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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9월 1일 정기국회에서 다뤄졌었던 이른 바 '금융, 산업 구조조정안'이 뜨거운 감자로 떠올랐다.
여당 측은 93년 시작된 금융 실명제를 기점으로 대대적인 금융개혁을 시도하고 있으나 야당 측에서 제시한 현안을 수락하기 힘들다는 입장이었다.
김중대와 김용필 등이 제안한 대출금리 인하 및 대대적 대출규제, 여신한도추가제한 등은 여당의 현 정책에 반하는 사안들이었던 것이다.
한마디로 여당은 어떤 일이 있다고 하더라도 OECD가입은 이뤄내겠다는 입장이었으나 야당은 달랐다.
허울뿐인 OECD가입은 결국 현 경제상황을 무시하는 것이라 비판한 김중대는 김용필을 필두로 모은 세력을 중심으로 반드시 통화안정화와 대출 금리 인하, 여신한도제한 등을 이뤄내겠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김중대는 언론과의 인터뷰를 이용하여 최근 한국의 경상수지가 점점 악화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며 더 이상의 원화절상과 여신조건완화 등은 한국을 벼랑 끝으로 내몰 수 있다고 말했다.
그와 더불어 김용필은 TV뉴스와의 대담에서 일본의 타카키노믹스의 성공으로 인해 엔저시대가 다시 도래하였고, 그로 인하여 한국의 철강업계는 이제 거의 망하기 일보직전이라고 꼬집었다.
양김은 가뜩이나 미국의 통상법 개정 이후 한국의 경상수지가 점점 악화되고 있는 가운데 서민경제마저 휘청거리고 있다면서 여당과 대통령 내각을 맹렬하게 비난했다.
11월 중순.
최석재가 HC투자를 찾아왔다.
그는 천우에게 한국계 기업 11개에 대한 중, 러 진출에 대한 승인을 요청했다.
"부채비율을 100%대 후반까지 내렸습니다. 중, 러 진출 이후에 100%대 초반까지 내리라고 지시하겠습니다."
천우는 짐짓 불편하다는 듯, 서류를 덮었다.
탁!
"제가 부채비율 낮추라고 말한 것이 언제인데 이제야 완성을 시켜서 가지고 오시나요?"
"우리도 내부사정이 좀 있어서···."
"이 세상에 사연 하나 없는 사람도 있습니까?"
"죄송합니다!"
"그나저나 대출 금리와 여신한도제한 등은 언제쯤 해결된답니까?"
"여당 지도부가 양김 총재들과 합의에 들어간 것으로 압니다. 늦어도 이번 달 안에 대출 금리를 대폭 인하시키면서 여신한도를 제한시키는 정책을 발의할 겁니다."
천우는 마지노선을 정해주기로 했다.
"12월 초까지 준비가 안 된다면 태국과 인니의 기업들을 데리고 들어가겠습니다. 긴장하세요."
베네핏을 준다고는 했지만 시한을 추가로 연기한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천우 입장에서는 진출여건이 좋은 기업을 데리고 들어가는 것이 훨씬 이득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한국을 조금 더 압박하기로 했다.
"아시겠지만 올해 초, 1기의 인프라 구축 팀이 출범했습니다. 그 이후, 2기 인프라 구축 팀이 9월에 출범했죠. 이 중에 한국계 기업은 5개입니다. 이제 곧 3, 4기가 출범할 텐데 이미 3기는 마감했습니다. 4기부터 한국이 대대적으로 참가하고 싶다면 서두르세요.
버스가 떠나고 나면 남는 게 없을 겁니다."
"기한을 반드시 맞추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과연 저들이 불안한 정국을 얼마나 수습할 수 있을지, 천우는 한 번 지켜보기로 했다.
한 편.
바닥으로 떨어졌던 현보의 주가가 연일 상승세로 돌아서고 있었다.
중, 러 에너지 시장으로 진출하면서 한국과 일본의 천연가스 공급 책으로 진화한 현보는 막대한 양의 재화를 벌어들이며 악성부채를 완벽히 정리하는데 성공했던 것이다.
현재 현보의 부채비율은 101% 남짓, 지난 3년 간 무던히도 노력했던 결실이 이제 서서히 드러나고 있는 셈이었다.
그와 더불어 현보에 희소식이 찾아왔다.
불과 2년 전까지만 해도 거의 모든 핵심부품을 미국과 일본에서 수입해서 사용했던 현보전자가 100% 국산화에 성공한 것이었다.
현보는 덩치만 키우는 방식에서 기술집약적 운영으로 회사의 방침을 바꾸면서 기술은 취하고 내실은 다지는 품질경영으로 전자회사를 전환시켰다.
그러던 중 96년 4월, 한국 4대 반도체 제조회사인 행운전자와 미래전자의 반도체부문의 지분을 각각 인수하였다.
행운전자는 국제수지 악화와 더불어 반도체시장의 침체국면으로 인해 서서히 사업철수를 거론하고 있던 시점이었다.
현보는 행운 그룹에서 전자회사의 지분을 대량 인수함으로서 행운 그룹이 매각을 결정한다면 곧바로 회사를 인수하겠다는 입장이었다.
그러면서 현보는 미래전자의 지분까지 인수하였는데, 이는 현보가 반도체 산업으로 진출할 기회를 노린다는 사실을 공식적으로 표명한 셈이었다.
슈팅스타는 HC에게 투자컨설팅을 받는 중이었는데, 천우는 현보가 한국의 반도체 시장을 양분하게 된다면 반드시 거대한 이익을 거머쥐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의 이러한 조언으로 슈팅스타는 현보에 대한 대대적 자금수혈에 들어갔고, 그들은 에너지 인프라 구축으로 벌어들인 자금을 수혈자금과 합쳐 사실상의 반도체 회사 인수에 착수한 것이었다.
그 시점, 최호명은 이런 생각을 해보았다.
한국의 효자종목인 반도체 부문은 현재 메모리 부문에서만 두각을 나타내고 있었다.
허나 역발상으로 비메모리 부문을 크게 키운다면 어떻게 될까?
지금도 한국은 비메모리부문에 대한 투자를 늘리고 있기는 했다.
다만, 전 세계 CPU시장을 미국이 80% 이상 점유하고 있기에 한국이 진출하기엔 모든 인프라가 부족한 것이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걸 슈팅스타가 한다면 달라질 것이다.
최호명은 금요일을 이용해서 한국을 찾아왔다.
그는 천우와 함께 설악산을 찾았다.
휘이이잉!
꽤 싸늘한 바람이 불긴 하지만 겨울산행은 그만의 운치가 가히 일품이었다.
오랜 만의 휴가에 두 부자는 기분이 아주 좋았다.
한국에 12월까지 은행금리 등의 조치를 취해두라고 숙제를 내주었던 천우는 마침 찰나의 휴가를 냈던 터라 시기가 아주 좋았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우리 부자가 등산을 한 적이 한 번도 없었던 것 같은데?"
"아빠가 등산을 워낙 싫어하셨잖아요."
"내가 그랬던가?"
운동은 좋아하지만 무릎관절이 별로 좋지 않아서 최호명은 등산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허나 이제는 보조기를 차면 어느 정도 등산을 해도 무리가 없어서 미국에서 산행을 즐기고 있었다.
최호명은 등산 도중에 천우에게 비메모리 부문에 투자하면 어떻겠냐고 물었다.
"어떨 것 같으냐?"
"흐음, 글쎄요. 만약 지금부터 투자를 시작한다면 한 10~15년쯤은 기다려야 결실을 맺을 수 있지 않을까요?"
사업의 다각화는 분명 회사를 키우는데 좋은 밑거름이 된다.
다만, 모회사 입장에서 10년 이상의 장기투자를 목적으로 꾸준히 자금을 출자하면서 기술을 얻는 건 상당히 부담이 되는 일이었다.
"만약 현보가 비메모리 부문에서 이득을 취하기를 바라신다면 차라리 인수를 하세요."
"비메모리 부문을? 한국에서 비메모리 부문을 인수해봤자···."
"비메모리 부문은 미국이 세계시장을 쥐고 흔드는 구도잖아요. 그러니 답은 미국에서 찾으셔야죠."
"미국!"
천우는 꽤 오래 전부터 CPU부문에 투자를 하고 있었다.
80년대 후반, 천우는 메모리부문에 투자하면서 그와 동시에 비메모리부문에도 상당부분 투자를 해두었었다.
"최근 AMDX가 넥서스를 인수한다는 소리가 있어요. 해서 저는 내년 초를 기점으로 넥서스의 지분을 전량 매각하려 했어요. 인수호재가 뜬다면 꽤 많은 이득을 볼 수 있을 테니까요."
"넥서스의 지분을 얼마나 가지고 있는데?"
"으음, 지분순위로 따진다면 한 3위쯤?"
"허어! 그렇게나 많은 주식을 사들였었어?"
"당시에는 넥서스가 그렇게 큰 회사는 아니었어요. 시간이 지나다보니 이렇게 된 거죠."
80년대 후반, 천우가 넥서스 컴퍼니에 투자를 했던 당시에만 해도 이 회사는 그리 큰 회사가 아니었다.
그저 아이텔이나 AMDX와 같은 초대형 업체에 투자하면서 곁다리로 얹어두었던 자금이 이렇게까지 커진 것이었다.
"지금은 넥서스가 경영악화로 인해서 문을 닫네 마네 하는 시점이에요. 지금 인수하신다면 지분율 1순위로 올라가는 건 그리 어렵지 않을 것 같아요."
"그렇다면 내가 너의 지분을 인수한 후에 협상을 해봐도 괜찮겠구나."
"그렇긴 하겠지만 그 이후로도 기술완성을 위해 인수해야 할 회사가 많을 거예요. 하지만 10년 넘게 개발자금을 투자해야 한다는 관점에서 본다면 오히려 순조로운 출발이 되겠죠."
"그래! 맨땅에 헤딩 하는 것보다야 훨씬 낫긴 하겠어."
"그나저나 어쩌다가 비메모리부문에 진출할 생각을 하셨어요?"
"장사꾼이 돈 벌 생각을 하는 건 당연한 일 아니냐."
"하긴, 그건 그렇죠."
어느 새 흔들바위까지 올라온 부자는 잠시 휴식을 취하며 가지고 온 간식을 먹었다.
최호명은 불현 듯 천우에게 물었다.
"천우야, 외롭지는 않냐?"
"외로울 게 뭐 있겠어요. 일하기 바쁘죠."
"인간이 어떻게 일만 하면서 살 수 있겠냐. 네 친구들은 전부 미국에 있으니 말동무도 없을 테고, 그 큰 저택에서 혼자 지내기가 쉽지 않을 것 같은데."
초중고를 건너뛰고 대학으로 진학한 천우에게 한국인 친구가 있을 리가 없었다.
유치원에서 함께 놀던 친구가 있을 지도 모른다.
허나 얼굴은 알아도 그들과의 추억이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외로우면 다시 미국으로 와도 괜찮아."
천우는 고개를 저었다.
"혼자 사는 것도 괜찮아요. 말씀드렸었나요? 충식이 형제가 사고를 치는 바람에 그 후손이 아주 바글바글 하다고요."
"개랑 인간이랑은 달라. 그리고 충식이 형제도 언젠가는 무지개다리를 건널 거다. 외로움과 헛헛함을 견딜 수 있겠어?"
"흠, 그야···."
지금까지 천우는 스스로 외롭다고 생각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심심하면 책을 읽으면 되고 잡생각이 많아지면 운동을 하면 된다. 게다가 그 많은 강아지들이 우르르 뛰어다니는 통에 정신이 없어서 외로울 겨를도 별로 없었다.
허나 주변에서 본다면 외로워 보일 여지는 충분했다.
아마 천우가 아버지 입장이었다면 충분히 걱정은 되었을 법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전 괜찮으니까."
"만약에 너무 외롭다 싶으면 네 할머니가 다니던 모임에 나가보면 어떻겠냐. 나야 외할아버지와 정이 별로 없어서 잘 나가지 않았지만 넌 그 문하의 학파에서 학문을 닦았으니 입장이 다를 것 같은데."
"아아, 카렐 학파의 추모모임이요?"
"사교모임이니까 부담도 없을 테고 말도 잘 통할 거 아니냐."
"알겠어요. 한 번 나가볼게요."
"그래, 그래라."
최호명은 스윽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참, 그리고 말이다. 요즘에는 그 모임에 꽤 괜찮은 아가씨들도 많이 온다더라. 이 아빠는 연상연하에 대한 편견이 없으니 마음껏 만나보렴."
"···네?"
"하하, 나도 이제 슬슬 며느리를 보고 싶어서 말이야."
"농담도 참."
두 부자는 이제 슬슬 자리에서 일어서기로 했다.
산을 내려가면서 최호명은 천우에게 한 가지 조언을 해주었다.
"아무리 완벽한 사람도 혼자선 그 험한 길을 갈 수가 없어. 명심해라, 아들아."
"명심할게요."
산을 반쯤 내려왔다.
그때쯤, 천우가 불현 듯 물었다.
"그런데요, 아빠."
"응?"
"그 아가씨들, 정말 예쁘데요?"
시간차를 노린 아들의 기습적인 농담.
최호명의 얼굴이 익살스럽게 구겨졌다.
그리곤 그의 엄지가 척 올라갔다.
"···물론이지. 10점 만점에 10점이다."
"으흐흐···."
어느 새 두 부자의 표정이 같아졌다.
"으흐흐흐···!"
이래서 피는 못 속인다고 하는 모양이다.
< 37.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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