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0. >
40.
시애틀의 아비디아 본사.
아비디아의 대표이사 스테파노 왕은 최호명의 제안이 상당히 마음에 들었다.
슈팅스타로 아디비아를 인수한 후, 현보 전자와 합병하여 초대형 전자그룹을 만든다는 것.
그 핵심에는 아디비아가 있었다.
최호명은 나노 소프트의 OS를 탑재한 완성PC를 출범시킬 생각인데, 그 안에 아비디아의 외장그래픽카드가 들어갈 예정이었다.
물론, 그는 완성PC로 MBI나 애플스를 이길 수 있을 것이라곤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그 안에 아비디아의 그래픽카드를 반드시 넣을 수 있도록 시장을 몰아가겠다는 생각이었던 것이다.
"최근 게임시장이 10억 달러 규모를 넘겼답니다. 북미에서만 말이죠. 헌데 게임은 점점 고사양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래픽 기술이 점점 더 좋아져야하지 않겠어요? 게임시장이 10억 달러라는 건 그걸 플레이 할 수 있는 컴퓨터 시장도 커진다는
의미이고, 그건 다시 말해서 그래픽카드의 전성시대가 온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아이텔의 내장그래픽도 만만치 않은 가성 비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과연 게임이 될까요?"
"됩니다. 외장그래픽 없이는 아예 게임을 못하도록 만들면 되죠."
스테파노 왕은 실소를 흘렸다.
"그게 말처럼 그리 쉬웠다면 우리가 경영위기를 겪을 일도 없겠죠."
"지금의 경영위기는 시행착오입니다. 당신이 판단을 잘못한 것이 아니라 그냥 운이 없었던 겁니다."
아비디아가 첫 번째 작품으로 내놓은 G-1시리즈가 망한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우선은 아주 높은 가격에 비해 수요가 없다는 점이 가장 컸다.
그래픽카드는 최고수준으로 만들어놓았는데 그걸 사가는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시장에서는 아직 고성능의 외장그래픽카드를 원하지 않고 있었다는 소리다.
스테파노 왕도 굳이 비싼 가격의 그래픽카드를 사서 쓸 필요가 없다는 생각을 본인 스스로도 하고 있었다.
이를 테면 굳이 멀쩡한 자동차에 튜닝을 하는 것쯤으로 생각된 달까.
그는 스스로 그런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기에 회사를 매각할 생각까지 하고 있었던 것이다.
최호명은 그의 그런 생각을 정면으로 깨부수어주었다.
"당신에게는 한 가지 큰 문제가 있습니다."
"문제요?"
"당신의 가장 큰 문제는 그래픽의 한계를 너무 과소평가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래픽의 한계···?"
"생각해보세요. 인간을 2차원적인 그림으로 표현하는 것과 3차원으로 표현하는 것에는 어떤 차이가 있죠?"
"우선 입체적인 효과에서부터 차이가 나겠죠."
"그렇죠? 인물만 봐도 그런데 건물의 도면은 어떻겠어요?"
"아아!"
"사람이 와이어를 매달고 날아다니는 영상에서 줄은 어떻게 지우죠?"
"그야 그래픽으로···."
"그겁니다.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걸 컴퓨터는 할 수 있다는 거죠. 앞으로 많은 부문에서 그래픽 기술이 적용될 겁니다. 우리 아들이 뭐라고 하는 줄 아십니까? 나중에는 아예 영화도 그래픽으로 만들 것이라고 하더군요."
지금의 패러다임으로는 생각할 수 없는 그림이 참으로 많다.
그건 디지털 그래픽 기술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아비디아의 창립주조차도 상상하지 못하는 일이었다.
스테파노 왕은 충격을 받았다.
'스스로의 한계에 부딪쳐 절망하고 있었구나!'
최호명은 이런 이야기를 해주었다.
"앨버트로스는 바보 새라고 불린답니다. 새는 샌데 날개가 너무 커서 백날천날 뒤뚱뒤뚱 걸어 다니기만 하니까요. 하지만 녀석들은 세상에서 가장 오래 나는 새입니다. 그들은 자신이 창공을 가르기에 가장 좋은 바람이 올 때까지 때를 기다릴 뿐, 날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은 앨버트로스입니다. 자신의 이상이 너무 커서 스스로도 그 본질을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이죠."
"아아!"
"바람이 붑니다. 이제는 좀 날아 봐요."
스테파노 왕이 최호명보다 한참 어리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풋내기 청년은 아니었다.
그 역시 이제 중년으로 접어드는 나이였다.
헌데 중년에 이르러 누군가에게 인생의 전환점이 되는 얘기를 들을 줄은 몰랐다.
그는 최호명의 손을 잡았다.
턱!
"···좋습니다. 당신에게 회사를 맡기겠습니다!"
"맡기다니요. 우리는 그냥 회사를 인수하는 것뿐, 경영은 당신이 하는 겁니다."
"경영권을 주신다고요?"
"제가 그래픽의 G자라도 아는 사람으로 보이십니까? 나는 돈, 당신은 기술, 정해진 부분이 다 있기 마련이죠. 앞으로 돈 문제는 제가 알아서 해결합니다. 당신은 그냥 마음 편하게 연구나 하고 제품을 만들면 됩니다. 그걸 팔고 돈을 벌어서 당신에게 가져다주
는 건 제가 하는 거죠."
사실, 스테파노 왕은 회사를 위해 자신이 떠나는 것이 맞는다고 생각했었다.
허나 그건 슈팅스타의 경영방식을 잘 몰랐기 때문에 그런 것이었다.
스테파노 왕은 최호명의 방식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당신은 스스로가 못났다고 생각하는 건가요?"
"아니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다만, 당신보다 내가 뛰어나지 못한 부분이 분명 있기 때문에 회사를 맡기는 겁니다."
"흐음."
"지금부터 내가 컴퓨터공학을 배운다고 해서 당신의 발가락이나 핥을 수 있을 것 같습니까?"
"그 반대로 제가 경영학을 미친 듯이 공부해도 당신을 따라갈 수는 없겠죠."
"잘 아시네요."
그는 오늘 최호명을 만남으로서 뭔가 큰 깨달음을 얻었다.
스테파노 왕은 최호명에게 악수를 건넸다.
"앞으로도 이런 만남을 계속 가졌으면 합니다."
"그렇게 될 겁니다. 당신과 나는 이제 한 가족이니까요."
이로서 최호명은 자신의 울타리 안에 한 사람을 더 넣었다.
***
전미라와의 약속이 잡혔다.
천우는 그 어느 때보다 머리와 옷에 신경을 쓰고 전미라와의 약속장소로 향했다.
잔뜩 힘을 주어서 누가 보더라도 무슨 특별한 일이 있다는 걸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약속은 남산타워에서 잡혔다.
'너무 힘을 줬나?'
그는 거울을 보며 자신의 머리와 옷매무세를 가다듬었다.
그러다가 문득 천우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처음에는 그녀가 거추장스럽다고 생각했었는데, 이제 와서 그녀가 중요한 인물이라고 생각하니 잘 보이기 위해서 꽃단장까지 했다.
'나도 결국 속물인 건가?'
천우의 혼잣말에 마샤가 답했다.
-그녀를 만났을 때, 주인님의 호르몬에 약간의 변화가 있었습니다. 오늘의 치장은 아마 그런 것 때문에 본능적으로 하신 것이겠죠.
'그게 무슨 소리야. 내 호르몬에 변화가 있었다고?'
-그때는 미처 느끼지 못하셨겠지만 주인님 신체는 화학적 변화를 일으키고 있었습니다.
'화학적 변화라니?'
-흔히 야생에서 수컷이 짝짓기 대상을 찾는 것과 같다고나 할까요?
'···그게 무슨 소리야. 내가 짐승이라는 거야?'
-사람도 결국 동물입니다. 뭐랄까요, 인간에게는 특정 대상에게서 느끼는 감정에 따라서 신체의 화학적 변화가 일어납니다. 마치 주파수처럼 말이죠.
'주파수가 잘 맞는 사람을 만나면 호르몬의 변화가 일어난다고?'
-그런 셈이죠. 야생에서의 짝짓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암수가 서로 주파수가 맞으면 서로 페로몬을 엄청나게 분비하기 시작하죠. 사람이라고 해서 별반 다를 거 없습니다.
'그러니까, 그녀와 내가 생물학적으로 상당히 잘 맞는다는 거야?'
-흔히 운명이라고 합니다.
'···그런 게 어디 있어?'
-운명론자들은 인간에게 서로 맞는 운명이 있다고 합니다. 화학적 주파수가 맞는 사람을 찾는 건 인간의 본능이자 자연의 섭리입니다. 그 주파수가 우연히 맞을 확률이 얼마나 되겠어요? 그걸 운명이라고 부르지 않으면 뭐라고 부를까요?
'너, 말빨이 꽤 좋아졌다?'
-AI는 언제나 진화합니다.
그러니까, 마샤는 그녀와 천우가 제법 케미가 잘 맞는다고 말하려는 것이었다.
허나 정작 천우 본인은 정말로 별 느낌이 없었다.
'무슨 화학적 궁합이 좋다는 거야?'
-보면 아실 겁니다.
천우는 약속시간 30분 전에 나와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그때, 그의 고개가 뒤로 획 돌아갔다.
'꽃냄새?'
마치 향긋한 봄꽃의 싱그러움이라고나 할까.
천우는 마치 자석처럼 이끌려 뒤로 돌아섰다.
그러자, 그 자리에는 전미라가 서 있었다.
순백의 피부, 단아한 얼굴, 높은 콧대와 거의 맞닿아 있다고 생각될 정도로 두툼한 윗입술.
만약 신이 작정하고 미녀를 빗는다면 이렇게 생겼을 것이라, 천우는 그리 생각했다.
천우는 자석처럼 돌아섰고, 그녀는 천우와 눈이 마주치자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어, 어머나. 제가 온 줄 어떻게 알고 있었어요?"
"좋은 냄새가 나서 돌아왔더니 당신이 서 있었네요."
"그랬나요? 시작부터 칭찬이라니, 나쁘지 않은데요?"
그때는 미처 느끼지 못했던 그녀의 존재감이 천우의 뇌리에 확실히 각인되기 시작했다.
천우는 꽤 많이 당황스러웠다.
'허어, 인간의 감정이 이렇게 급변할 수 있었나?'
-말씀드렸잖습니까. 호르몬의 주파수가 있다고요. 그때는 주인님의 이성이 본능을 억누른 겁니다. 하지만 사실, 그때도 이 여성이 괜찮다고 생각하긴 했었지요?
'그건 그렇지···.'
그렇다고 해서 가슴이 두근거리거나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는 건 아니었다.
허나 그녀에게 무조건적인 호감을 느끼고 있는 건 사실이었다.
"험험, 그럼 갈까요?"
"그나저나 갑자기 식사를 대접한다고 하시니 조금 당황했어요."
"미안합니다. 그때는 워낙 경황이 없어서 제대로 인사도 못했지요. 그게 좀 걸려서 부른 겁니다."
"후후, 다른 할 얘기는 없었고요?"
"뭐 그것도 있고요."
그녀는 천우를 곱게 째려보았다.
"사실은 그 할 얘기가 가장 큰 거죠?"
"···귀신이네요."
전미라는 이내 빙그레 웃었다.
"최소한 거짓말은 하지 않으니 마음에 드네요."
"조금 더 멋있게 포장하고 싶었는데. 제가 이렇게 말재간이 없는 줄, 오늘 처음 알았습니다."
"그럴 거 뭐 있나요?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건데."
"그런가요?"
"그나저나 얘기는 대충 들었어요. 할머님께서 드디어 결심을 하셨다고요?"
"네, 그렇습니다. 그래서 전 씨 일가의 도움이 전적으로 꼭 필요합니다."
천우는 자신이 너무 속물처럼 보이지는 않을까 걱정했다.
허나 원래 전 씨는 오래 전부터 오금자를 추종해오던 세력인지라 전미라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아니, 오히려 천우를 칭찬했다.
"아주 잘 하셨어요. 당신 덕분에 체스터 카렐 센트럴 그룹이 앞으로도 금융의 명가로 존립할 수 있겠네요."
"그야 당신이 없었다면 절대로 불가능했을 얘기이니, 제가 잘 했다기보다는 당신의 공이 크다고 볼 수 있겠지요."
"후후, 그래요?"
두 사람은 요즘 젊은 사람들이 자주 간다는 레스토랑에 들어갔다.
너무 묵직하지 않으면서도 경박스럽지 않은 식당이었다.
이 식당을 찾아낸 건 마샤였다.
미래의 데이터베이스를 털어 전문가의 평점을 종합해보았더니 이 레스토랑이 나왔다.
[블루 캣]
파란 고양이가 서 있는 간판을 지나 레스토랑의 홀에 들어가니 아기자기한 멋이 있는 전경이 눈에 들어왔다.
전미라는 함박웃음을 지었다.
"어머, 센스가 있으시네요. 제가 이런 분위기를 좋아하는 줄은 어떻게 아셨어요?"
"당신을 떠올리니 이런 이미지와 잘 맞을 것 같더라고요."
"흐음? 제 생각을 꽤 하셨나봐요? 그때는 그리도 쌀쌀맞게 굴더니."
"이, 일부러 그런 건 아닙니다. 그냥 어쩌다보니···."
"후후, 알아요. 더 중요한 일이 있어서 그런 거잖아요. 만약 당신이 치마만 두르면 다 좋아하는 사람처럼 보였다면 나도 당신을 신뢰할 수 없었을 거예요."
그냥 식당 하나 잘 예약했는데 꽤나 점수를 잘 번 느낌이었다.
무엇보다 천우가 말로 이 상황을 잘 포장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주인님, 말빨이 꽤 좋아졌네요?
'···그런 건 배우지 않아도 돼.'
< 40.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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