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1. >
41.
그녀의 집은 1층이 주차장 및 창고형식으로 되어 있었고 2층부터 거주공간이 마련되어 있었다.
뚜벅, 뚜벅···.
계단을 따라 올라가는 내내 두 사람 사이에는 정적이 흘렀다.
도대체 이런 숨 막히는 정적을 경험해 본 적이 얼마 만이란 말인가.
'···내가 원래 이런 숙맥이었나?'
천우는 잘못하면 심장소리가 너무 크게 들릴까봐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할 정도였다.
아마 20년 만에 큰 일(?)을 치를 생각을 하니 긴장이 되는 모양이었다.
정적을 깬 건 그녀의 목소리였다.
"집이 좀 누추하죠?"
"아닙니다. 아담하고 좋은데요."
"예전에 노총각 미군이 살았던 곳이라고 하던데, 제법 관리를 잘해놓아서 지금은 그냥저냥 인테리어만 살짝 해서 살고 있어요."
계단을 따라서 올라간 두 사람은 2층의 현관문을 열었다.
그러자, 순백의 벽지와 까만 테두리의 몰딩이 조화를 이룬 아주 모던하고 깔끔한 인테리어가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쑥스럽게 웃었다.
"제가 취향이 좀 남성스럽죠?"
"깔끔한 게, 아주 도시적이네요."
뭔가 말을 더 이어가고 싶은데 긴장해서 자꾸만 기계적인 칭찬만 나왔다.
뭐 어쨌든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뭐 드실래요? 와인도 있고 맥주도 있어요."
"수, 술이요?"
"아아! 술은 좀···."
"아닙니다! 저, 술 좋아합니다!"
흔히 이런 경우를 두고 '나이스 타이밍'이라고 한다.
남산에서 분위기가 제법 좋았는데 술 한 잔이 들어간다···.
천우의 머리에 오만가지 잡생각이 다 들기 시작했다.
그녀는 천우를 소파에 앉혀놓고 주방으로 들어가서 마실 것을 준비했다.
그러는 동안 천우는 멀뚱멀뚱 앉아서 집안을 둘러보았다.
-채취로 보아 수컷의 출입은 없었던 것으로 파악됩니다.
'···제기랄, AI는 그런 것도 알 수 있어?'
-나노로봇에는 후각을 이용한 추적 기능도 탑재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잊으셨나본데, 저는 원래 군사용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아아, 그랬었지.'
전천후 육상병력을 생산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마샤는 어지간한 기능은 전부 탑재가 되어 있었다.
만약 이대로 천우가 스파이 노릇을 한다거나 후방침투작전에 투입된다고 해도 아마 전혀 손색이 없을 터였다.
-축하드립니다. 드디어 호르몬 밸런스를 맞출 수 있겠네요. 욕구불만으로 인한 스트레스도 상당히 줄어들 것이고요.
'쓸데없는 소리.'
천우가 마샤와 입씨름을 하고 있는데 전미라가 와인을 들고 나왔다.
"집안을 구경하셔도 괜찮은데."
"아, 아닙니다."
그녀는 와인의 마개를 따서 길쭉한 유리병에 따른 후, 그것을 디켄딩하였다.
침전물을 걸러내는 타이밍을 잘 잡아서 불순물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이정도면 어지간한 소믈리에 저리 가라 할 수준이었다.
"와인을 좋아하시는 모양입니다."
"어려서부터 와인과 맥주를 배웠어요. 이건 제가 프랑스에서 받아온 품질 좋은 포도를 가지고 직접 만든 것이랍니다."
"의외의 취미를 가지셨네요."
"취미라기보다는 집안에서 가르치는 걸 배우다보니 저절로 좋아하게 된 것이랄까요? 이제는 한국의 전통주도 한 번 배워볼까 싶네요."
천우는 사교에 가장 좋은 건 술이니 재벌가 중에선 어려서부터 와인을 가르치는 집안이 종종 있다는 소리를 들어본 적이 있었다.
그런 사람을 직접 만나본 적이 처음이라 조금 낯설긴 했지만 그리 나쁘지는 않았다.
"한 잔 할까요?"
두 잔이 다 차올랐음으로 천우는 거침없이 술잔을 쭉쭉 비워냈다.
꿀꺽, 꿀꺽!
분명 명주라곤 할 수 없지만, 상당히 풍미가 대단한 와인은 틀림이 없었다.
천우는 저절로 감탄사를 뻗어냈다.
"우와, 좋은데요?!"
"마음에 드신다니 다행이네요. 사실, 제가 담근 와인을 누군가에게 대접하는 건 처음이거든요."
"이정도면 돈 받고 팔아도 되겠는데요?"
"···그 정돈 아닌데. 비행기를 태우시면 진짜인 줄 알잖아요."
"진짭니다. 나중에 출시되면 연락주세요. 제가 1호로 제일 먼저 사겠습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고 하였다.
그녀는 천우가 칭찬을 하니 한껏 신이 난 모양이었다.
"사실은 제가 또 다른 취미가 있어요. 한 번 구경하실래요?"
"취미는 많을수록 좋죠. 갑시다."
전미라는 겉은 쇠로 되어 있고 안쪽은 유리로 된 다소 특이한 텀블러에 와인을 채워서 천우에게 건네주었다.
고개를 갸웃거리는 천우에게 그녀가 머쓱한 표정으로 말했다.
"···영화를 볼 때나 야구경기를 관람할 때 이렇게 마셔요. 이상한가요?"
이렇게 단아한 술꾼이라니.
천우는 너무나도 의외였지만 그 모습이 상당히 매력적이라고 느꼈다.
"귀엽네요."
"그, 그래요?"
"원래 남자들은 이런 거 좋아합니다."
"다행이다! 저를 이상한 여자라고 생각하면 어쩌나 하고 고민했어요."
"그럴 리가요."
그녀의 깜찍한 음주습관 덕분에 분위기는 훨씬 더 매끄러워졌다.
각자 텀블러를 하나씩 들고 1층으로 내려갔다.
안 그래도 천우는 도대체 1층에는 뭐가 있기에 주거공간을 2층과 3층으로 올렸나 싶기는 했었다.
주차장에는 소형차가 한 대 서 있었고 그 옆으로는 뭔가 대단한 두께의 철문이 자리 잡고 있었다.
"잠깐 이것 좀 들어주실래요?"
"아, 넵!"
그녀는 철문에 달려 있는 원형 손잡이를 잡고 그걸 낑낑거리며 돌리기 시작했다.
끼릭, 끼릭, 쿠웅!
무슨 금고라도 여는 사람 같았다.
"휴우, 다 됐다!"
"이 안에 뭐가 들어있기에 그러십니까?"
"제 보물들이요!"
"보물?"
백문이 불여일견, 그녀는 자잘한 설명보다는 천우를 그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그러자, 그 안의 전경이 천우를 압도하듯 들어왔다.
"어, 어어···?"
곰삭은 종이냄새와 큼큼한 잉크향이 조화를 이루는 이곳.
여긴 바로 고서적들을 모아놓은 자료실이었던 것이다.
"이걸 다 옮기는데 만 3개월이 걸렸어요."
"우와, 이걸 당신이 직접 모은 겁니까?"
"14살 때부터 지금까지 보았으니까 한 6년 모았네요."
양피지로 된 고서적부터 16세기의 소설에 이르기까지, 정말 다양한 책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다만, 천우네 집과 다른 점이 한 가지 있다면 전미라는 동양의 서적은 거의 취급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서양의 서책을 좋아하시나봐요?"
"그건 아닌데, 제가 다니는 옥션에서는 동양서적의 매물이 극히 적어서 구하기가 힘들어서요. 그래서 취미를 서양의 고전으로 정하게 된 거죠."
서책들의 보관상태가 상당히 좋았다.
어떤 책은 무려 700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곰팡이 하나 슬지 않은 채로 잘 보관되어 있었다.
만약 그녀가 고서적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었다면 기껏 옥션에서 좋은 물건을 구했어도 금세 망가지고 말았을 것이다.
거의 전문가수준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그녀의 고서 사랑과 열정은 대단하다고 볼 수 있었다.
"정말 다재다능하시네요."
"그냥 어려서부터 아버지를 따라다니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그리 되어버렸네요."
"사실은 저도 독서를 좋아합니다. 우리 집에는 가문 대대로 전해져 내려오는 고서적들이 많은데, 그걸 읽는 것이 제 유일한 취미입니다."
"어머, 정말요? 한양 최 씨의 가보들이라면 그 가치가 대단하겠네요!"
"전문가는 아니라서 정확한 가치는 잘 모릅니다만, 제 개인적으로는 그 어떤 물건과도 바꿀 수가 없죠. 사실, 제가 굳이 한국인 국적을 포기하지 않은 것도 가문의 땅과 저 책들 때문이니까요."
"대단하시네요! 가문의 혼을 위해 스스로를 희생하시다니요."
"하하, 그냥 단순히 선택을 한 것뿐입니다. 희생처럼 거창한 건 아닙니다."
"어쨌건 간에요. 이중국적을 가진 사람도 많고 아예 미국의 시민이 되는 사람도 많잖아요. 우리 가문만 해도 뿌리는 한국이지만 집안사람들 모두가 미국의 시민 권자거든요."
천우는 작게 뇌까리듯 말했다.
"뭐, 그런 것도 있지만···. 우리 할아버지의 유언이기도 했습니다."
"아아!"
"저는 장손으로서 할아버지를 포함해 조상님들을 실망시키기 싫습니다. 그래서 이 저택을 죽을 때까지 지키며 살기로 결심했고, 그럴 수 있을 힘도 키운 겁니다."
조고의 얘기가 나오자, 천우의 표정이 약간 어두워졌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그런 천우의 손을 잡았다.
"대단해요. 당신보다 멋있는 사람은 만나본 적이 없어요."
"고맙습니다."
"진심이에요. 사실, 저는 당신이 겉모습만 멋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지 그 속까지는 깊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거든요."
시각적인 딜레마라고나 할까.
천우는 겉모습이 워낙 번지르르해서 그 내면을 보는 사람은 그리 많지가 않았다.
허나 전미라는 달랐다.
그녀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당신은 HC라는 세력을 이끌 만한 자격이 있어요."
"그리 봐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두 사람은 자신들도 모르게 손에 힘을 주었다.
그런 어느 시점에 스스로 상대방의 손을 잡고 있다는 걸 인지했다.
"······!"
그제야 두 사람은 이곳이 밀폐된 공간이고 이 넓은 집에 자기들 두 사람 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마도 마샤가 천우에게 얘기했었던 페로몬의 주파수가 절정에 이르는 순간이 아닌가 싶었다.
극도로 미묘한 분위기.
'지, 지금인가!'
***
이탈리아 밀라노의 번화가.
시끄러운 클럽의 음악소리가 사방천지를 진동시키고 있었다.
클럽은 강변의 방죽을 앞에 두고 있었는데, 한 남자는 방죽에 걸터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킁킁, 이놈의 비염."
그는 큼큼해 진 코를 연신 킁킁거리며 투덜거렸다
바로 그때.
부아아아앙!
빨간색 스포츠카가 남자를 향해 돌진해왔다.
"···어, 어어!"
아마도 스포츠카의 차주는 속도를 줄일 생각이 전혀 없는 모양이었다.
남자는 그대로 얼음이 되어 눈을 질끈 감을 수밖에 없었다.
끼기기긱!
다행이도 차가 멈추기는 했다.
허나 제동거리에 한계가 있었기에 잘못하면 남자를 치어서 방죽 밖으로 날려버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이런 제기랄!"
그제야 남자가 찔끔 움직였다.
그래봤자 두 다리를 쫙 벌리고 엉덩이로 꾸물꾸물 기어서 뒷걸음질을 치는 정도였다.
정말 1mm의 간격을 남긴 채 차가 멈추어 섰다.
차창이 내려가면서 한 여자가 고개를 쑤욱 내밀었다.
"놀랬어?"
"···이런 미친! 내가 이런 장난 좀 치지 말라고 했잖아!"
"네 인생이 워낙 지루해서 내가 좀 신나게 만들어 준 거야. 재미없었어?"
"개소리하고 자빠졌네!"
"뭐, 아무튼 간에 안 다쳤으면 된 거 아닌가."
"···쓸데없는 소리 그만 지껄이고 물건이나 가지고 와."
그녀는 싱긋이 웃으며 대시보드에 놓여 있던 두툼한 서류뭉치 한 권을 남자에게 건네주었다.
그제야 그의 얼굴이 약간 펴진 것 같았다.
"확실한 거지?"
"작업하기 싫으면 그냥 싫다고 말해."
"그럴 리가 있나!"
서류뭉치에는 지중해의 지도와 함께 182개의 좌표가 들어 있었다.
남자가 물었다.
"이 중에 진짜 골드 넘버가 있다는 거지?"
"물론."
"확률은?"
"182:1, 적어도 하나는 진짜라는 것이 증명되었어."
"좋아, 작업을 시작해보자고."
그의 얼굴에는 어느 새 탐욕스러운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 41.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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