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9. >
39.
모톨롤라 반도체 생산업체를 인수한 현보는 파죽지세로 관련사업체들을 차례대로 인수하기 시작했다.
현보의 인수전에서 가장 큰 성과라고 한다면 단연 모톨롤라 반도체가 되겠지만 그와 못지않은 성과도 있었다.
그건 바로 대만계 메인보드 제조회사인 바수스의 영입이었다.
89년 타이베이에서 문을 연 바수스는 세계 최저 불량률을 자랑하는 회사이지만 영업이익이 5% 밖에 되지 않는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불량률이 적다는 건 그만큼 최고급 원재료만 사용한다는 뜻이고 기술력 증진에 최대한 힘을 쏟고 있다는 증거였다.
허나 최근 바수스는 메인보드 생산에서 CPU와 MPU, 메모리 D램 생산에 발을 담갔다가 엄청난 적자를 기록하는 중이었다.
바수스의 최대주주인 타이베이의 사이클론 그룹은 메인보드의 사업을 포함한 자회사 전부를 매각하겠다고 밝혔고, 슈팅스타는 대만계 채권을 일부 정리하여 바수스를 전격 영입하게 된 것이었다.
모톨롤라 반도체 부문을 인수하면서 생긴 부채와 바수스 등을 인수하면서 생긴 부채는 한화로 대략 2조 7천억 정도 되었는데, 슈팅스타는 그걸 불과 3개월 만에 처리해버렸다.
시장에서는 그야말로 현금을 동원하는 기계라는 말이 딱 어울린다며 너스레를 떨어댔다.
약간의 우여곡절이 있기는 했지만 최호명은 결국 자신의 뜻대로 비메모리 반도체까지 생산이 가능한 기업을 만들고야 말았다.
허나 현보의 이런 화려한 인수전에도 불구하고 반도체 시장은 점점 침체국면에 접어들고 있었다.
이제는 동북아시아의 반도체 시장 전체가 침체를 겪어 일본의 소재시장마저도 휘청거리는 지경에 이를 정도였다.
그러나 문제는 이제 시작? 불과杉?.
97년 4월, 뜻밖의 소식이 전해졌다.
"···뭐? 갑자기 파업을?"
"예, 회장님. 아무래도 거래처를 다변화 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현재 현보의 비메모리 공장은 미국과 대만에 있지만 메모리 공장은 대부분 한국에 있기 때문에 한국에서 웨이퍼를 받아서 사용하고 있었다.
헌데 한국계 웨이퍼 최대 생산회사인 코리안 정밀공업이 노사갈등으로 인하여 파업을 선언한 것이었다.
현재 코리안 정밀공업이 한국계 기업에게 제공하고 있는 웨이퍼의 비율은 대략 75% 남짓, 만약 이들의 파업이 장기화 된다면 생산라인 가동에 차질이 생길 것이 분명했다.
"제기랄, 노사분규 하나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다니!"
"어떻게 할까요? 미국에서 웨이퍼를 들여오는 방법도 있습니다."
"흐음. 경쟁사들은 어떻게 하고 있죠?"
"그들도 발등에 불 떨어진 건 마찬가지입니다만, 이미 대체루트를 찾은 것 같습니다."
최호명은 지금이 결정적인 분기점이 되리라 생각했다.
그는 결심을 세웠다.
"대만 쪽 수입경로 알아보세요. 그리고 미국 쪽에도 줄을 좀 대보시고요."
"예, 알겠습니다."
"혹시 HC와 지금 당장 전화연결 됩니까?"
"최천우 대표이사는 지금 이탈리아로 떠났다고 하던데, 일단 연락은 해보겠습니다."
"아참, 그랬었지."
천우는 오금자와 긴이 할 얘기가 있다면서 이탈리아로 떠난 상태였고 어지간히 중요한 전화가 아니면 2박 3일 동안 받지 않겠다고 했었다.
최호명은 당장 급하긴 해도 천우의 시간을 지켜주기로 했다.
"됐습니다. 그럼 일단 우리가 할 수 있는 선에서 반도체 자체제작이 가능한 루트를 알아보세요."
"자체제작이요?"
"우리가 가진 채권 중에는 소재시장의 것도 있죠?"
"예, 그렇습니다. HC와 7:3 비율로 나누긴 했지만 그래도 이정도면 2대주주 정도는 될 겁니다."
"좋습니다. HC에 소재산업 채권자 컨소시엄의 긴급이사회를 열자고 제안을 해두세요. 천우가 돌아오면 자세한 일정을 조율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예, 회장님. 그리 조치를 취해두겠습니다."
이미 아이텔은 애초에 웨이퍼를 자체적으로 생산하고 공정 및 후처리까지 한 번에 진행되는 전천후 생산업체가 된 지 오래였다.
실리콘벨리의 강자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것이 아니었다.
최호명은 현보전자를 그렇게 만들겠노라 다짐하게 된 것이었다.
"행운그룹에 연락해서 경영권 지분분할을 다시 논의하자고 연락하세요."
"우리가 독점으로 가닥을 잡을까요?"
"그래요. 그쪽으로 가닥을 잡고 돈을 달라면 그냥 주세요. 어차피 우리도 거저 사업할 수 있으리란 생각은 하지 않고 있었잖아요?"
"알겠습니다. 지금 당장 실행에 옮기겠습니다."
현보전자가 반도체 시장이 갑자기 뛰어든 것을 보고 주변에서는 '미련한 짓'이라고 쑥덕거리고 있었다.
허나 최호명은 감히 단언할 수 있었다.
'인간이 컴퓨터 없이 살아갈 수 있을 리가 없다. 아니, 인간은 컴퓨터와 함께 발전하게 될 것이다!'
공상과학에 나오는 물건을 상상하며 감탄하는 사람이 아닌, 그것을 실현에 옮기는 리더가 되는 것.
그것이 바로 최호명이 꿈꾸는 이상이었던 것이다.
***
이탈리아 남부 시칠리아의 한적한 바다농원.
천우는 오금자의 이종사촌들의 환대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어머나, 얘가 호명이의 아들이야? 너무 잘 생겼는데?"
"며느리가 아마 배우 출신이라고 했었지?"
"아아, 어쩐지!"
귀에 피딱지가 앉을 것 같았다.
도착하자마자 천우를 어루만지고 쓰다듬고 수다를 떠는 바람에 가만히 앉아서 쉴 새도 없었다.
여자 셋이 모이면 접시가 깨진다는 말은 한국에서만 통용되는 것이 아닌 모양이었다.
오금자는 천우의 손을 꼭 잡고 12명의 자매들과 같이 바다농원을 거닐고 있었다.
"그나저나 우리 손자가 이 할미를 어찌 찾아왔을까?"
"드릴 말씀이 있어요."
"뭔데?"
"아, 그게···."
"괜찮아. 다들 가족들인데 뭘."
천우는 아마도 이 집안이 체스터 카렐 센트럴에 대한 얘기를 무척이나 싫어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허나 어쩌면 이들도 알아야 할 것 같아서 눈을 질끈 감고 말했다.
"사실은 존 카렐 회장이 이제 곧 숨을 거둘 것 같다고 하네요."
"···존? 리처드 오빠의 아들 존 말이야?"
"네. 할머니에게는 조카가 되겠네요."
순간, 주변의 분위기가 조용해졌다.
자기들끼리 뭐가 그리 신나는지, 끝도 없이 재잘거리던 할머니들이 일순간 입을 닫아버린 것이었다.
오금자에게 자매들이 말했다.
"원래 어려서부터 몸이 약하다고 하지 않았어?"
"···그렇긴 했었지."
"그 집안도 참 건강 복이 없기는 없네."
천우는 더불어 존의 아들 브루스가 찾아왔다는 얘기도 함께 해주었다.
"그 아들이 찾아와서 저에게 경영권 방어에 참여해달라고 했어요. 만약 승리한다면 할머니를 회장으로 옹립하겠데요."
"나를 회장으로?"
"네, 아주 확고한 것 같았어요. 다만 부회장과의 대결이 조금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는 하더라고요."
자매들은 부회장이라는 말이 나오자, 고개를 갸웃거렸다.
"부회장?"
"아아, 애덤 카퍼필드 말이에요."
순간, 그녀들 사이에 정적이 흘렀다.
천우는 애덤 카퍼필드가 그렇게까지 대단한 사람인가 하고 긴장했다.
허나 그녀들의 반응은 전혀 달랐다.
"오호호호! 그런 애송이가 부회장을 해먹고 있다고? 카렐 가문이 어쩌다가 그렇게 되었지?"
"쯧, 줄리아나가 손만 번쩍 들어도 오줌을 찔끔 지리던 녀석이 뭐 있긴 하겠어?"
애덤은 상당한 기회주의자였다.
체스터 카렐의 아들들이 모두 사망하고 그 아들들이 회사의 중역이 되자, 그들을 감언이설로 꿰어내어 자신의 사람들로 만들어 실질적인 대주주 노릇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허나 그건 줄리아나 카렐이 장수할 것이라곤 전혀 생각도 못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언니, 한바탕 휘저어주고 와. 애덤이라는 그 애송이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 주란 말이야."
"하지만 나는 이제 그 집안과는 연을 끊었어. 오빠들이 나를 등진 그 순간부터 쭉 그래왔어."
"그렇다고 애덤이라는 그 팔푼이에게 가문을 통째로 빼앗길 수는 없잖아?"
"으음."
"게다가 조카손자가 찾아와서 부탁한다고 고개까지 숙였다잖아. 한 번 만나볼 필요는 있지 않겠어?"
과연 최충의가 살아있었다면 이럴 때 뭐라고 했을까.
천우는 잠깐이나마 조부가 되어보기로 했다.
"할머니, 아마 할아버지가 살아계셨다면 이렇게 말씀하셨을 거예요. '볼 거 뭐 있어? 내키면 확 쳐들어가서 목이라도 따버려'라고 말이죠."
"후후, 그래. 그 양반이 살아계셨다면 그런 말을 했을 것 같긴 하구나."
"하지만 저는 이렇게 생각해요. 할머니가 원치 않는다면 가문이 어떻게 흘러가든 상관없다고요. 다만, 할머니가 정말 저 집안을 평정하실 생각이 있으시다면 저는 물심양면으로 할머니를 도울게요. 카렐 학파까지 동원해서 말이에요."
오금자는 결심을 내렸다.
그녀는 12자매에게 힘을 보테 달라고 부탁했다.
"다들 나를 좀 도와줘. 이스트우드 사를 동원해야겠어."
"안 그래도 요즘 호명이네 회사와 천우 회사를 오가면서 은밀히 업무협약을 진행 중이었잖아. 도와주는 건 어렵지 않지."
천우는 얼마 전부터 로버트 콜먼과 손을 잡고 정보를 공유하고 있던 참이었다.
헌데 그런 천우도 이스트우드가 이 집안과 직접 연관이 있다는 건 까마득히 모르고 있었다.
오금자는 웃으며 천우에게 말했다.
"이스트우드의 이사진은 12명이야."
"어어? 그렇다면···."
"이곳에 있는 사람들이 이스트우드&카렐 컴퍼니의 이사진들이라는 소리지."
"아아! 그랬던 거로구나!"
이 시끌벅적한 할머니들이 오금자의 든든한 조력자가 되어 줄 것이다.
천우는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자신도 이제 슬슬 준비를 하고 있어야겠다고 생각했다.
"할머니, 그럼 저도 이번 6월 추모모임과 정기학회에 나가서 조력자들을 모집할게요. 아마 외증조부님의 회사를 되찾는다고 하면 모두들 힘을 합쳐 주실 것이라고 믿어요."
"그래, 고맙구나."
12자매 중 차녀인 카트리나 이스트우드가 불현 듯 천우에게 물었다.
"아참, 그러고 보니 잊고 있었네. 그 존의 아들이 찾아왔다면 옆을 맴돌던 아가씨도 함께 왔겠네?"
"아가씨요?"
"얼굴이 무슨 파스타 반죽처럼 하얗고 예쁜 처자였는데. 이름이 뭐더라?"
"전미라?"
"아아, 그래! 전미라. 그 미라라는 아가씨는 만나봤어?"
"뭐, 대충 만나기는 했었죠."
"체스터 카렐 센트럴 그룹이 생길 때 말이야, 센트럴 은행을 카렐 컴퍼니가 인수한 건 알고 있지?"
"네, 그럼요."
"그 센트럴 은행의 후손 중에 한 명이 전 씨 일가야. 그 전 씨 일가는 오래 전부터 줄리아나 언니를 추종하는 세력 중 하나였지."
"아아! 그럼···."
"전 씨 가문의 여식과 친하게 지내렴. 앞으로 네게도 큰 도움이 될 거야."
"네, 할머니. 그런데 할머니는 전미라 씨를 어떻게 아세요?"
카트리나는 약간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이놈아, 그걸 내가 굳이 알려줘야 하냐? 이런 주변머리 없는 놈 같으니. 아가씨에게 저녁식사라도 대접하면서 정중하게 물어봐."
"···그냥 좀 알려주시면 안 돼요?"
"공짜 좋아하다간 대머리 된다. 네 진외증조할아버지도 대머리였던 건 알고 있지?"
천우는 입을 꾹 다물어버렸다.
마샤가 천우의 머리를 지켜준다는 보장이 있어서 대머리는 남자에게 가장 큰 두려움이었던 것이다.
일단 전미라를 만나는 것이 급선무라 생각된 천우는 그녀의 전화번호를 수소문하기 시작했다.
< 39.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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