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 >
35.
로이 조로스는 천우에게 뜻밖의 제안을 했다.
그는 천우에게 환율시장에서의 전쟁보다는 자신과의 동맹을 주장했던 것이다.
-바트화 시장의 양분, 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입니까? 당신과 내가 힘을 합친다면 저따위 아시아 시장이야 햄버거 페티처럼 씹어 삼킬 수 있는데 말이죠.
"으음."
-어떻습니까? 나와 당신이 정확히 반반으로 시장을 나누는 겁니다. 이정도면 꽤나 괜찮은 조건 같은데요.
"양분이라. 50대 50으로요?"
-물론이죠!
협잡꾼들의 가장 큰 특징이라고 한다면 말이 너무 많다는 점이었다.
지나친 허풍, 허세, 그리고 절대 지킬 리 없는 약속까지.
'이런 협잡꾼 새끼가 누굴 봉으로 아나.'
천우는 로이 조로스가 어떤 사람인지 대충 알고 있다.
인물도감에 따르면 로이 조로스는 대단한 투자가이자 이타주의 적 자선사업가로 알려져 있지만 지독한 환투기 꾼이라는 양면적 면모를 가진 사람이었다.
그의 양면적 모습들에 대해 의견이 분분했지만, 오늘의 통화를 바탕으로 천우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다른 건 몰라도 바트화 투기시장을 그가 쥐락펴락해서 태국의 경제위기를 몰고 온 것은 사실이라는 것을 말이다.
천우는 다시금 다짐했다.
"당신과 손잡는 일은 절대로 없을 것 같은데요."
-이렇게 거대한 이익을 눈앞에 두고도 결국 자신의 고집을 따라가겠다고요? 경제학적인 측면에서 볼 때, 당신은 지금 대단히 큰 실수를 하고 있는 겁니다.
"경제학이고 나발이고 저는 그런 거 잘 모릅니다. 그저 내 이익을 좇을 뿐이죠."
-쯧, 이래서 카렐 학파들이 안 되는 건데. 알려줘도 싫다면 어쩔 수 없죠.
이제는 하다하다 남의 증조부까지 들먹이다니, 그에게 있어 이득보다 중요한 선은 아마 없는 것이 분명했다.
천우는 웃으며 말했다.
"당신이 어디서 경제학과 경영학을 배웠는지 모르겠지만 그 이론, 엉터리라는 걸 보여드리도록 하죠."
-후후, 기대하겠습니다.
그렇게 전화는 끊어졌다.
김영실은 천우의 옆에서 긴 한숨을 쭉 뿜어냈다.
"···결국 싸우시게요?"
"이길 수 있습니다."
"로이 조로스는 보통 인물이 아닙니다. 어찌 하시려고···."
"저쪽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면 저 역시 그렇게 해줄 겁니다."
"끄응."
"일단 태국정부와 접촉해주세요. 그들과 협상부터 좀 해야겠어요."
"당장 자리를 마련할까요?"
"일단 제가 미국에 다녀온 이후로 방문일정을 잡아주시면 좋겠네요."
"미국이요?"
"저쪽이 세력을 동원한다면 저 역시 세력을 동원해야지요."
천우는 태국정부와 만나기 전에 우선 록 베넷과 다니엘 마빈스부터 만나보기로 했다.
록 베넷은 3일 전에 미리 연락을 해야 만날 수 있는 인물이기에 천우는 사전에 연락부터 해놓고 기다렸다.
삼일 후, 록 베넷이 천우를 단골식당으로 초대했다.
그는 천우와의 식사를 힐링타임으로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여기서 담소를 나누며 경제학을 논하기도 했고 투자방향에 대한 의견을 주고받기도 했다.
"바트화 투매라?"
"제가 방어에 나선다면 과연 승산이 있을까요?"
"글쎄. 저들이 자금을 얼마나 동원할지는 모르겠지만 조로스라는 자의 성향으로 볼 땐, 이겨도 이긴 게 아닐 것 같은데."
"결국 제가 섣부른 판단을 한 것일까요?"
"그야 자네 하기 나름 아니겠나."
록 베넷은 천우에게 힌트를 주었다.
그는 냅킨을 몇 장 뽑아서 별표를 그렸다.
"이 한 장, 한 장이 자네가 쥔 카드라고 치세. 그리고 이건 저쪽에서도 가지고 있지. 그렇다면 이걸 먼저 오픈하는 사람이 유리할까, 나중에 오픈하는 사람이 불리할까?"
"나중에?"
"아니, 그렇지 않아."
록 베넷은 냅킨 일곱 장 중 여섯 장을 오픈해두었다.
마치 세븐포커의 히든카드처럼 말이다.
"앞선 여섯 장은 히든카드를 위한 종이일 뿐이야. 진짜 중요한 건 자네만 아는 그 한 장, 히든카드인 것이지."
"마지막 한 방을 숨기고 나머지를 오픈해서 심리전을 펼치라는 말씀이신가요?"
"그런 셈이지."
"흐음."
"그나저나 자네에게 비장의 무기는 있을 것인데, 그 마지막 한 방은 뭐야?"
"제가 가진 한 방은 말입니다···."
천우가 록 베넷을 찾아온 것은 이 마지막 한 방을 만들기 위함이었다.
그는 록 베넷이 로이 조로스의 카드라고 했던 일곱 장 안에서 한 장을 스윽 가지고 왔다.
"CDS입니다."
"아아! 신용부도스와프!"
"그가 자신의 가장 큰 힘이라고 믿고 있는 바로 그것, 저는 그것을 가지고 올 겁니다."
인간은 때론 너무 강력한 힘 때문에 무너지는 경우가 있다.
힘은 권력을 주지만, 가장 큰 문제는 인간이 그 힘을 컨트롤 할 수 없을 때에 나온다.
"CDS로 투기세력을 뒤흔들 겁니다. 그렇게 된다면 투기세력이 주춤할 수밖에는 없겠죠."
"하지만 저들이 자네가 던진 미끼를 그리 쉽게 물겠나?"
"물도록 만들어야지요. 그래서 제가 선배님을 찾아온 것 아니겠습니까."
"내가 강태공도 아니고 자네를 어찌 돕겠나?"
"간단합니다. 그냥 우량채권 몇 주만 사주시면 됩니다."
"우량채권···."
순간, 록 베넷의 두뇌가 회전하기 시작했다.
그는 수수깨끼를 푸는 걸 하나의 낙으로 삼는 사람이다.
그렇기에 천우는 그에게 굳이 잡을 주지 않았다.
잠시 후, 그가 슬그머니 웃었다.
"호오, 언론을 사용하고자 하는 건가?"
"저쪽에서도 언론을 사용했습니다. 저 역시 그러려는 것뿐입니다."
"하지만 그러자면 언론 쪽에도 지분이 조금 있어야 할 텐데?"
"직접 지분은 없습니다만, 인맥은 있지요. 다만, 문제는 선배님께서 신문 1면에 날 수도 있다는 점이겠습니다."
록 베넷은 웃으며 말했다.
"하하, 그래봤자 투자금 조금 손실되는 것에 불과하겠지."
"저는 선배님의 명성에 금이 갈까봐 걱정됩니다."
"그럴 일은 없어. 그저 소소한 투자일 뿐인데 뭐."
때론 누군가의 말 한 마디가 총질보다 더 무서울 때가 있는 법이다.
로이 조로스의 행동처럼 말이다.
"투자금은 얼마나 넣어줄까? 1억 달러면 되겠나?"
"아니요. 10만 달러면 충분합니다."
"으음? 그렇게 조금 넣어서 뭐가 되겠나?"
"중요한 건 이슈이지 자금의 크기가 아니잖습니까."
록 베넷은 어깨를 으쓱이며 너스레를 떨었다.
"나도 재미 좀 봐야지. 이름을 빌려 준 대가로 말이야."
"으음, 그건 그렇지만···."
"자네를 믿고 투자해주겠네. 한 번 잘 해봐."
기왕지사 터질 것이라면 이슈는 클수록 좋다는 것이 록 베넷의 지론이었다.
천우는 그에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선배님! 사랑합니다!"
"하하, 하여간 재미있는 친구야."
록 베넷과의 식사를 마친 후.
천우는 다니엘 마빈스를 만나기로 했다.
다니엘 마빈스는 천우와 함께 선상낚시에 나섰다.
바다 한 가운데 낚싯대를 드리운 두 사람은 바트화 시장에 대한 얘기를 나누었다.
"그러니까, CDS로 바트화를 방어하시겠다는 말씀이시죠?"
"한마디로 공갈 공매도를 미끼로 던지는 거죠."
"공갈 공매도라!"
"단순히 바트화 시장과 타이펀드 채권에 대한 CDS를 만들어서 뿌린다면 약발이 받지는 않을 겁니다. 하지만 HC투자가 토플러 마빈스와 엮여 CDS를 뿌린다면 얘기는 다르겠지요."
"오호! 좋은 생각이시군요. 하지만 사업가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한 가지 오류가 있네요."
"압니다. 제가 방어에 실패할 경우엔 엄청난 손실을 입게 되겠지요. 그래서 이름만 빌려달라는 겁니다."
많은 자금은 필요 없었다.
토플러 마빈스가 타이펀드 CDS 상품을 소량 만들어서 팔면 그 자체가 이슈화 될 것이다.
그들이 상품을 구성하면서 내보낼 설명문구가 이슈의 중심이 되는 것이었다.
다니엘 마빈스는 웃으며 말했다.
"뭐, 그렇다면 우리도 재미 좀 봤으면 하는데요. CDS상품을 왕창 만들어서 팔겠습니다."
"하지만 리스크가 너무 큽니다."
"당신의 계획대로만 된다면 망할 리는 없습니다. 나는 당신에게 걸겠습니다."
원래 천우의 의도는 이게 아니었지만 그래도 든든한 아군들의 신의를 확인하니 어쩐지 어깨가 든든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
말레이시아 마티하르 모하메드 총리는 아침부터 흥미로운 보고서를 한 장 받았다.
"HC가 태국정부와 접선하고 있다고?"
"자세한 내용까지는 알 수 없습니다만, HC의 한 관계자의 말에 따르자면 투자공조 차 HC의 대표이사가 타왈릿 총리와의 접선을 가질 예정이랍니다."
"HC도 환투기로 재미 좀 봤지?"
"재미를 본 정도가 아니라 제국을 이뤘지요. 다만 로이 조로스와는 갈래가 많이 다릅니다. 굳이 따진다면 반대세력이랄까요?"
"그렇다면 그쪽에서는 매도가 아니라 매수로 돌아설 수도 있겠군."
"이해관계에 따라서 말입니다."
"한 쪽에서는 판다고 지랄이고 한 쪽에서는 산다고 난리고?"
"어떻게 할까요? 우리도 이제 슬슬 방어준비를 해야 할 시기라고 생각합니다만."
태국의 바트화가 타격을 입는다면 말레이시아의 링깃화 역시 타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그에 대비하는 마티하르 총리 내각의 선택은 관망이었다.
"일단 좀 지켜보도록 하지. 만약 HC에서 바트화 수세로 나선다면 우리로서는 환영할 일 아닌가."
"하지만 그와 반대로 로이 조로스의 공격을 받을 수도 있지요. 지금은 태국을 겨냥하고 있습니다만, 그 다음 타깃이 우리로 바뀔지도 모를 일 아닙니까."
"그 전에 HC와 접선해서 연쇄방어망체인을 만들어놔야지."
"으음!"
"자네들 중에 HC와 친분이 있는 사람이 있다고 했나?"
"예, 그렇습니다."
"저쪽에서 좋아할 만한 물건 몇 개 들고 찾아가봐. 선물로는 무엇이 좋겠나?"
니와르 이브라힘 재무부장관은 자신의 뒤에 서 있던 차관 타미 벨루우 차관을 바라보며 눈짓했다.
그러자, 타미 벨루우 차관이 웃으며 말했다.
"저들은 자금적인 이득보다는 조세감면이나 채권매입권리 등과 같은 제도적 이득을 더 좋아합니다. 당장의 큰 이득에는 관심이 없는 편이지요."
"협상을 좋아하는 청년이라는 소리인가."
"예, 그렇습니다."
"진짜 장사꾼이로군. 뭐, 좋아. 재무부에서 적당한 협상안을 준비해서 기획서로 올려. 괜찮다 싶으면 도장을 찍어줄 테니."
"감사합니다."
그로부터 며칠 후.
태국 총리관저에서 열린 HC와의 회담에 천우가 참석하게 되었다.
그는 총리관저로 가는 길에 말레이시아 정부의 러브콜을 받았다.
"만약 우리가 태국과 손잡고 바트화 방어에 나서게 된다면 연쇄방어체인을 구성하자고 제안했습니다."
"그에 대한 조건으로는 뭐가 따라오죠?"
"말레이시아 채권 및 환율시장에 대한 대대적인 베네핏을 적용시켜주겠답니다. 대표적으로는 세금감면과 투자제재완화가 있습니다."
"나쁘지 않은데요? 오케이 하시죠."
천우는 말레이시아 정부 재무차관과 대학동창이라는 전속 투자전문가 알렉스에게 슬쩍 정보를 흘려주라고 말했었다.
그는 동창과의 술자리에서 HC가 태국과 접선할 것이라는 정보를 흘려놓았다.
결국 그들도 미끼를 물어버렸다.
말레이시아가 미끼를 물었으니 아마 인도네시아와 싱가포르에서도 슬슬 입질이 올 것이다.
'돗자리는 깔아놨고, 이제 윷판에 말만 얹어놓으면 되는 건가?'
< 35. > 끝
ⓒ 풍류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