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2. >
42.
이른 아침, 천우는 뉴욕 센트럴파크를 거닐고 있었다.
그런 그의 곁으로 한 남자가 다가왔다.
CIA의 아론 테이트였다.
"코리안 슈퍼보이, 요즘 아주 잘 나가더군?"
"다 CIA덕분이죠."
"우리가 한 게 뭐 있나? 곡물투자 건도 자네의 수완 덕분에 생긴 사건인데 말이야."
"제안을 한 건 부장님이니까요."
그는 웃으며 명함을 건네주었다.
"이제는 부장 아니야. 실장이야."
"승진하셨군요!"
명함에는 기획실장이라는 직함이 떡하니 박혀 있었다.
한마디로 아론 테이트는 이제 CIA고위급 인사로 등용되었다는 뜻이었다.
"거물이 되셨네요."
"자네 덕분에 이곳저곳 들쑤시고 다니다보니 이렇게 되었지. 나야말로 자네에게 고마워해야 할 것 같은데."
그는 천우에게 파란색 삐삐를 건네주었다.
허나 누구나 아는 그런 흔한 삐삐가 아니라 사람 손가락 두 개 만 한 크기에 빨간색 발광다이오드가 하나 달려 있었다.
마치 GPS 위치추적 장치와 같다고나 할까.
"요원전용 호출기야. 수심 100미터 안에서도 전파가 터지도록 되어 있지. 평소에는 건전지를 빼놓고 있다가 위급상황이 되면 끼워서 쓰면 된다네."
그는 건전지와의 교류를 막아주는 플라스틱 막을 빼고 끼는 방법을 일러주었다. 그리고 배터리 박스 뚜껑을 꺼내어 삐삐의 몸통에 붙어 있는 돋보기를 꺼내어 보이며 말했다.
"이 돋보기로 뚜껑 안의 암호를 조합해서 전화를 걸면 돼. 지금은 97년 9월 23일이니까 1#6*5##45가 되겠군. 어렵지 않지?"
"그렇긴 합니다만 이걸 저에게 주셔도 됩니까?"
"자네는 이제 우리에겐 없어선 안 될 인물이 되어버렸으니까. 나름대로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랄까? 만약 도움이 필요하거나 제보를 건수가 있다면 알려줘. 혹시 납치를 당하거나 위급한 상황이 생긴다면 GPS를 켜면 되고."
나름대로 꽤나 신경을 쓰는 것 같았다.
허나 천우와 같은 인간병기가 누군가에게 납치를 당할 일이 과연 얼마나 있을까.
천우의 신체는 끝도 없이 진화한다.
AI가 진화하는 만큼 천우의 신체도 같이 진화해야하는 숙명을 타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 천우의 근육은 일반인의 근섬유와는 아예 질부터가 달랐고 무려 8배에 달하는 근력을 지니고 있었다.
뼈 안에는 다량의 철분 등이 함유되어 상당히 복잡한 구조의 결정을 이루도록 되어 있었다.
아마 공사용 망치로 때려도 절대 부서지지 않을 것이었다.
'뭐, 그래도 성의니까.'
천우는 삐삐를 받았다.
"감사합니다."
"별 말씀을. 뭐, 그걸 쓰지 않는 상황이 온다면 더 좋을 것이고."
아론 테이트는 아까부터 종이봉지를 두 개 들고 있었는데, 깜빡했다는 듯이 그 중에 하나를 천우에게 건네주었다.
천우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게 뭡니까?"
"오는 길에 샀어. 뉴욕에 왔으면 핫도그를 먹어야지."
"마침 식전인 걸 어떻게 아셨어요?"
"저번에 보니까 자네는 아침 일찍 식사를 하는 타입은 아닌 것 같더군. 무슨 특별한 이유라도 있어?"
"아침 공복이 머리가 훨씬 더 잘 돌아가니까요."
신체기관은 끝도 없이 연소하고 대사한다.
허나 공복 상태에서는 장기의 부담이 훨씬 덜해지기 때문에 AI가 할 일이 적어지게 된다.
때문에 천우의 나노머신은 아침의 공복 1시간 동안에 가장 활성화 되도록 설계가 되어 있다.
그러나 1시간 이후에는 급격한 칼로리 부족으로 체내의 글리코겐까지 고갈되기 때문에 최대한 빨리 고열량의 음식을 먹어주는 것은 필수였다.
천우는 거의 사람 팔뚝만 한 핫도그를 받아들었다.
"자네는 젊으니까 특대 형으로."
"맛있겠네요."
두 사람은 벤치에 앉아서 핫도그를 먹으며 대화를 계속했다.
아론 테이트는 천우가 먼저 만나자고 한 적이 처음이라 약간 의아해했다.
"항상 우리가 도움을 받는 처지였는데 이번엔 어쩐 일인가?"
"사실은 말입니다···."
천우는 아론 테이트에게 경영권 분쟁에 대한 얘기를 해주었다.
그는 재무부에 대한 로비 얘기를 듣더니 슬그머니 웃으며 말했다.
"더스틴 퍼거슨이라고 아나?"
"재무차관을 지냈고 지금은 차관보로 강등되어 일하고 있는 것으로 압니다."
"그래, 맞아. 차기 장관으로 거론되었다가 한 방에 주저앉고 말았지. 우리 CIA를 잘못 건드리는 바람에 말이야."
"아아, 혹시 저번에 그 재무부의 끄나풀이라던 사람이 더스틴 퍼거슨이었나요?"
"맞아. 바로 그놈이 우리의 끄나풀이었어. 하지만 하도 단물을 빨아먹으려고 해서 팔다리 다 자르고 아예 반병신으로 만들어서 좌천시켜버렸지."
CIA와 같은 정보조직은 어지간해선 건드리지 않는 편이 신상에 이롭다는 걸 더스틴 퍼거슨은 잘 모르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자, 그럼 어디 한 번 파헤쳐볼까?"
그는 CIA중앙지부로 전화를 걸었다.
"기획실장이다. 더스틴 퍼거슨의 자금상황을 종합해서 가지고 올 수 있도록."
아론의 한 마디에 CIA의 요원들이 무려 5분 만에 두툼한 서류뭉치를 들고 센트럴파크 한복판으로 달려왔다.
천우는 그의 위치가 어느 정도인지 실감할 수 있었다.
"와우, 기획실장의 힘이 이정도인가요?"
"그걸 등에 업은 사람이 자네인 셈이지."
그의 말 한 마디면 한 사람의 신상명세쯤이야 머리부터 발끝까지 탈탈 털어낼 수 있을 것이었다.
아론 테이트는 천우와 함께 두툼한 서류를 뒤지기 시작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천우가 전문가이니 아론 테이트는 그가 불러주는 계좌만 받아 적을 뿐이었다.
마샤는 통상적으로 사람이 생활에서 이용하는 경제활동 말고 약간 특이한 점이 있는 계좌들만 추려냈다.
무려 30페이지가 넘는 분석하는데 채 30초도 걸리지 않았다.
천우는 한 사람의 계좌를 특정 지었다.
"여기 있네요. 아메리칸 시티뱅크 계좌, 4456-***."
"역시, 빨라. 아주 빨라."
아론 테이트는 천우가 건네 준 계좌번호를 주머니 속에 잘 갈무리했다.
"그러니까, 이놈들이 로비하는 것만 막아주면 된다는 거지?"
"그런 셈이죠."
"하지만 그것만 가지고 되겠어? 아예 뿌리를 뽑아놔야지."
"뿌리를 뽑는다···."
그는 천우에게 200장 남짓한 서류뭉치를 건네주었다.
서류뭉치의 표지에는 'X와의 협력관계'라는 제목이 붙어 있었다.
"X, 여전히 활동하는 모양이로군요."
"이제는 점조직 형태로 흩어져버렸어. FBI의 말이, 인터폴과의 공조수사를 통해서 본체를 찾아내긴 했는데 소용이 없었다고 하더라고."
"점조직이 점조직과 결합해서 만드는 네트워크 형식의 조직인 모양이로군요."
"정확하군."
"골치가 아픈 녀석들이로군요."
"뭐, 아무튼 간에 그놈들이 최근 다시 활동을 재계했어. 알아보니 미국은 물론이고 한국, 일본, 중국, 러시아 등등, 아주 글로벌하게 뇌물을 뿌리고 다니고 있더군."
"허어, 고위층 인사와 접선하려고?"
"그런 셈이지."
그는 천우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해주었다.
"아무래도 재무부에 X와 접선하고 있는 사람이 있는 것 같아. 내 생각에는 퍼거슨 그 개자식인 것 같은데, 결정적인 물증이 없어."
"결정적인 물증이라."
"만약 자네가 퍼거슨과 X의 내통 증거를 잡아서 우리에게 토스 해 준다면 재무부 계열 로비차단은 물론이고 아예 로비를 못하도록 작살을 내주겠네."
"작살을 내주신다면···."
"그 부회장인가 뭔가 하는 새끼를 밑바닥부터 탈탈 털어 감옥에 보내버리면 되는 거 아닌가? 뭐, 그것으로도 안 된다면 아예 생매장을 시켜버리는 수도 있고."
방법이 어떠하든 확실한 효과를 보증한다는 CIA의 제안.
천우는 그걸 받아들이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좋습니다. 협조하도록 하죠."
"그래, 그래야 CIA의 파트너라 할 수 있지."
잠시 후, 공원으로 한 여자가 걸어왔다.
빨간색 머리에 초록색 눈동자, 마치 히어로 무비에 나오는 슈퍼우먼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178cm의 장신인 그녀가 아론 테이트에게 인사했다.
"부르셨다고 들었습니다."
"마침 왔군. 서로 인사들 하지. 이쪽은 우리 기획실 소속 올리비아 그린버드 요원, 이쪽은 슈퍼보이."
올리비아 그린버드는 마치 여전사와 같은 느낌이었다.
얼굴은 여성적인데 몸이 무슨 돌 같아서 악수를 나누는 자체만으로도 약간의 압박감이 있었다.
'아마존에서 왔나?'
그녀는 좀처럼 웃는 법이 없었다.
"그린버드입니다. 최천우 씨에 대한 얘기는 많이 들었습니다."
"그게 부디 좋은 얘기였으면 좋겠네요."
"대부분은 좋았습니다."
"대부분?"
"다 좋은데 약간 아웃사이더 기질이 있으시다고요."
아마도 친구가 별로 없어서 이런 말을 하는 것 같았다.
사실이니 기분 나쁠 것도 없었다.
"뭐, 그런 셈이죠."
"아무튼 간에 앞으로 자주 만나게 되실 겁니다. 협조 부탁드립니다."
"그러자고요."
아론 테이트는 웃으며 말했다.
"아참, 이건 그냥 노파심에서 하는 말인데. 그린버드 요원은 해병대 출신이야. 잘못 건드리면 작살나는 건 시간문제이니 찝쩍거릴 생각이면 각오하는 것이 좋아."
"그럴 일은 아마 절대로 없을 것 같은데요."
순간, 올리비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절대로···?"
"···뭐, 그렇다고 매력이 없다는 건 아니고요."
역시, 포스가 장난이 아닌 여자다.
***
윌러스 탐사 팀은 柰? 6냄? 만에 슥玲?? 실적을 올렸다.
고대 동아시아에서 사용되었던 양식의 깃발이 달린 아랍의 선단이 무더기로 발견된 것이었다.
정보통에 따르면 유럽에서 지중해를 거쳐 아랍, 그리고 인도를 경유하는 항로가 겹친다고 했다.
밥 윌러스는 흥분했다.
선단을 인양하기 전, 그 안을 샅샅이 뒤져 보물의 유무부터 확인해보기로 했다.
다시 6개월 후.
밥 윌러스는 고민에 빠져 들었다.
아무리 뒤져도 선단 내에는 아무것도 없었던 것이다.
정보통이 제공한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다면 이보다 더 정확한 위치에 선단은 있을 수 없었다.
허나 문제는 깡통만 있고 내용물은 없다는 점이었다.
"제기랄, 이를 어쩌면 좋나···."
"일단 인양이라도 해서 다시 뒤져보는 것이 어떨까?"
"···장난하나. 인양에 돈이 한두 푼 들어가나? 만약 그랬다가 정말 헛방을 치면 어쩌라고? 마피아에게 배를 갈려봐야 정신을 차리겠어?"
"끄응."
"지금은 도박을 할 형편이 아니야. 철저한 팩트, 그것이 없다면 움직일 수가 없어."
"제기랄, 그럼 어째? 이번에도 연극해서 사람들을 속일 거야?"
밥 윌러스는 이젠 정말 막장으로 몰려 어쩔 도리가 없었다.
바로 그때, 전화기가 울렸다.
따르르르릉!
그는 직감적으로 이 전화가 채권자라고 생각했다.
허나 받지 않는다면 몸통이 벌집이 될 지도 몰랐다.
"네, 밥 윌러스입니다."
-어째, 탐색은 잘 진행 되고 있나? 듣자하니 선단을 찾았다면서.
"그렇긴 합니다만 아직 탐색 중입니다."
-뭐야, 금이 없다는 거야?!
"아, 아니요! 금은 있습니다. 다만 그것을 발굴하는데 시간이 좀 걸리는 것뿐입니다."
-내 돈 가지고 장난 칠 생각이면 일찌감치 감수함 타고 태평양으로 나가는 것이 좋을 거야. 안 그러면 내가 네놈들의 모가지를 확 따버릴 테니까.
"그, 그럴 일 없습니다. 이제 곧 찾아낼 테니 걱정 마세요."
-마지막으로 기회를 주는 거다. 실망시키지 마.
전화는 끊어졌다.
허나 이제는 정말 발등에 불이 떨어지고 말았다.
"제기랄, 어쩌지?"
"일단 그 거북이 문양의 깃발이 어디서 온 건지부터 알아보자고. 그러면 최소한 금이 정말 있는지 없는지 정도는 알 수 있지 않겠어?"
"좋아. 이걸 가지고 영국으로 간다."
영국에는 중세 동양에 대한 전문지식을 다루는 학파가 존재하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동양과 영국의 혼혈들이었다.
윌러스들은 이곳에 다시 한 번 기대를 걸어보기로 했다.
< 4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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