들이야 땅이라면 환장하는 족속들이잖습니까. 장비만 지원된다면 인력비정도야 그냥 공으로 먹고 들어갈 수 있을 겁니다."
순간, 빌리 블루버그의 눈동자에 혜성이 떨어져 내렸다.
마치 운명적인 순간을 만난 것처럼 말이다.
'그래, 어차피 사기를 칠 것이라면 조금이라도 남겨먹고 잠적해야지.'
정직하고 우직했던 학자가 타락하는 건 정말이지 한 순간이었다.
< 43.(2) > 끝
ⓒ 풍류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