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8.(2) >
38.(2)
늦은 밤, 천우는 서울 그레이스 호텔을 찾았다.
호텔 스위트룸에 묵고 있던 브루스 카렐은 천우를 보자마자 깊이 고개를 숙였다.
"아까의 무례는 정말 미안했다."
"뭔가 사연이 있었다고 했잖아."
"그래도 초면에 그런 결계를 범하다니, 이렇게라도 고개 숙여 사죄하고 싶었다."
"아무튼 간에 무슨 사연인지 알단 한 번 들어나 보자고."
전미라는 천우에게 술을 한 잔 하자면서 그를 차에 태웠다. 그리곤 도착한 곳이 바로 호텔 스위트룸이었던 것이다.
브루스는 초면의 무례함은 온데간데없고 아주 신사적이며 차분한 분위기로 돌변해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둘 사이의 벽이 사라진 건 아니었다.
어쨌건 간에 현보일가를 핍박했던 건 카렐 가문이 아니었던가.
브루스가 사과를 하긴 했지만 여전히 분위기는 꽤나 딱딱했다.
일단 그는 두 사람을 거실로 안내했다.
"위스키 어때? 좋은 스카치위스키가 한 병 들어왔는데 말이야."
"으음."
그가 내민 위스키를 보니 정말 귀하기는 했다.
[맥캘런 1920]
1920년산 싱글몰트 위스키인 이 술은 2010년대에 10억을 호가하는 경매 가를 기록했었다.
사상최고가 위스키 1, 2위가 모두 이 브랜드였으며 1위는 17억, 2위는 12억에 낙찰되었다.
작정하고 구하지 않는 한, 평생 한 번 마셔볼까 말까한 술이었다.
허나 천우가 술에 혹할 사람은 아니었다.
천우의 표정이 딱딱하니 브루스가 정중히 부탁했다.
"내키지 않는다는 건 알아. 우리 가문과의 관계, 그리고 나의 태도까지. 하지만 정말 긴이 할 말이 있어서 그런 거야."
"그래요, 한 잔만 받아줘요."
도대체 저 집안에서 자신을 왜 찾아왔나 궁금하기는 했었다.
해서 천우는 한 잔 받아보기로 했다.
"한 잔 하지 뭐."
"고마워!"
세 개의 잔이 가득 채워졌다.
브루스는 천우에게 건배를 제안했다.
"건배할까?"
"일단 술을 얻어 마시는 입장이니."
팅!
세 개의 잔이 연달아 부딪치면서 술이 일순간에 넘실거렸다.
차원이 다른 깊은 달달함.
천우는 그것을 한 모금 혀에 적셔주었다.
"······!"
입안에 맴도는 달콤함, 그와 함께 밀려드는 진득한 알싸함이 오각을 자극했다.
차마 입안에 머금고 있는 술을 목구멍으로 밀어 넣기 싫을 정도였다.
그러나 술도 음식이다.
술의 진가는 위로 넘어갔을 때 나타나는 법.
꿀꺽!
위를 부드럽게 마사지하는 느낌, 역시 명주는 다르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명주네. 식도에 버터를 바른 느낌이야."
"술에 조예가 좀 있는 모양인데. 전문가의 평가와 똑같잖아?"
"사람의 입은 다 거기서 거기니까."
그래도 천우의 표정은 여전히 미묘하게 굳어 있었다.
브루스는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내가 여기까지 부른 이유가 궁금하겠지?"
"당연하지."
"사실은 말이야, 아까 사교회장에 우리의 친척이 세 명이나 더 있었어. 하지만 그들은 너를 멀리서 지켜보며 감시하고 있었던 거야."
"어째서?"
"너와 내가 손을 잡을까봐 긴장하고 있는 거지. 지금 체스터 카렐 센트럴 그룹은 제 2차 경영권 분쟁이 시작될 위기에 놓여 있거든."
"존 카렐 회장이 취임하면서 모든 것이 다 끝난 줄 알았는데."
"아니, 아버지의 취임은 경영권분쟁의 신호탄일 뿐이야. 회장취임에 불만을 품은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일어나고 있어."
"으음."
"지금 체스터 카렐 그룹은 다섯 개의 파벌로 나누어져 있어. 한 쪽은 회장의 직계인 우리 집안, 그리고 두 명의 숙부와 부회장의 파벌로 쪼개진 상태지."
"나머지 하나는 어디로 갔어?"
그는 천우를 손가락으로 지목했다.
당연히도 천우는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나는 왜?"
"너희 집안 말이야. 줄리아나 카렐, 고모할머니를 추종하는 세력이 많아."
"아직도?"
"알고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원래 증조할아버지께서는 고모할머니를 후계자로 세울 생각이었어. 하지만 그분은 자신의 운명을 개척할 줄 아시는 진취적인 분이셨지."
"그랬던가? 난 처음 듣는 얘기인데."
"당연하지. 아마 스스로의 얘기는 잘 하지 않으셨을 테니까."
그러고 보니 그랬다.
오금자는 자신의 젊은 시절 얘기는 잘 꺼내려하지 않았었다.
"만약 증조할아버지가 살아계셨을 때 그분의 뜻대로 승계를 받았다면 한국에서 그 고생을 하실 필요는 없었겠지. 하지만 재산분배 이전에 증조할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시면서 고모할머니는 권력싸움의 제 1 표적이 되어버렸어. 그래서 한국에 들어가신 그 틈
을 타서 집안의 엄청난 공격이 시작된 것이지."
"그랬었군."
브루스 카렐은 천우의 손을 덥석 잡았다.
"도움을 청하러 왔다."
"도움?"
"아버지가 위독하셔. 만약 이대로 아버지가 돌아가신다면 부회장이 치고 올라와 회장 자리를 꿰어 차려 할지도 몰라. 네가 고모할머니를 설득해서 우호지분을 규합해주었으면 해."
"경영권 방어를 도와달라는 말이로군?"
"저 빌어먹을 숙부들도 이미 부회장에게 넘어갔어. 너와 내가 손을 잡는 그 순간, 칼을 뽑아들기 위해서 벼르고 있지. 지금으로선 타이밍만 보고 있을 뿐이지, 사실 풍전등화나 다름이 없어."
"흐음."
결국 하고 싶은 말이 경영권방어를 도와달라는 말이었던 것인가.
천우는 이 자리에 괜히 나왔나 싶기도 했다.
허나 그는 천우에게 상당히 뜻밖의 제안을 했다.
"만약 네가 경영권방어에 참여하기만 한다면 고모할머니를 회장으로 옹립할 생각도 있다."
"···뭐?"
"애덤 카퍼필드가 유일하게 무서워하는 대상이 누구인 줄 알아? 바로 고모할머니야. 그녀가 복귀할까봐 매일 밤 악몽까지 꿀 정도이고 내가 너와 접선하는 것이 두려워서 카렐 집안의 자녀들까지 동원해서 우리를 감시하고 있잖아."
브루스의 말이 사실일까.
마샤의 거짓말탐지기를 실행해보았다.
-혈압과 맥박, 동공의 수축정도로 판단해보았을 때 참과 거짓의 확률은 각각 95:5입니다. 다만, 약간 긴장한 상태라는 것을 감안하셔야합니다.
'뭐지? 갑자기 왜 우리 할머니를 회장으로 추대하겠다는 거지?'
천우는 정말 순수한 마음으로 회장직을 양보할 마음이 있었다면 왜 지금까지 가만히 있었는지 의문이 들었다.
브루스는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내가 왜 고모할머니를 회장으로 옹립하려는 것인지 궁금하지? 그래, 나라도 그럴 것 같아."
"이유가 뭔데?"
"비겁하게 들리겠지만, 부회장이 회장이 되는 것보다야 고모할머니가 회장으로 추대되는 것이 우리 가문에게는 더 이득이기 때문이지."
"흐음."
"재산이 아무리 많아봤자 다 무슨 소용이야. 회사를 남에게 빼앗기고 나면 말짱 황인데."
"그렇다고 해서 경영권을 넘긴다고? 이제까지 내동 가만히 있다가?"
"···과거에 우리가 고모할머니를 외면했던 것은 인정한다. 그래서 경영권을 되돌려드린다는 미명하에 사죄를 드리려는 것이고."
"완전 자기 멋대로 인데?"
"미안하다···."
사실, 이 일에 대해선 천우가 결정할 게 아닌 것 같았다.
그는 일단 조모에게 이 사실을 알려야겠다고 생각했다.
***
최근 싱가포르와 홍콩에서 대량의 CD가 풀렸다.
이 엄청난 물량들은 대부분 한국으로 들어갔다는 소문이 있었고, 그 직후에 달러화 차관이 있었다는 소문도 돌았다.
줄리아는 HC, 슈팅스타와의 업무협약에서 그 사실을 인지하였고 조금 더 심층적 수사에 돌입했다.
그녀는 싱가포르에 있는 대학 동창을 만났다.
바로 마이클 베넷이었다.
"마이클!"
줄리아는 마이클을 보자마자 두 팔을 벌리고 달려왔다.
말끔하게 정장까지 차려입은 마이클은 여전히 그녀의 극성스러움에 적응이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이제 곧 서른이야. 이러고 싶어?"
"서른이고 마흔이고 너와 감자는 언제나 귀여우니까!"
"어휴···."
천우가 한국나이로 20살이 된 만큼 이들도 나이를 먹었다.
마이클은 어느 새 완숙한 멋이 살아있는 멋진 남자가 되었고 제법 수입도 좋아서 싱가포르에서도 꽤 부자동네에서 살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녀의 애정표현은 여전했다.
마이클은 대학을 졸업한 후, 3년 동안 투자회사에서 일하다가 최근에 독립하여 작은 회사를 차렸다.
그 회사는 순항 중이었고 최근에는 싱가포르까지 진출했다.
"그나저나 싱가포르까지는 어쩐 일이야?"
"회사에서 업무를 하달 받았거든. CD시장을 좀 조사하라고."
"뭐하는 회사인데 양도성예금증서를 조사하래?"
"투자회사야. 이글루라고."
"아아, 이글루!"
"아무튼 간에 조사를 하고 있긴 한데, 의문점이 너무 많네."
마이클은 슬그머니 미소를 지었다.
"그렇겠지. 원래 금융시장이라는 게 비밀스럽기 짝이 없는 곳이거든. 예전에 천우가 금융시장을 가지고 놀았던 건 정말 대단한 일이야. 물론, 지금도 그렇긴 하지만."
"천우는 도대체 그 시장의 흐름을 다 어떻게 파악했던 걸까?"
"글쎄. 머리에 컴퓨터라도 들어 있나보지."
"아무튼 간에 정보 좀 줄 수 있어?"
"물론."
그녀는 업무협약 만으로는 벅차다고 느끼던 차에 너무나도 잘 되었다 싶었다.
회사에서는 싱가포르와 홍콩의 CD가 한국에 흘러들어간 목적이 과연 무엇인가를 알아내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최근에 홍콩과 싱가포르의 은행이 한국으로 CD를 막 뿌리고 있다면서?"
"그래, 그랬지. 하지만 그게 어디 어제 오늘의 일인가."
"하지만 요즘 들어 그런 현상이 두드러지고 있다면서. 항간에서는 달러화 차관을 조건으로 뭔가 거래가 있었던 것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던데."
마이클은 잠시 주변을 둘러본 후, 자리를 옮기자고 제안했다.
그는 대충 마실 거리를 사서 자신의 집으로 그녀를 이끌었다.
집으로 들어온 후, 그는 버티칼이나 커튼을 완벽하게 쳐서 밀실을 만들어버렸다.
"무슨 007 찍어?"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내가 하는 얘기가 전부 보고서에 들어가는 건 아니지?"
"네가 싫다면 당연히 넣지는 않아."
"그래, 그렇다면 정보를 좀 줄게."
"도대체 무슨 정보인데 이렇게까지 조심하는 거야?"
"잠깐 이쪽으로 와봐."
그는 줄리아를 데리고 작은 방으로 들어갔다.
줄리아는 방안의 전경을 살피곤 입을 떡 벌릴 수밖에는 없었다.
마이클은 엄청난 양의 신문과 잡지매체의 정보를 모아다가 스크랩을 해두었던 것이다.
"증권시장 뒷골목 소문에 언론매체의 정보를 짜깁기해서 모으다보니까 나도 조금씩 시장의 흐름이 보이기 시작했어."
"허어, 이걸 다 직접 모았다는 거야?"
"혼자서 월스트리트에서 살아남기가 쉬운 줄 알아?"
그는 방구석 한 쪽에 밀집되어 있는 CD관련 정보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최근 3년 동안 한국으로 들어간 양도성예금증서의 방향들을 파악한 자료들이야."
각종 문서가 복잡하게 얽혀 마인드맵처럼 붙어 있었다.
마이클은 그중에서 중앙을 손가락으로 콕 찍었다.
[해외연계 CD꺾기]
줄리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꺾기? 그건 은행업계의 관행이잖아. 그게 싱가포르와 무슨 상관인데?"
은행이 대출 금리를 현행대로 유지해주는 대신 양도성예금증서의 금리를 액면가보다 낮게 기입해서 여신을 받는 대상에게 팔아먹거나 예금을 강제하는 등의 행위를 두고 꺾기라고 한다.
마이클은 손가락으로 정치권 인사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래, 은행업계의 관행이지. 하지만 이번에는 좀 달라. 대통령의 차남이 관련되어 있거든."
< 38.(2) > 끝
ⓒ 풍류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