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2) >
36.(2)
94년, 미국의 통상법이 개정되었다.
이른 바 슈퍼 301조의 부활.
지금까지 미국의 고질병으로 지적되어 왔던 재정, 무역 적자를 해결하는 계기가 된 터닝 포인트였다.
당시, 미국은 나노 소프트를 선두로 IT산업이 빠르게 발전하고 있었고 심지어는 2000년도의 닷컴버블을 만들어내기까지 했었다.
주식시장의 버블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잘 보여주는 사건이었으나 닷컴버블은 IT산업의 팽창을 상징하는 사건이기도 했다.
그런 미국은 정부기관의 전자화를 통하여 공무원을 30만 명 남짓 해고하였다.
이는 IT산업의 발달, 소프트웨어 및 하드웨어 시장의 꾸준하고 비약적인 발전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말하자면 정부의 축소가 단행되었고, 95년도를 기점으로 방산시장 역시 축소세로 돌아서고 있었다.
레이건 내각의 조치와는 완전히 정반대 노선을 걷고 있었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감세정책이 대폭 폐기되었고 IT, 엔터테이먼트, 금융업의 집중육성이 실시되었다.
이는 천우에게 있어선 앞으로 치고 나아가라는 신의 뜻이나 다름이 없었다.
얼마 전, 천우가 일본과 태국으로 진출하는데 있어 정부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을 수 있었던 것도 바로 그 덕분이었다.
물론 세수를 늘리려는 미국 정부의 정책에 따라서 소득 수급 이후에는 상당한 징세를 감당해내야 했다.
허나 내는 만큼 세력 확장에 나설 수 있으니 이보다 더 좋은 환경은 없었다.
특히나 미국은 무역수지적자를 해결하기 위해 어마어마한 정책을 펼쳐나갔다.
지금까지 미국을 수지악화에 빠트렸던 주변 국가들과의 무역마찰을 불사하는 공격적인 대외정책과 더불어 폭넓은 시장개방요구정책을 펼쳐 수지악화를 해결해나갔다.
그중에서도 천우에게 도움이 되었던 것은 시장규제완화와 저금리 정책이었다.
금융시장은 정부의 규제에 따라서 그 소득이 좌지우지 된다.
그만큼 금융시장을 대폭 개방한다는 것은 천우에게 있어선 그야말로 호랑이의 등에 날개를 다는 격이라 볼 수 있었다.
더군다나 최근 미국은 나프타(NAFTA: 북미자유협정)협정을 통하여 실로 대단한 경상이익 및 무역수지흑자를 기록하고 있었다.
나프타협정은 '미국의 자본과 기술, 캐나다의 자원, 멕시코의 인력'을 통하여 북미를 부국강병으로 이끈다는 개념으로 만들어진 무역동맹이었다.
천우는 각종 정부정책의 후광을 등에 업고 나프타의 금융시장에 뛰어들었다.
캐나다 금융시장에 진출하여 미국에서 자본을 끌어와 원자재 수입상들에게 지원해주고, 반대로 캐나다에 들어갈 미국사업자들의 원자재 결재비용을 지원해주고 그에 따라 발생되는 매입채무에 대한 회사채로 엄청난 이득을 챙기고 있었다.
이른 아침.
천우는 김영실에게 9월 현재까지 집계된 1/4분기, 2/4분기 실적보고를 받았다.
실로 놀라운 결과였다.
"작년도 대비 450%에 달하는 수익을 올렸습니다."
"작년에는 우리가 쓴 돈보다 받을 돈이 더 적어서 그랬던 건 아닌가요?"
"그걸 감안한다고 하더라도 실로 어마어마한 실적입니다."
천우의 자본금규모가 이제는 미국 내 금융업계에서도 상위리스트에 오를 정도인데 그 영업실적이 450%나 올랐다는 건 실로 천문학적인 이득이었다.
이런 이득이 가능했던 것은 일본계 사무라이본드를 비롯한 채권수익이 상당했기 때문이었고 더불어 동남아시장에서의 막대한 수익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태국에서의 바트화 수성전의 반사효과로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싱가포르에서 대대적인 수입이 들어오고 있었다.
그건 다시 말해서 천우의 세력권이 훨씬 더 넓어졌다는 얘기였다.
연이은 희소식에 천우의 표정도 밝아져 있었다.
"뭐, 아무튼 좋은 소식이긴 하네요."
"저도 희소식을 많이 전해드릴 수 있어서 기쁩니다."
계속해서 보고서가 올라왔다.
이번에는 미스릴 컴퍼니의 자회사들이 보낸 자금지원 요청서가 그의 앞에 놓였다.
이제 한참 미국의 IT산업에 불이 붙었으나 여전히 개발에는 상당한 산통이 따르고 있었고 그것은 다시 말해서 앞으로도 지속적인 자금소요가 필요하다는 말이었다.
그건 한국과 일본 역시 마찬가지.
"미스릴에서 요구하는 자금지원은 대략 1억 달러 남짓입니다. 미스릴의 계열사와 우리가 대주주나 2대주주로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기업들이 요청한 자금지원까지 합쳐서 이정도입니다."
"1억 달러라."
적지 않은 돈이다.
허나 천우는 기꺼이 IT와 게임에 이 돈을 쾌척하기로 했다.
"지원하세요. 아낌없이 말입니다."
"네, 그리 전달하겠습니다."
이제 막 도약하는 업체들이 많다.
지금 이 순간에 1000만, 아니 100만 달러만 지원해줘도 앞으로 저들이 얼마나 성장할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천우의 마이너스지점투자, 저점기반투자가 저들의 성장판을 자극 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잠시 휴식 후, 김영실의 보고가 이어졌다.
이번에는 표정이 약간 어두웠다.
"다음은 원자재 및 관련 완성품에 대한 보고입니다."
"으음···."
"반도체, 건설 경기가 꾸준히 감소세로 돌아서면서 4/4분기 초입으로 들어서는 9월 현재, 해당 부분에 대한 손절요청이 쇄도하고 있습니다."
천우는 HC에게 자유주의 투자권한을 주었고 그 권한을 통해서 그들은 대주주인 천우에게 손절이나 투자를 요청할 수 있었다.
이번에는 그 목소리가 꽤나 거셌다.
"특히나 아시아시장의 반도체 및 소재 관련 부문에 대한 투자를 1/3 수준으로 축소시키고 건설과 철강, 원자재의 비율을 1/2수준으로 감축시키자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습니다."
"흐음, 결국엔 약간 손해를 보더라도 다른 쪽에서 이익을 끌어와 상쇄시키면 된다는 생각들인 모양이로군요?"
"그런 셈입니다."
반도체는 IT버블로 향하는 미국의 기조와는 달리 서서히 침체국면에 접어들고 있었다.
이는 미국이 통상법을 개정하면서 동아시아 시장을 마음 놓고 압박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천우에게 산더미처럼 이득을 안겨다 준 정책이 오히려 뒤통수를 칠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저번에도 이런 비슷한 요구들이 있었던 것 같은데요."
"그때는 요구가 아니라 첨언이었지요. 하지만 지금은 얘기가 좀 다릅니다. 해외건설시장의 악성미수금 문제가 여전히 골치 아니겠습니까? 이대로라면 아시아의 건설시장이 통째로 무너질 수도 있습니다. 그런 가운데 일본 철강 쪽에서 덤핑을 해대니 건설과
원자재 시장이 살아남을 수 있을 리가 없잖습니까."
일본은 미국과의 무역마찰이 빗어지고 있는 가운데, 철강제품에 대한 대대적인 덤핑공세를 펼치고 있었다.
이는 타카키노믹스의 효과로 일본이 서서히 경기를 회복하고 있는 국면과는 정반대의 행위였다.
그들의 목적과 덤핑배경에 대해서는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모든 것은 결국 미국과의 분쟁 때문에 생긴 일이었다.
"···결국 제 살 깎아먹기가 될 텐데, 다들 현 상황의 심각성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군요."
"그렇겠지요. 아마 1~2년 안에 아시아의 건설사들이 줄줄이 부도를 맞을 겁니다."
현재도 한국의 건설업계는 한 달에도 백 개가 넘는 폐업딱지가 나붙고 있었다.
워낙 매물이 많아서 인수합병 시장에서도 건설은 한 차례 거른다는 얘기가 있을 정도였다.
이번에는 천우조차도 신중할 수밖에 없었다.
"각 정부에서는 어떤 조치를 취하고 있습니까?"
"우선 대표님께서 말씀하셨던 기업구조의 개편은 이뤄지고 있습니다만, 아직 속도가 워낙 느려서 1~2년 안에 효과를 기대하긴 힘들 것 같습니다."
"잘못하면 조각을 부수고 다시 조립해야 할 수도 있겠네요?"
"그럴 공산이 크긴 하지요."
태국과 한국은 분명 기업쇄신을 통해 국가경쟁력을 키우겠다고 다짐했었다.
허나 의지는 있으나 실행력이 없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지금이야 그리 큰 문제가 없습니다만, 이와 같은 사태가 계속된다면 사업철수까지도 생각해봐야 할 것이라고 사료됩니다."
"흐음."
경영이나 정치나 모두 다 사람이 하는 것이다.
만약 계획한 모든 것이 뜻대로만 풀렸다면 이 세상에 빈민층이 존재할 리가 없었다.
허나 천우에게 있어서 변수라는 건, 결국 위기에서 기회를 만들어 낼 수 있는 가장 좋은 수단이었다.
"내버려두세요."
"···모두 다 말입니까?"
"대신 채무관계를 재정비하고 채권을 잘 관리해두세요. 나중에 달러화가 오른 만큼 우리가 그쪽 통화를 스와프 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손절하시는 것이 아니고요?"
"결국 손절이라는 것도 때에 따라서 그 방법이 전부 다 다릅니다. 단순히 잘라낸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아아!"
손해를 감수하면서 현상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최대한의 이익을 위해 한 발 더 앞서나가는 것.
천우는 HC에게 그런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모두에게 알리세요. 손절을 얘기하자면 올바른 손절방법부터 가지고 오라고요."
***
체스터 카렐 센트럴의 본사 51층.
자금관리총괄사장 겸 체스터 카렐 센트럴의 부회장 애덤 카퍼필드가 잡고 있던 신문을 와락 구겼다.
그건 바로 HC컴퍼니와 슈팅스타에 대한 소식이 든 신문이었다.
"···아주 씨도 못 뿌리게 싹을 잘라버렸어야 했는데, 아깝게 되었군. 이제는 우리가 직접 손을 쓰기도 부담스러운 지경이 되어 버렸잖아?"
"그래봤자 애송이입니다. 크게 신경 쓸 부분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만."
"뭐, 그럴 수도 있지. 하지만 생각해봐. 지금까지 내동 가만히 있던줄리아나 카렐이 이탈리아로 간 것부터가 난 좀 의심스러운데."
"설마하니 그녀가 뭔가 새로운 세력을 구축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그 여자 성격에 어딜 가든 그냥 움직일 리는 없어."
뭘 하든 간에 줄리아나 카렐은 명확한 목적이 있었다.
그건 줄리아나를 오래 겪어 본 애덤 카퍼필드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그녀가 젊은 시절, 애덤 카퍼필드는 일거수일투족을 함께하는 줄리아나 카렐의 페이스메이커이자 비서였다.
비록 재산분할과정에서 그녀를 배신하긴 했지만 이 회사에서 그녀를 애덤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그녀의 외가부터 좀 잘 살펴봐. 이탈리아 쪽에 연줄이 닿는 곳이 있나?"
"있기는 합니다만, 저쪽도 워낙 만만치 않은 세력이라서 말입니다."
"만만치 않겠지. 하지만 그래서 더 예의주시 할 필요가 있다는 거야. 실력 좋은 스파이 한 명 고용해봐. 분명 우리에게 도움이 될 거야."
"예, 알겠습니다."
애덤 카퍼필드는 엄청난 야심가였다.
그는 기차역에서 콜라를 팔던 가난한 소년에서 투자전문가를 거쳐 이 자리까지 왔다.
'···내가 어떻게 해서 여기까지 왔는데, 두 손 놓고 당할 줄 알았나?'
그가 생각하는 가장 끔찍한 상상은 줄리아나 카렐이 자식과 손자를 앞세워 곧 벌어질 카렐 가문의 제 2차 왕자의 난에 참가하는 것이었다.
체스터 카렐이 타계했을 당시에야 줄리아나 카렐이 재산에 욕심이 없었다곤 하지만, 그가 생각하기에 돈이라는 건 굳이 욕심 때문에 집착하게 되는 존재만은 아니었다.
형제와 종친, 관계자들의 냉정하고 비열했던 과거의 처사가 그녀에게 복수심을 심어주었다면 재산에 집착하게 만들 수도 있다, 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는 불안해졌다.
"그 여자의 일거수일투족을 다 감시해. 할 수 있다면 주변인물까지도 탐색하고."
"예, 알겠습니다."
< 36.(2) > 끝
ⓒ 풍류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