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 >
36.
로이 조로스는 자신은 반드시 이길 것이라고 생각했다.
저쪽은 이제 막 피어난 새싹, 자신은 이미 이 업계의 거목이 되어있었기 때문이었다.
"자금의 차이, 관록의 차이가 뭔지 제대로 보여주지."
"진심이십니까···?"
"물량이 나오는 족족 다 사들여. 특히나 CDS쪽으로."
"지금도 무려 150억 달러 이상이 풀렸습니다. 그걸 다 사면 지불할 프리미엄만 해도 상당합니다. 그런데···."
"괜찮아. 일단 채권수익으로 어떻게 대처할 수 있는 수준이잖아?"
"당장은 그렇습니다만, 이 물량을 다 감당한다면 프리미엄만으로도 손해를 볼 수 있습니다."
"결국 1년만 버티면 우리가 이기는 게임이다. 진행시켜."
로이 조로스는 자신의 압도적 자금력이 이 판을 한 방에 뒤집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며칠 후, HC는 또 다시 CDS와 채권관련 파생상품을 또 찍어내기 시작했다.
시장에서는 HC가 무리하는 것이 아니냐, 잘못하면 한 방에 파산할 지도 모른다고 걱정하기도 했다.
이에, 태국 정부에서는 민간에 대한 CDS구매를 통제하기 시작했다.
원래 CDS의 태국시장 내수가 거의 전무하기도 했었지만 전면통제가 이뤄진다는 건 대외적 이미지가 크게 실추되는 일이었다.
로이 조로스는 웃었다.
"후후, 그러면 그렇지. 저런 꼬맹이가 우리와 같은 거목을 쓰러뜨릴 수 있을 리가 없어."
최근, 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에서도 바트화 시장에 대한 관심을 높이고 해당 재화를 사들이는 추세였다.
만약 이대로 HC가 추락한다면 동남아시아는 한 방에 금융위기를 경험하게 될 것이 분명했다.
로이 조로스는 CDS의 추가구매를 서둘렀다.
"자금을 더 끌어와. 어디서 조달하는 것이 가장 빠르겠나?"
"자카르타의 채권을 매각하시고 일본에서 자금을 동원하면 됩니다."
"좋아, 그대로 실행해."
"투자가격은 어느 정도로 정할까요?"
"저놈이 CDS를 수용할 수 있는 한계치의 최대지점까지 몰아붙여."
"예, 알겠습니다."
한 편.
천우는 태국정부와 긴밀하게 연락을 주고받으면서 금융시장을 쥐었다 폈다 반복하고 있었다.
태국정부를 움직여서 기업을 옭죈 것도 천우였고 CDS 시장에 제동을 건 것도 천우였다.
이 모든 것은 그의 철저한 계획 하에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CDS의 판매가 구미의 투기세력에게 집중되고 있습니다. 그 금액이 200억 달러 수준입니다."
"후후, 좋아. 아주 자기들의 무덤을 스스로 파고 있군 그래."
수익률은 높지만 일반인은 구매가 불가능한 상품들.
투기세력은 그것들을 싹 긁어모아 미친 듯이 매입하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 중심에는 언제나 그렇듯 로이 조로스가 있었다.
지금 HC가 거두어들이고 있는 프리미엄만 해도 채권수익을 앞지를 정도였다.
항간에선 HC가 방어에 실패한다면 동남아의 금융시장이 통째로 붕괴될 것이라고 걱정했다.
허나 그럴 일은 절대로 없을 것이었다.
천우는 이미 필승전략까지 세워두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96년 5월이 되었다.
드디어 운명의 그날이 다가왔다.
이제 로이 조로스의 대대적 바트화 투매시점이 도래한 것이었다.
태국 총리관저 안.
엄청난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다.
"장이 열렸습니다."
"후우···."
정확히 오늘, 천우는 로이 조로스가 바트화를 대거 던질 것이라고 예상했다.
오전 3시.
"바트화를 투매하는 세력이 등장했습니다!"
"드디어!"
"빠르게 매각하고 있습니다! 물량이 거의 달러화 억대 수준입니다!"
한 방에 이정도 물량을 쏟아내고 그걸 소화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있을까.
헌데 그보다 더 앞서나가는 사람이 있었다.
"···어라? 그런데 그 물량을 족족 받아내는 사람이 있습니다."
"억 대 투매를 받아들이고 있다고? HC도 이제는 물량이 다 되었을 텐데."
"아아! 그들이 정체를 밝혔습니다! 슈팅스타 그룹이랍니다!"
"허어!"
그들은 지금까지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
슈팅스타는 HC의 막강한 동맹세력이고 그들의 자금력은 현재로서는 세계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라는 것을 말이다.
"바트화, 상승합니다!"
"오오!"
이제는 로이 조로스의 오줌보가 간질간질 거릴 타이밍이었다.
한 편.
말레이시아 정부는 자국 화폐의 방어대책으로 바트화를 구매하기로 했다.
그동안 관망으로 일관하고 있었던 말레이시아 정부가 태국의 통화 방어에 전격 나서기로 한 것이었다.
그들은 슈퍼보이의 동맹세력인 슈팅스타의 개입으로 인해 자극을 받아 대량의 달러화를 풀기로 마음먹은 것이었다.
이로서 바트화의 추락은 완벽하게 방어된 셈이었다.
같은 시각.
로이 조로스는 엄청난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었다.
"빌어먹을! 저놈이 슈팅스타를 비장의 무기로 숨겨놓았을 줄이야!"
지금까지 슈팅스타는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었다.
HC가 CDS로 자금을 모집하고 있는 동안에도 그들은 완벽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심지어 로이 조로스가 100억 달러 대 CDS를 조달하여 프리미엄을 꼬박꼬박 지출하며 기회를 노리고 있을 때에도 가만히 있었다.
그러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나서서 바트화를 미친 듯이 사들이기 시작한 것이었다.
슈팅스타의 자금력은 실로 엄청났다.
로이 조로스가 동원할 수 있는 한계점에 도달했음에도 슈팅스타는 정말 단 한 치의 물러섬도 없었다.
"실패인가···?"
그는 이보다 더 큰 공매도에 돈을 걸어본 적도 있었다.
금융에 관해서는 그 누구보다 깊은 혜안이 있다고 믿었고 그것이 자신감으로 나타나 자금시장을 좌지우지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다음 날 아침.
바트화는 절상국면을 맞이하였다.
하여 슈팅스타는 아주 천천히 바트화를 매각하기 시작했고 시장은 자연스럽게 정상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월스트리트 머니 투데이와 USA투데이 등 유수의 신문사들이 이 기사를 다루었고 특히나 그에게 큰 피해를 입었던 영국언론들은 '로이 조로스의 대대적인 공매도(big short)가 한 방에 무너졌다'고 조롱했다.
영국언론은 바트화 안정세가 시작된 이후 곧바로 슈퍼보이를 찾아가 인터뷰했다.
그는 신문사와의 인터뷰에서
'천지분간 못한 사람이 바보 아니겠나?'
라고 조소했다.
촤라라락!
로이 조로스는 신문을 갈가리 찢어서 뿌려버렸다.
"제기랄! 이런 빌어먹을 애송이가 감히!"
어찌나 열 받았으면 그는 뒷목이 빳빳해지는 느낌까지 받았다.
순간, 그의 신영이 일순간 휘청거렸다.
피잉!
"허억!"
분통이 터져 혈액이 순식간에 뒷목을 타고 뇌로 흘러들어왔던 것이다.
곧바로 응급실로 옮겨져 치료를 받은 그에게 의사가 말했다.
"큰 이상은 없네요. 다행입니다. 아무래도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으셨던 모양인데, 이제부터는 좀 자제하시죠."
"끄응."
그의 눈에는 천우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아마도 지금 이 순간에도 그의 뒤통수에 대고 조소를 날리고 있을 천우를 생각하니 다시 열이 뻗쳐 왔다.
"젠장···."
바로 그때였다.
주륵.
그의 코를 타고 새빨간 선혈이 흘러내렸다.
"어, 어라?"
"허참. 제가 자중하라고 말씀드린 지 채 30초도 안 지났습니다만?"
과연 이 순간 침착할 수 있을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이참에 요가라도 배워서 심신을 안정시켜야 하나, 로이 조로스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
이른 아침부터 한양 최 씨 일가의 저택으로 사람이 찾아왔다.
바로 최석재였다.
천우는 얼마 전부터 최석재에게 약간의 시간을 좀 달라고 부탁을 받아왔었다.
태국의 환율을 방어하느라 정신이 없었으나 천우의 태도는 완강했었다.
그는 한국정부를 손절하겠노라 마음먹은 것이었다.
"자꾸 이러시면 정말 곤란한데요."
"···죄송합니다! 하지만 저도 목숨이 걸린 일인지라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이것 참."
오늘 아침에는 현관문을 열어보니 대문 앞에서 석고대죄를 하고 있는 최석재가 발견되었다.
천우는 황당한 나머지 슬리퍼도 신지 않은 채 달려가 대문을 열어주었다.
다른 건 몰라도 최 씨 일가가 대대로 살아온 이 땅 위에 요상한 소문 같은 걸 퍼트리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자꾸 이러시면 다음엔 발로 확 걷어 차 버릴 겁니다."
"그래도 대표님을 만날 수 있다면야 몇 번이고 차일 자신이 있습니다!"
최석재가 이렇게도 질척거리는 사람이었던가.
그는 결정적인 순간에 줏대가 없는 만큼 뭔가를 간절히 원해서 남의 집 앞에서 석고대죄를 할 사람은 절대로 아니었다.
허나 상황이라는 것이 사람을 이렇게 만든 것이었다.
"뭐, 아무튼 간에 찾아온 김에 할 말이 있으면 하고 가시죠. 노력이 가상해서 들어는 드릴 테니."
"감사합니다!"
그는 천우의 앞에 김중대 의원의 친서를 내려놓았다.
천우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게 뭡니까?"
"대한민국이 바뀌어야 한다, 그리고 금융위기를 정면으로 돌파해야 한다는 내용의 친서입니다. 제가 김중대 의원을 설득해서 여당을 압박하기로 했습니다. 이 친서는 당신에게 도움을 바란다는 일종의 러브콜 메시지라고 할 수 있겠죠."
김중대는 대한민국의 근본적인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서 경제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역설하면서 일본의 재무성 고문을 맡아주었던 것처럼 대한민국 정부에서도 큰일을 해주었으면 한다고 적어두었다.
제법 절절한 문구였다. 게다가 사람이 무릎까지 꿇었으니 시각적인 효과도 꽤 대단하다고 볼 수 있었다.
허나 문제는 정작 중요한 천우의 마음은 쉽게 움직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내가 당신들을 돕는다면 당신들은 나에게 뭘 줄지 아직 정하지 않았습니다. 협상을 하려면 그것부터 고려해봐야 하는 거 아닙니까?"
"그야 당연히."
최석재는 또 다른 한 통의 편지를 꺼내들었다.
이번에는 김용필에게서 온 것이었다.
그는 천우에게 추후 종금사 관련 법안을 개정하여 HC를 대한민국의 유일무이한 해외자본 세력으로 만들어주겠다고 적어두었다.
그러면서 이제부터 HC가 원하는 조건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겠다고도 적어두었다.
"김용필 의원이···?"
"삼김체제에서 김삼영을 묻어버리고 김중대를 대통령으로 올린 후에 대한민국 경제를 한 단계 더 위로 끌어올리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으음."
"우리 정부는 당신에게 거는 기대가 큰 만큼 많은 것을 줄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 점을 알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사실, 천우는 최석재가 김용필까지 움직였을 것이라곤 전혀 예상하지 못했었다.
아니 그보다 더 근본적으로 최석재가 이렇게까지 집요한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곤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생각보다 더 쓸 만한 사람이로군.'
최석재의 인물평점이 절하되었던 이유는 그가 줏대 없는 남자였기 때문이었다.
헌데 지금은 그 결점을 완벽하게 보완해냈다.
-인물평점을 수정해야겠네요. 4.5점, 4.5점으로 수정하겠습니다.
마샤는 즉각적으로 자신을 업데이트 하는 존재임으로 그에 대한 평가도 즉시 수정되었다.
천우는 최석재를 한 번 믿어보기로 했다.
"만약 약속을 지키지 못한다면 그 즉시 손절입니다. 아시죠?"
"물론입니다!"
"그리고 다음 정권에서 당신들이 실권을 잡지 못한다면···."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YP가 JD를 밀어준다면 대통령이 못 될 이유가 전혀 없지 않겠습니까?"
"하긴."
과연 저들이 천우에게 무엇을 얼마나 줄 수 있을까.
때에 따라선 중도하차를 할 수도 있겠지만 일단 천우는 저들과 손을 잡아보기로 했다.
< 36.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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