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0.(2) >
40.(2)
늦은 밤, 싱가포르.
마이클과 줄리아는 벌써 위스키를 몇 병이나 비워냈다.
허나 그들은 취할 줄을 몰랐다.
"그러니까, 불법 대출 브로커 노릇을 대통령 차남이 한 거네?"
"그런 셈이지. 그런데 문제는 그게 다가 아니야."
"···이거 말고 뭐가 더 있다고?"
그는 줄리아에게 '기밀'이라는 빨간색 도장이 찍힌 한국은행의 문서를 건네주었다.
문서 안에는 놀라운 사실들이 기술되어 있었다.
"안기부에서 슬쩍하려던 게 중간에서 새버렸어. 덕분에 나만 대박 맞은 거지."
"말도 안 돼!"
문서 안에는 현직 대통령이 여당의 총수로서 정치권에 CD를 돌린 정황이 나와 있었다.
한국은행에서는 최근 수임자와 그 목적을 알 수 없는 대량의 CD가 유통되고 있다는 것을 포착하였고, 이에 따른 초동수사를 시작하였다.
안 그래도 최근 OECD가입이 연기되는 바람에 정부의 심기가 매우 불편한 통에 어떤 수상한 놈이 비자금을 꼬불치겠다고 설치는 걸 막아내려는 것이었다.
게다가 급격한 금리인하로 인한 부작용으로 필요 이상의 인플레가 우려되는 시점이었기에 한은은 조금 더 기민하게 움직일 필요를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비자금을 꼬불치려던 설치던 수상한 놈이 바로 대통령이었던 것이다.
"만약 이게 임기 내에 터지면 어떻게 되는 거야?"
"당연히 탄핵감이지."
"허어!"
"현 시국에 탄핵은 좀 힘들 거고, 적어도 하야를 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지지 않을까?"
현 정치권의 행보로 미뤄봤을 때에야 대통령의 발등에 불이 떨어지긴 했었다.
김용필이 여당에서 탈당하여 새로운 당을 창당하였고, 그 여파로 인해서 여당 내 새로운 파벌이 생겨났다.
이 파벌이 다시 분가를 선언하였고 결국엔 대통령의 여당이 사분오열되는 대참사가 벌어진 것이다.
이대로는 당의 존립 자체가 불투명한 상태였다.
정권유지는 고사하더라도 세력 유지만이라도 하자면 여야를 막론하고 비자금을 미친 듯이 뿌리는 수밖에는 없었던 것이다.
"그럼 결국 뭐야, 대통령 부자가 쌍으로 X맨 짓거리를 하고 있었던 거네?"
"비유가 아주 적절한데."
"···막장인데 정말?"
"아무튼 간에 나는 지금 이걸 터트릴까 말까 고민 중이야. 내 생각엔 미국 자금시장 쪽에서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는 게 아닌 가 의심되거든."
무슨 일이든 먼저 깃발을 꼽는 쪽이 유리하다.
허나 이 경우엔 좀 달랐다.
다른 것도 아니고 현직 대통령이 걸린 일이 아니던가.
만약 여기서 판단을 잘못 내려버린다면 아예 초년부터 인생이 꼬여버릴 수도 있었다.
줄리아는 마이클이 걱정되었다.
"그냥 적게 먹고 적게 싸는 것이 어때?"
"나도 그러고는 싶은데···."
대학을 다닐 때부터 조용했던 마이클, 하지만 그는 그만큼 가슴 속에 품었던 야망이 상당히 컸다.
만약 그 야망을 컨트롤 할 수 없다면 마이클의 인생은 여기서 종 칠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녀는 마이클에게 일단 고삐를 채워야겠다고 생각했다.
"우선 천우한테 연락해보는 게 어때?"
"천우? 으음, 그놈은 잔소리가 심해서···."
"그래도 친구 좋다는 게 뭐야?"
나이는 가장 어리지만 여기서 천우보다 시장과 국제정세에 대해서 잘 아는 사람은 없었다.
심지어 그는 몇 수 앞을 내다보는 혜안을 가진 사람이 아니던가.
허나 마이클은 쉽사리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천우라면 당연히 노발대발하면서 이쯤에서 그만 접으라고 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놈이 끼면 파도를 타보기도 전에 배에 태우려고 할 텐데.'
생각에 잠긴 마이클.
따악!
별안간 그의 이마에 줄리아의 손바닥에 날아들었다.
"뭐, 뭐하는 짓이야?"
"어설프게 짱구 굴리지 말고 당장 천우한데 연락하자."
"끄, 끄응."
어쩔 수 없었다.
워낙 오래 알아온 사이라 서로의 눈빛만 봐도 아는 그들이었기 때문이다.
"친구가 걱정되어서 하는 말이야. 정신 차려. 의욕만 앞서선 이득보기 힘들어. 만약 잘못해서 안기부에서 CIA와 공조라도 하면 어쩔 건데? 그 사람들 눈에 우리 같은 피라미들은 그냥 뜰채로 떠서 버리면 그만인 것들이야."
"···꼭 그렇게 촌철살인을 해야겠어?"
아무리 위험한 일이라도 천우가 끼면 달라진다.
줄리아는 천우가 어느 새 거대한 산이 되었음을 강조했다.
"때론 조금 기대도 괜찮아. 천우한테 연락 할 거지?"
"그래, 할게."
사실, 마이클도 잘 알고 있었다.
이렇게 큰 아이템은 자신을 죽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두 사람은 날이 밝으면 천우에게 연락하기로 했다.
***
전미라는 천우의 생각보다 더 괜찮은 사람이었다.
친절과 배려가 몸에 배어있었고 말 한마디에도 무척이나 신중을 기하는 타입이었다.
천우가 전미라와의 대화에서 느낀 것은 '현명하다'라는 것이었다.
굳이 따진다면 오금자의 미니버전 정도랄까.
그녀는 천우와의 식사를 끝내고 잠시 산책을 하자고 제안했다.
두 사람은 남산 일대를 거닐며 얘기를 나누었다.
전미라는 아까부터 체스터 카렐 센트럴의 대통합이 갖는 의의에 대해 설명하고 있었다.
"체스터 카렐 센트럴은 2차 세계대전과 월남전을 겪으면서 엄청나게 성장했어요. 그런 만큼 미국의 정부 각처는 물론이고 해외에도 수많은 이해관계가 엮여 있죠. 줄리아나 카렐님은 체스터 카렐의 자식들 중에서 유일하게 생존한 사람이잖아요? 그만큼 대외
적인 공조에 있어서 전통성을 내세우기 좋을 겁니다."
체스터 카렐이라는 이름으로 맺어진 협약이나 밀약이 많은 만큼 오금자의 존재가치는 상당히 높다고 볼 수 있었다.
그런 이유로 천우가 HC투자의 대표이사로서 이렇게까지 성장했다는 것은 체스터 카렐 센트럴에겐 크게 기뻐할 일이었다.
천우는 그녀가 가진 청사진이 어떤지 궁금했다.
"정확하게는 어떻게 우리가 승리할 수 있는 겁니까?"
"우선 존 카렐 회장이 생전에 줄리아나 카렐님을 등판 시킬 겁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를 포함한 우호지분이 그분에게 몰릴 것이고 최호명님 부자가 협력세력으로 등장하면 게임은 끝입니다. 지분비율로 보나 지지율로 보나 우리가 압승입니다."
"변수는요?"
"어떤 일이든 변수는 있기 마련입니다. 허나 그 변수를 막을 수 있는 것은 대외세력과의 연계성이 되겠죠."
"대외세력과의 연계라."
"록 베넷이나 토플러 마빈스와 같은 세력도 무시할 수 없는 요인 중 하나에요. 그들은 재계의 중추입니다. 이 바닥이 생각보다 정통성을 잘 따지는데, 그들이 후계자의 정통성을 인정하게 된다면 대외적으로도 승계명분이 생기는 거잖아요?"
"재계의 대부분이 그렇다고 인식한다면 확실히 승계싸움에서 더 유리할 수 있겠네요."
"그건 승계 이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당신은 우리에게 있어선 가장 큰 호재라고도 할 수 있겠네요."
"그런가요?"
"아무튼 내부적으로는 지분싸움에서 이기고 대외적으로는 명분싸움에서 이기면 우리는 압승입니다. 그 변수는 당신과 내가 줄여나가야 하는 거고요."
"이것 참, 어깨가 참 무거운데요?"
"앞으로 당신의 역할이 상당히 중요해요. 통합 이후, 회사 안팎을 잘 아우를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한데, 당신이 그 역할을 해주었으면 좋겠어요."
"제가요?"
"센트럴 뱅크의 세력의 중추는 대부분 카렐 학파의 영향을 많이 받았어요. 지금이야 타락했지만 결국 카렐 가문 역시 창립주의 후손인 것을 부정하지는 않을 겁니다. 어떻게 해서든 정통성을 인정받아야 회사에서 살아남을 수 있잖아요."
"카렐 학파인 제가 그 두 가문을 잘 아울러야 회사가 굴러갈 것이다, 이 말이죠?"
"네, 맞아요. 그런 의미에서 당신이 모교의 대학원을 졸업해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건 정말 잘한 일이에요."
은사의 강권으로 받은 박사학위이지만 어찌되었건 그로서 마이너스투자이론이 정립되었고 천우는 명실상부한 카렐 학파의 중추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제 이 박사학위를 통해 천우는 양가의 징검다리 역할을 하게 될 것이었다.
아무튼 얘기가 이렇게까지 나왔다는 건 전미라와 그 가문이 오금자를 지지한다는 뜻이었다.
"그럼 저와 제 조모님을 센트럴 가문에서 지지한다는 말인가요?"
"말씀드렸다시피 그런 셈이죠. 그러니까 징검다리 역할을 해달라고 말한 것이겠죠?"
사실, 천우가 그녀를 만난 건 센트럴 뱅크 일가의 지지를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굳이 그 사실을 재확인 한 것이 오히려 득이 된 것 같았다.
"당신이 이렇게 적극적이라서 우리 가문에서도 상당히 좋아하고 있어요."
"다행이네요."
"앞으로도 저와 당신이 이렇게 공조하면서 통합을 이뤄냈으면 하는 마음인 것 같더라고요."
"그럼 앞으로 우리 두 사람이 더 자주 만날 수 있겠네요?"
"당신이 원한 다면요."
"그야 당연히···!"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가 커지고 말았다.
순간, 천우가 스스로 깜짝 놀라 입을 꾹 다물어버렸다.
"헙···."
그는 머쓱한 마음에 괜히 헛기침을 토해냈다.
"···험험, 당연히 더 만났으면 좋겠지요."
"후훗, 저도 그래요."
단아한 미소, 전미라는 확실히 천우가 좋아하는 상이긴 했다.
헌데 그 이상의 뭔가 더 깊은 끌림이 있었다.
마샤가 천우에게 물었다.
-어때요? 제 말이 맞죠?
'···확실히 그런 것 같네.'
운명까진 몰라도 천우에게 있어서 그녀가 조금 특별한 존재인 것만큼은 확실했다.
그녀는 천우에게 손을 내밀었다.
"손 줘 봐요."
"손이요?"
전미라는 천우의 손에 번호 두 개를 적어주었다.
첫 번째 번호는 집 전화였고 두 번째 번호는 핸드폰 번호였다.
"여기로 전화하세요. 밤이든 낮이든 아무데나 괜찮아요."
"그럼 나도···."
천우는 자신의 명함을 꺼내어 그녀의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자칫 여자의 손에 글씨를 새기는 것이 결례가 될 까봐 그 위에 명함을 놓은 것이었다.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그녀를 배려했다는 것에 전미라는 조금 감동한 것 같았다.
"여자를 배려할 줄 아시고, 좋네요."
"이 희고 작은 손에 낙서를 할 수는 없잖습니까."
그녀가 환하게 웃었다.
그러자, 천우는 가슴 속에서 뭔가 뜨거운 것이 불끈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전미라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푹 숙였다.
"···처음 봤을 때의 그 이글거리는 눈과는 약간 다르네요."
"미, 미안합니다. 째려보려고 그런 건 아닌데."
허둥지둥 거리는 천우의 모습에 그녀가 또 웃었다.
"알아요. 이럴 땐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되요."
"그, 그렇군요."
"아무튼 다음에는 제가 저녁 살게요. 어디서 만날까요?"
"이번에는 제가 가죠. 지금 어디 계시죠?"
"지금은 서울에 있어요. 이태원에 집이 있어요."
"어라? 바로 옆이네요? 우리 집은 한남동이거든요."
"그랬군요!"
이제 보니 집도 가까웠다.
엎으면 코 닿을 곳에 사니 잘하면 동네 슈퍼를 가다가도 마주칠 가능성이 있었다.
그녀는 웃으며 말했다.
"자주 만나요."
"그럽시다."
천우는 전미라를 집까지 바래다주었다.
집으로 돌아가던 전미라에게 천우는 손을 흔들어주었다.
그러다가 문득 전미라가 획 돌아보며 말했다.
"잠깐···."
"네?"
"···들어왔다가 갈래요?"
순간, 천우의 머리에 느낌표가 찍혔다.
< 40.(2) > 끝
ⓒ 풍류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