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1.(2) >
41.(2)
불볕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던 9월.
뉴욕 플라자호텔 스위트 룸 안에는 오금자와 최호명, 천우가 나란히 앉아 있었다.
최충의가 세상을 떠난 이후, 이렇게 3대가 모이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잘 계셨죠?"
"그래, 오랜만이구나."
모자지간에 오랜만이라는 말이 나오다니, 최호명은 씁쓸하게 웃었다.
"우리 모자도 참 어지간하네요."
"미안하구나."
"아니요, 그런 말씀 마세요."
두 모자의 사이가 꼬여버린 것은 최호명이 중학생이던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의 최충의는 최호명에게 장남으로서의 기대가 컸고 최호명은 그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서 무던히도 노력을 했었다.
허나 최충의의 눈에 최호명은 그저 또래 아이들 사이에서 제법 공부 좀 하는 아이로 밖에 비춰지지 않았다.
그는 최호명을 더욱더 매정하게 몰아붙였다.
사실 최호명 정도면 국내에선 상위 0.1% 안에 드는 수재였다.
허나 최충의는 그를 완벽한 오너로 키우기를 바랐고 교과과정 이외에도 수많은 지식을 쌓고 시험하기를 원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최충의의 집착은 심해져만 갔고 최호명은 숨통이 턱턱 막혀서 아버지를 마주하는 것이 무척이나 겁이 났었다.
그는 어머니에게 구원의 손길을 요청했다.
허나 오금자는 모든 걸 그저 속으로 삭여버렸다.
남편이 왜 저렇게 자식을 완벽하게 키우지 못해 안달이 나 있는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최호명은 방황했다.
이제 더는 자신을 알아 줄 사람이 없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그래서 특전부사관으로 입대하는 엄청난 일을 벌였고 집안의 뜻과는 전혀 상관도 없는 여자와 결혼까지 했다.
최호명이 집안의 문제아로 자리를 잡아버리자, 두 모자의 사이는 점점 더 멀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허나 모든 건 시간이 해결해주었다.
아버지의 사후, 최호명은 많은 것을 깨닫게 되었다.
아이를 갖고 이 험난한 세상을 살아가면서 점점 부모의 마음을 이해하게 된 것이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여전한 어색함이 있었다.
그러나 둘 사이의 위화감이라는 감정은 어느 새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최호명은 오금자에게 앞으로의 청사진에 대해 물었다.
"외가를 어떻게 되찾으실 거예요?"
"전 씨 일가를 포함한 우호지분들을 매집하고 존과 손을 잡아야지."
"존이라. 그렇게 유약한 놈이 결단을 내릴 수는 있을까요?"
"오라버니도 뭔가 뾰족한 수가 있으니 존에게 경영권을 승계시켰을 거야. 그렇지 않았다면 이미 경영권은 무너져 내렸겠지."
체스터 카렐이 사망하기 전에는 최호명도 외가를 자주 드나들었었다.
그때 보았던 외백부를 그는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최호명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그 찔러서 피 한 방울 안 나올 양반이 아무런 대책 없이 존에게 경영권을 승계시켰을 리가 없죠."
그가 기억하는 외백 리처드 카렐은 정말이지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이었다.
허나 그만큼 철두철미하며 이해타산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수준의 수재였던 것이다.
"듣기론 저쪽에서는 완벽하게 준비를 해두었다니 한 번 만나보기나 하자꾸나."
"네, 알겠어요."
오금자는 최근 전 씨 일가와 꾸준히 접촉하고 있던 천우에게 꽤 많은 사실을 전해 들었다.
그녀가 우호지분 비율에서 승리를 예측할 수 있는 것도 천우 덕분이었다.
최호명은 천우에게 전미라에 대해 물었다.
"그나저나 그 전 씨 일가의 영애는 어떤 사람이냐?"
"엄마랑 할머니랑 반반 섞어놓은 느낌?"
"호오? 미인인가보지?"
"미인이죠. 현명하기도 하고. 얘기도 잘 통하고 취미도 많죠."
그의 얼굴에는 어느 새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최호명은 정말 더 이상 걱정할 필요는 없겠다 싶었다.
"최소한 센트럴 뱅크 계열 우호지분은 100% 확보가 되겠군. 네가 그렇게 헤벌쭉 하는 걸 보니 말이야."
"제가 언제 헤벌쭉 했다고···."
"짜식, 강적이네. 벌써 그 아가씨를 자기 사람으로 만들어 놓다니 말이야."
"그런 거 아니에요. 우리는 그냥 좋은 감정으로 지내고 있을 뿐이라고요."
원래 아들을 골려먹는 것이 취미였던 최호명에게 천우가 스무 살이 된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었다.
그는 아들의 옆구리를 쿡쿡 찌르며 말했다.
"수완 좋다? 진도는 좀 뺐냐?"
"그건···."
바로 그때, 인기척이 들렸다.
오금자는 웃으며 부자를 쳐다보다가 이내 말했다.
"왔나보다. 천우야, 문 열거라."
"네, 할머니."
천우는 성큼성큼 다가가 스위트룸의 문을 열었다.
그러자, 생긋이 웃고 있는 전미라가 보였다.
두 사람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저 보기만 해도 웃음이 나와서 딱히 무슨 말을 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마치 둘 사이의 시간이 멈춘 듯, 그들은 그저 웃기만 했다.
그런 그들의 뒤로 두 중년이 치고 들어왔다.
"자네가 천우 군?"
카렐 센트럴 뱅크의 대표이사이자 모회사의 이사회 일원인 전태중 사장이었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천우가 그에게 꾸벅 인사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최천우입니다."
"HC의 대표이사라지?"
"예, 그렇습니다."
"자네 활약상은 아주 잘 지켜보고 있네. 앞으로는 우리 체스터 카렐 센트럴 그룹을 위해 많은 일을 해 줄 것이라고 믿어."
그 뒤를 이어서 그룹의 제 2 부회장인 미하엘 슈베르트가 들어왔다.
미하엘 슈베르트는 체스터 카렐의 최측근이자 지금의 금융지주그룹을 만든 주역인 한스 슈베르트의 장남이었다.
이제는 상당히 연로해서 그 사후를 정리할 때가 되었다는 평이 지배적이었다.
허나 여전히 거동을 잘 하는 걸 보면 건강상에 큰 문제는 없는 것 같았다.
미하엘 슈베르트는 천우를 보자마자 무릎을 탁 쳤다.
"옳거니! 됐다, 됐어!"
그는 천우의 손을 잡더니 오금자에게 다가가 인사했다.
두 사람은 서로를 깍듯하게 대했다.
"아가씨, 됐습니다! 관상을 보아하니 이 청년이 우리 그룹을 살려주겠습니다."
"그래요? 부회장님께서 그리 말씀해주시니 너무 기분이 좋네요."
체스터 카렐은 생전에 '사람은 관상 따라 간다'라고 말하곤 했었는데, 결국 그건 첫 인상이 모든 것을 좌우한다는 뜻이었다.
일동은 나란히 소파에 둘러앉았다.
전미라는 그들의 앞에 다음 정기이사회에서 줄리아나 카렐을 신임회장으로 추대한다는 결의안을 내놓았다.
이 결의안에 서명한 사람들은 총 8명, 이사회의 총원 17명 중 과반수에서 한 명이 빠지는 인원이었다.
전태중은 현재 상황에 대해 설명했다.
"저와 부회장님을 포함한 친 줄리아나 카렐 세력이 8명입니다. 카렐 가문의 후손들이 나머지 8석을 차지하고 있고 남은 한 자리는 영국계 사모펀드인 이스트우드에서 쥐고 있습니다."
"이스트우드!"
설마하니 이스트우드에서 이사회의 일원으로 등록되어 있을 줄은 미처 몰랐던 천우였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게임은 해보나 마나였다.
허나 여기에 변수가 있었다.
바로 미국정부와 외부세력들이었다.
"이사회에서는 결의가 될 것 같기는 한데, 주주총회가 문제입니다. 저쪽에서 상무부와 재무부 사이를 오가면서 뭔가 긴밀히 로비를 하는 것으로 파악됩니다."
주주들은 결국 재화창출을 위해 돈을 투자한 사람들이다.
지금과 같이 승계구도가 팽팽한 접전으로 들어선 시점에서는 정부에 대한 영향력이 높은 쪽이 우세할 수밖에는 없다
미국의 정책 하나가 수 백 억, 수 천 억 달러의 가치를 갖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거대주주의 대부분은 사업가들이다.
그들에게 유리한 제도, 법안 하나만 상정한다고 기조만 내비춰도 그 주식이 들썩거릴 정도이니 로비를 한다면 주주보다는 차라리 정부에 하는 것이 나을 지도 몰랐다.
허나 저들이 한 가지 모르는 것이 있었다.
최호명의 절친한 친구이자 비즈니스 파트너가 상무부의 핵심세력이라는 사실 말이다.
"상무부라. 헛돈을 쓰고 있군."
얼마 전, 미국 상무부장관이 건강악화로 인해 사임하였다.
제이미 골드너가 그 뒤를 이어서 장관후보로 거론되고 있는 가운데 경쟁자인 윌리엄 페로가 부하직원과의 성추문 스캔들로 몸살을 앓고 있었다.
한마디로 상무부장관 자리에 제이미 골드너가 앉은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상무부장관에게 로비를 해서 그를 자신의 편으로 만든다고 해도 그 기관에 대한 이해와 정책적인 이해가 없이는 로비를 하나마나입니다. 저들은 그걸 모르고 있네요."
"으음!"
"상무부 얘기는 논외로 쳐도 될 듯합니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재무부 문제였다.
재무부에서 사람 잡는 정책만 구축하지 않는다면 회장승계는 당연히 오금자 쪽으로 넘어올 것이다.
이제 드디어 천우가 나설 차례였다.
"로비만 막으면 우리가 이기는 건가요?"
"그렇다고 볼 수 있지."
"으음, 그렇다면···?"
천우의 머리가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
리비아의 수도 트리폴리 연안에 탐사선 두 척이 정박되어 있다.
미스라타 남부에는 이들과 광대역 무전통신을 교신하는 기지가 있었고, 그들이 탐사 팀을 진두지휘하는 형식으로 탐사가 진행될 예정이었다.
이 탐사 팀의 이름은 윌러스.
최근 3년 동안 지중해에서 발견되었던 수많은 난파선을 인양한 유물발굴계의 신성이며 현재 기록된 난파선 인양 규모 중에 가장 큰 프로젝트를 성공시켜 화재를 모은 바 있었다.
그들이 끌어올린 금의 양만해도 4억 달러 남짓, 그 밖의 유물들까지 합친다면 가히 천문학적인 수익을 놀렸다고 볼 수 있었다.
그들은 이번에도 금을 찾아 떠난다고 언론에게 밝혔다.
윌러스는 자신들이 찾은 단서에는 금이 15톤에 다이아몬드를 비롯한 각종 귀금속에 생선궤짝으로 12개나 된다고 나와 있었다고 밝혔다.
그 직후 탐사에 투자하겠다는 사람들이 벌떼처럼 몰려들었고, 그들은 탐사펀드까지 개설하기에 이르렀다.
이제는 세계 최대 규모의 탐사 팀이 지중해를 뒤지고 다니는 진풍경이 벌어질 예정이었다.
찰칵, 찰칵!
사람들은 정박된 선박 두 척을 사진기로 열심히 찍어대며 이번 탐사에 대한 대중들의 관심이 얼마나 높은지 알려주고 있었다.
탐사 팀의 팀장 밥 윌러스는 깊고 진득하게 담배를 한 모금 빨아내며 창밖을 주시하였다.
"후우···. 확실한 건이겠지?"
"182 대 1이면 해볼 만 한 것 같은데."
"실패하면 우리 모두 다 죽는다. 알고는 있겠지?"
사실, 밥 윌러스의 탐사 팀은 알려진 것과는 약간 차이가 있는 조직이었다.
그들은 수 억 달러의 돈을 벌어들인 청년갑부들로 알려져 있었지만 실상은 그와 비슷한 액수의 빚을 진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첫 번째 탐사에서 금 1톤을 건져 올리긴 했지만 실상 그걸 팔아봤자 탐사비용의 1/10도 채 해결하기 힘들었다.
탐사를 계속하면 할수록 윌러스의 빚은 점점 쌓여만 갔고, 마침내 그들은 대량의 가짜 금을 동원해서 발굴 및 탐사 사기를 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들의 명성과 업적 모두 3년 째 사기로 이뤄낸 것들이며 그들이 쓰는 돈도 모두 다 빚더미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다가 재수 없게 마피아와 채권관계로 엮이고 말았다.
은행에서 윌러스 관련 채권을 정크본드로 취급해서 그것이 이탈리아 마피아의 손에 들어간 것이었다.
마피아는 내년 초까지 이자 및 원금을 상환하지 않으면 배를 갈라서 그 돈을 받아가겠다고 협박했다.
그들은 한다면 하는 사람들이다.
밥은 일생일대의 도박을 해보는 수밖에 없었다.
조선의 보부상이 지중해에서 향신료 값으로 금은보화를 받아서 돌아가다가 난파되었다, 그것이 바로 이들이 가진 단서였다.
그 후보지역은 총 182개, 이중에서 하나만 맞는다면 한마디로 복권이 터지는 셈이었다.
"우선 연안지역부터 쭉 훑어보자고."
"오케이!"
드디어 탐사 팀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 41.(2) > 끝
ⓒ 풍류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