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2) >
35.(2)
태국 타왈리 용차이 총리관저 안.
타왈리 용차이 총리는 천우가 제안한 바트화 투매방어 방안을 몇 번이고 다시 검토하였다.
천우는 1년 동안 바트화 투기세력으로부터 태국을 보호해준다는 조건으로 몇 가지 요구를 내걸었다.
1년이면 수지개선이 충분한 시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쉽사리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
"1년을 방어해준다···."
"그렇습니다."
"사실, 저는 당신들이나 조로스 쪽 사람들이나 모두 믿기 힘듭니다. 로이 조로스를 쫓아냈다가 당신이 더 악랄한 짓을 한다면 우린 어쩌란 말입니까?"
"모든 것은 상대적인 법이죠. 우리가 태국 바트화 폭락을 막아주는 대신 받아낼 몇 가지 조건들이 정부로선 마뜩찮을 것이 분명합니다. 이해합니다, 충분히."
"그러니까, 어떤 쪽을 선택하든 피해는 있을 것이다, 그러니···."
"신중하게 결정하십시오. 저희들을 선택하지 않는다고 해서 압박을 가하거나 협박을 할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그러니 그건 안심하셔도 좋습니다."
천우는 날개 잃은 천사가 아니다.
필요하다면 고향의 정부와도 담을 쌓을 사람이 태국이라고 해서 별다를 것이 있을까?
허나 아까 천우가 말했듯이 모든 것은 상대적인 법이다.
태국에서 천우가 필요하다면 손을 잡는 것이고 반대로 로이 조로스가 필요하다면 그와 손을 잡으면 된다.
그저 현재의 태국에게 천우가 상대적으로 더 필요한 것뿐이었다.
타왈리 용차이 총리는 자신도 모르게 실소를 흘렸다.
"두 마리 늑대 중에 뭘 골라야 할지 고민하게 될 줄이야. 이것 참···."
"세상만사 다 그렇게 돌아가는 것 아니겠습니까."
천우는 저들에게 HC계열 투자은행에 대한 자본유입 제한을 완화해달라고 요구했다. 그러면서 채권매입 및 부실채권 처리에 대한 권한을 대폭 상향해달라고도 말했다.
타왈리 용차이 입장에서 본다면 사실 그놈이 그놈일 지도 모른다.
허나 천우는 단 한 발도 양보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그렇지만 제가 타이펀드에 발을 담근다면 분명 좋은 일도 있을 겁니다. 동북아시아 시장과의 본격적인 거래 및 투자 등을 유치하거나 중국, 러시아 등지로 같이 인프라 러시를 해 볼 수도 있겠죠."
"으음."
"제 생각에는 결코 나쁘지 않은 거래라고 생각됩니다만?"
동북아 니스(신흥공업국)와의 거래는 생각보다 괜찮은 수입을 가져다 줄 것이다.
물론, 지금도 무역을 하지 않는 건 아니지만 HC라는 세력에게 한 다리 걸치는 것과는 이익금의 규모 자체가 다르다.
게다가 천우는 일본에까지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하는 인물이 아니던가.
타왈리 용차이 총리는 별다른 대안을 찾지 못했다.
"그럼 당신의 말대로 한 번 해봅시다."
"그래요. 합리적인 선택을 하실 줄 알았습니다."
"그나저나 어떻게 투기세력을 잠재운다는 겁니까?"
"일단은 국가신용도를 먼저 회복하는 것이 중요하겠죠."
"국가신용도라."
"현재 태국에도 해외은행이 많이 들어와 있고 해외에서 차관도 꽤 많이 끌어온 상태일 겁니다."
"뭐, 그렇긴 하죠."
천우는 태국 채권에 대한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세력들을 정리해서 나열해두었다.
미리 준비한 서류들을 탁자 위에 쫙 깔아둔 그는 이들의 자본을 먼저 묶을 수 있는 전략을 내어놓았다.
"국가신용도가 하락한다는 건 다시 말해서 유입되었던 해외자본에게 자금회수의 빌미를 제공하는 것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일단 우리가 대량의 채권을 매입하고 부실채권 등을 정리하면서 신용도를 투자부적격 수준으로 떨어지지 않도록 방어하는 것이 급선
무입니다."
"아하, 그래서 채권매입의 권리를 달라고 한 것이로군요."
"그런 측면이 있었죠."
천우는 3대 신용평가기관(S&P, 무티스, 피치)에 대한 태국의 신용등급이 사실상 A등급군에서 B등급군으로 급락할 가능성도 있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태국의 바트화 투매가 AA등급이었던 태국의 신용등급을 A-수준까지 끌어내렸고, 만약 이대로 등급이 몇 단계 하락한다면 사실상의 투자부적격 판정을 받을 수도 있었다.
급격한 국가신용도의 하락은 외국계 산업은행의 자금회수를 부추기는 요인이 될 수 있었다.
때문에 천우는 그것부터 정리하려는 것이었다.
"우리가 부실채권을 정리하면 국가신용도는 더 이상 하락하지 않을 겁니다. 다만, 문제는 제가 아무리 채권을 회수해서 A-에 걸쳐 있는 태국의 국가신용도를 지켜낸다고 해도 바트화 투매가 시작되면 돌이킬 수가 없을 겁니다. 그래서 태국 정부에서 우리가
CDS를 풀 수 있도록 도와주셔야합니다."
"CDS? 신용부도스와프 말입니까?"
"네, 그렇습니다. 저들은 어차피 바트화가 폭락할 것이라고 생각할 겁니다. 저는 태국을 비롯한 동남아시장에 꽤 많은 돈을 투자하였고, 그것을 방어하기 위해서 몸부림치는 것으로 보일 테죠. 그런 그들에게 CDS를 돌린다면 분명 구매할 겁니다."
타왈리 용차이 총리는 분명 군부출신에 한국전쟁에도 참전했던 괄괄한 인물이지만 국제질서나 경제가 돌아가는 판도를 아예 모르는 문외한은 아니었다.
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 다 좋아요. 핫머니의 바트화 투매를 진정시키고 국가신용도를 높인다고 칩시다. 하지만 그 많은 상품들에 대한 리스크 측정 및 등급조정 등에 필요한 계산은 누가 다 하는데요?"
"누가 하긴요. 저와 HC의 직원들이 하죠."
"···그게 가능합니까?"
"HC에는 인재가 많습니다. 제가 방향성만 제시해주면 그들이 알아서 작품을 만들어 낼 겁니다."
"까딱 잘못하면 엄청난 보상금을 지급해야 한다고 들었는데, 그걸 다 어찌 감당하시려고요?"
타왈리 용차이 총리는 보기보다 걱정이 많은 사람이었다.
천우는 그 모든 것을 한 방에 정리해버렸다.
"안 망하면 됩니다."
"크흠!"
타왈리 용차이는 내심 크게 놀랐다.
아무리 슈퍼보이가 대단하다곤 해도 이제 겨우 박사학위나 취득한 애송이였다.
그런데 그 배짱이 일국의 총리정도는 가볍게 뺨칠 정도였던 것이다.
'보통 인물은 아니로군.'
과연 이 슈퍼보이라는 사람이 도대체 어디까지 성장할 것인가, 그는 자신도 모르게 기대하고 있었다.
"판매는 제가 알아서 할 테니 총리님께서는 제가 제안한 조건들이나 충족시켜주십시오. 그럼 앞으로 1년 내로 저놈들이 전부 나가떨어질 겁니다."
"으음."
안 그래도 바트화 투매로 인한 화폐절하와 외화유출 문제, 그리고 각종 정치스캔들로 인하여 현 정권은 퇴진을 요구받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그가 가진 선택지는 별로 없었다.
게다가 슈퍼보이가 함께한다지 않던가.
"···그렇게 합시다. 지금 당장 국회의원들과 내각을 설득해보겠습니다."
"내각은 그렇다 치고 국회는 어떻게 설득하시게요?"
"내 목숨을 걸어야죠. 별 수 있습니까."
마음을 먹기 시작한 순간부터 그는 절대 멈추지 않는 뚝? ??? 있었다.
천우는 그런 뚝심을 잘 알고 있었기에 무작정 총리관저를 찾아오면서도 의연했던 것이다.
"그럼 저는 물밑작업을 시작하겠습니다. 준비는 알아서 해주시리라 믿습니다."
"물론입니다."
"다만, 한 가지 명심하십시오. 근본적인 산업구조의 구조조정이 없다면 우리가 아무리 바트화를 방어해도 고작 2년이 한계입니다. 저는 약속대로 바트화 투기를 1년 동안 방어해드릴 것이고 그 시한이 지나면 우리도 철수를 고려할 시기가 올 지도 모릅니다. 그
러니 산업구조 개선에 적극적으로 나서주십시오."
"으음, 알겠습니다. 그리하죠."
천우는 이번 사건으로 아예 로이 조로스를 따르는 투기세력을 한 방에 찌그러트릴 생각이었다.
***
HC가 바트화 관련 채권을 30억 달러 이상 빠르게 매입하였다.
마침 태국에서 발을 빼려던 상업은행들은 일대 고민에 빠져들었다.
"이렇게 되면 채무상환능력을 재평가해야 하는데, 어쩌면 좋죠?"
"흐음."
영국계 상업은행 맨체스터 센트럴 뱅크는 국가신용도 하락에 이어 태국계 은행들의 채무상환능력에 대한 의구심을 갖기 시작했었다.
허나 HC가 태국의 채권을 진공청소기처럼 빨아들이면서 약간의 혼란이 찾아온 것이었다.
맨체스터 센트럴 뱅크와 손을 잡고 태국으로 들어온 미국계 은행들의 입장도 마찬가지였다.
HC가 동남아에 수 십 억 달러의 돈을 박아둔 것은 유명한 일화였다.
그들이 작정하고 방어에 나선다면 굳이 태국시장에서 철수할 이유는 없었기에 이들의 고민은 커져 있었던 것이다.
바로 그때였다.
"태국에서 기업부채 및 민간 부실채권의 대대적인 정리수순에 들어간답니다."
"호오···?"
"아마도 대수술이 이어질 것이라는 평입니다."
HC가 채권회수에 나섬에 따라서 국채에 부담을 일부 덜어낸 태국정부가 아예 대대적으로 채질개선에 나서기 시작한 것이었다.
만약 그렇다면 상업은행이 철수할 이유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우리 MSB는 철수하지 않겠습니다."
"흐음, 그렇다면야···."
맨체스터 센트럴 뱅크를 시작으로 구미의 산업은행들이 자본금 유지 및 태국계 해외차관을 회수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96년 3월.
태국에 대한 S&P의 신용평가가 A등급으로 상향조정되었다.
타왈리 용차이 총리는 기업의 구조조정에 성공하여 대대적인 부실채권을 정리하게 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HC가 채권을 추가로 인수하여 부채비율이 상당부분 완화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3월 중순, HC는 새로운 금융상품을 시중에 내놓게 되었다.
그건 바로 CDS였다.
HC투자는 토플러 마빈스와 손잡고 이른 바 '타이CDS'를 찍어내기 시작했다.
타이CDS, 약칭 TCDS가 출시됨에 따라서 해외투자금융들이 바트화에서 CDS로 눈을 돌렸다.
허나 이들이 처음 시장에 나왔을 때에는 찬밥취급을 받았다.
CDS관련 상품의 구매율이 채 1%도 채 되지 않았다.
로이 조로스가 이미 모라토리움 사태를 예견했다면서 한 바탕 타이펀드 시장을 뒤흔들어 놓는 바람에 구미의 투기세력이 귀를 닫아버렸던 것이다.
그런데 이변이 일어났다.
록 베넷이 타이관련 채권시장에 뜬 것이었다.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초도금액은 그리 크지 않았지만 그는 약 2개월에 걸쳐 천천히 채권을 매입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TCDS와 그 파생상품 수요가 서서히 오르기 시작한 것이었다.
심지어 월가의 저명한 경제잡지인 '월스트리트 머니 투데이'는 록 베넷과의 인터뷰를 진행했는데, 여기서 록 베넷은 'TCDS는 매우 재미있는 상품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TCDS가 성공한다면 앞으로 CDS시장은 더더욱 팽창할 것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는 태국 바트화 투매로 몰리던 핫머니의 시선을 돌리는 계기가 되었다.
4월 말, 드디어 바트화 투매 기류가 매수 형태로 전환되기 시작한 것이었다.
콰앙!
로이 조로스의 집무용 책상이 들썩 거렸다.
투기라는 건 기류와 기세가 거의 90% 이상을 차지한다.
애써 투매로 기류를 바꾸어놓았더니 엉뚱한 놈이 치고 들어와서 매수로 기류를 전환시켜버렸으니, 그의 몇 년 농사가 수포로 돌아가게 생겼다.
"제기랄, 기껏 떡밥 다 뿌려놨더니 이상한 방법으로 회수를 하는군."
"어떻게 할까요? 우리도 TCDS를 구매할까요?"
어쩌면 기회였다.
만약 지금 CDS를 구매했다가 1년 안에 태국 금융시장이 주저앉아버리면 로이 조로스는 HC의 돈을 쫙 빨아먹고 단숨에 그를 짓밟아버릴 수 있기 때문이었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역시 돈이었다.
바트화를 100억 달러 이상 구매했던 그에게 CDS의 프리미엄은 상당한 부담이었던 것이다.그의 측근들 중 몇몇이 CDS구매를 반대하고 나섰다.
"안 됩니다. 그랬다가 자금이 역류하기라도 하면 우리는 손절도 제대로 못 한 채 이 바닥에서 빠져야합니다."
"으음."
"결정하시지요."
HC와 록 베넷, 그리고 토플러 마빈스까지.
생각지도 못했던 세력의 개입에 그의 고심은 깊어져만 갔다.
허나 그는 결단을 내렸다.
"구매한다."
"예···?"
< 35.(2) > 끝
ⓒ 풍류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