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노머신 재벌 3세-69화 (69/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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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2)

태국의 경기침체로 인하여 급격하게 개방되었던 금융시장에 일대 위기가 찾아오고 있었다.

이는 태국만의 얘기가 아니었다.

동남아시아의 수지악화로 인하여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심지어는 금융 모범 국이라 불리는 싱가포르까지 몸살을 앓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던 와중에 핫머니(단기성 투기자본)의 치고 빠지는 바트화 투매가 연달아 터지고 있었다.

아직은 정부가 그럭저럭 대응할 정도의 수준이긴 하지만, 앞으로 1년을 더 버틸 수 있을지 없을 지는 미지수였다.

이 중요한 시점에서 시장을 뒤흔드는 발언이 있었다.

그건 바로 로이 조로스의 '태국, 인니 모라토리움'발언이었다.

로이 조로스는 최근 단기성 투기자본이 대량의 바트화 투매를 감행함에 따라서 달러화의 보유고가 극도로 낮아졌다면서 아마 향후 1년 안에 모라토리움이 도래할 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그의 발언을 담은 회사는 바로 월스트리트 데일리 저널.

세계 주식, 금융시장의 중심지인 월가에서도 가장 유서 깊고 저명한 언론으로 알려진 월스트리트 데일리 저널에 모라토리움이라는 단어가 실렸다는 건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일이었다.

불과 잡지 반 페이지에 실린 모라토리움 발언은 삽시간에 월가를 강타했다.

미국과 영국을 비롯한 구미의 핫머니가 태국의 바트화를 미친 듯이 쏟아내기 시작했다.

96년 1월.

천우가 대한민국 정부에게 요구했던 사안에 대한 답변이 돌아올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이었다.

그와 동시에 바트화에 대한 가파른 낙하소식이 들려왔다.

김영실은 태국시장에서의 철수를 진지하게 고려한다면서 그에 대한 기획안을 만들어 올렸다.

"태국시장에서 발을 빼는 것이 옳지 않나, 그리 생각됩니다. 그와 함께 인니,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등지에서도 투자 금을 빨리 회수하는 것이 옳다고 판단했습니다."

"동남아시아를 떠나자?"

"사장님께서 투자해두셨던 부동산은 아직 안정권입니다. 지금이라면 손절까진 아니고 적당한 선에서 투자를 마무리 지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로이 조로스의 모라토리움 발언 때문이죠?"

"그런 셈입니다."

"확실히 대단하긴 하네요. 한 사람의 발언이 통화시장을 쥐락펴락 할 수 있다니."

"그래도 대표님의 귀신 뺨치는 능력에는 한참 못 미치지 않습니까?"

"으음, 시장을 분석하는 능력은 당연히 그럴 테죠. 하지만 저에게는 없고 그에겐 있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대표님에게 없는 것?"

"배짱이죠."

시장의 흐름을 완벽하게 꿰차고 있다는 건 그만큼 투자에 유리한 부분이긴 하다.

허나 인간은 그만큼 방어적으로 변할 수밖에는 없다.

특히나 천우와 같은 영향력을 가진 사람이 대대적 투자를 감행하였을 때, 그에 따라 생길 인과관계를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 다음을 예측할 수 없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에 반해 로이 조로스와 같은 사람은 앞뒤 가리지 않고 달려드는 저돌적인 면을 가지고 있었다.

결국, 때로는 너무 완벽한 지식보다는 약간 무식한 것이 도움이 될 수도 있다는 소리였다.

"지금까지 로이 조로스가 걸어온 길을 한 번 보세요. 그가 인간이라면 절대 예측할 수 없는 변수들이 많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곳에 전 재산을 다 걸었죠. 잘못하면 깡통 차게 되는 투자였습니다. 허나 그는 결국 성공했고, 지금의 자리에 이르게

된 것이죠."

"한마디로 그는 운도 억세게 좋은 사람이라는 소리네요."

"그런 셈입니다."

천우가 생각하기에 로이 조로스는 무식하거나, 엄청나게 뛰어나거나, 둘 중에 하나였다.

다만 단순하게 무식하거나 머리가 뛰어난 것이 아니라 자기가 맞는다고 생각하는 일에는 하늘은 하늘이 두 쪽 나도 반드시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저들의 앞으로 계획은 어떻답니까?"

"모라토리움을 예견한 만큼, 아마 전력을 다해 투매에 올인 할 것으로 보입니다."

97년도에 태국이 IMF구제 금융을 받은 가장 큰 이유 중에 하나가 바로 로이 조로스와 같은 투기꾼들 때문이었다.

투기세력이 너무 강성해서 태국정부가 무려 1년을 싸우다가 지쳐서 결국 구제 금융을 신청하기에 이른 것이었다.

"으음, 부딪칠 수밖에 없겠는데."

물론, 엄연히 따진다면 천우도 아예 투기세력이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는 로이 조로스와는 갈래가 달랐다.

천우는 대세에 따라서 돈을 굴리는 사람이었고 로이 조로스는 자신의 영향력을 이용하여 투기세력을 집중시켜 큰 이득을 챙기는 사람이었다.

로이 조로스와 천우는 서로 상극인 셈이었다.

그러니 두 사람의 충돌은 지극히 자연적인 현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김영실은 이번 판세는 HC에게 불리한 쪽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예상했다.

"만약 우리가 저들과 부딪친다면 당연히 손해를 입게 될 겁니다. 차라리 그 전에 바트화 손절을 감행하시지요. 투기세력은 저쪽이 더 많고 규모도 더 큽니다."

"흐음···."

누가 뭐래도 대세는 뒤집기 힘들다.

아마 지금의 판도를 뒤집어 천우가 바트화 투매를 초기에 진화한다고 해도 경제위기는 막을 수 없을 것이었다.

천우라는 사람 한 명이 전 세계 금융시장을 전부 다 통제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지금으로서는 한 바탕 나라가 뒤집어진 후에 서서히 회복세를 거쳐 더 나은 나라가 되기를 바라는 수밖에는 없었다.

'그래, 그때까지 기다릴 수는 없지.'

천우는 회수를 결정했다.

허나 적어도 그게 지금은 아니었다.

"손절합시다. 다만, 로이 조로스와 밥그릇을 나누어 쓸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한 밥상에 앉아 밥그릇 싸움을 해봤자 반토막짜리 밖에 더 되겠습니까?"

"설마하니 투자금 회수를 연기하자는 말씀이신가요?"

"그래요. 기왕지사 손절하는 것이라면 최대한 많이 얻는 편이 낫잖아요. 저쪽은 반정부, 우리는 친정부 쪽으로 가자고요."

"친정부라면···."

"정부에게서 받을 건 받고 우리가 반드시 팔아야 한다고 생각되는 건 팔고. 그렇게 가자고요."

천우는 투자금을 일부 회수하는 한 편, 태국정부와 협상해서 특혜를 받아내겠다는 생각이었다.

어차피 동남아시아 시장이 아주 망하는 것도 아닌데 로이 조로스처럼 아주 깽판을 죽이는 것보다야 받을 건 받고 줄 건 주는 우호관계를 유지하는 편이 낫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김영실은 천우의 생각을 이해하면서도 한 편으로는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우리가 다리 한 쪽만 걸친다고 저들이 반발하지는 않을까요?"

"양쪽 발 다 빼서 구미권 투기세력이 우르르 빠져나가는 보다야 훨씬 낫겠죠. 나는 태국정부가 바트화 투매세력을 방어할 시간을 주겠다는 겁니다. 그럼 아마 우리가 회수할 수 있는 자금은 훨씬 더 많아지겠죠. 더불어 앞으로 우리가 이곳에 투자해서 얻을 이

익도 훨씬 많아질 것이고요."

HC가 투자한 자본 중에는 당장 회수하지 않으면 손해를 보는 단기투자자본도 분명 있었다.

천우는 그걸 회수한 후, 장기투자로 묶어두었던 돈들을 그대로 계속 묵히면서 베네핏을 챙기려는 것이었다.

그가 계산하기에 썰물 때 매도하는 것보다 정부와 협상 후, 특혜를 받으며 추후에 매각하는 쪽이 대략 두 배 이상 이득이었다.

게다가 재투자에 대한 베네핏까지 생각한다면 이득은 두 배, 그 이상이었던 것이다.

"태국정부에 줄을 놓으세요. 한 3개월 쯤 뒤에."

"네? 왜 하필이면 3개월 뒤에 잡으라는 겁니까?"

"4개월 뒤엔 로이 조로스가 투매를 시작할 겁니다. 그 전에 방어대책을 세워서 투기자본에게 엿을 먹이는 것이 좋겠다 싶거든요."

로이 조로스는 천우를 모른다.

허나 천우는 로이 조로스를 잘 안다.

추후 그가 어떻게 움직일 것이고 어떻게 투자할지, 그는 이미 다 알고 있었던 것이다.

아마 실제 경합이 붙는다면 천우가 압승을 거들 확률이 더 높을 것이었다.

김영실과 천우가 향후 투자계획을 논의하고 있던 가운데, 집무실 문에 인기척이 들렸다.

똑똑,

"네, 들어오세요."

"대표님, 전화가 왔습니다."

비서실장 고상근이었다.

무슨 일인데 전화 한 통에 비서실장까지 달려 온 것일까.

"어디서 온 전화인데 그래요?"

"로이 브루너에서 왔습니다."

"조로스 쪽에서 연락을 해왔다고요···?"

마침 대립각을 세울 궁리를 하고 있던 상대회사에서 전화가 왔다.

안 그래도 로이 조로스의 회사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투자금융인데, 그들과의 대외정책을 논의하고 있으니 고상근이 직접 달려온 것이었다.

"일단 통화대기 중으로 돌려놨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연결하세요."

"직접 받으시게요?"

"적을 알아야 백전백승하죠."

천우는 거침없이 전화를 받았다.

"네, 전화 바꿨습니다."

-하하, 안녕하십니까! 로이 조로스라고 합니다!

놀랍게도 로이 조로스 본인이 전화를 걸어왔다.

***

통산부 긴급회의가 벌써 수차례 이행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의견조율이 되지 않고 있었다.

이들은 HC투자의 제안대로 대출 금리를 14.5%에서 대폭 인하할 수 있도록 재경원과 접촉하고 있으나, 청와대의 간섭으로 그마저도 지지부진 하는 중이었다.

국무총리와 여당은 이미 해외진출 후보들에 대한 기업채무조정을 시행하였음으로 더 이상의 간섭은 불가하며, 사실상 지금의 경쟁력을 바탕으로 새로운 사업리더를 찾아보는 것이 좋겠다는 입장이었다.

최석재는 몇 번이고 국무총리와 여당, 대통령 내각 등을 차례대로 두드렸으나 '아직 기다려라'라는 말만 전해 듣기 일쑤였다.

결국 OECD가입은 포기할 수 없다는 소리였다.

게다가 최석재를 지지해주던 통산부 장관까지도 이제는 지지철회를 고려하는 입장이었다.

'이제 더 이상 갈 곳은 없는 것인가.'

태국의 바트화 투매현상이 두드러짐에 따라서 아시아의 경제위기론이 서서히 대두되는 중이었다.

사실, 90년대 초반부터 아시아 금융위기설은 끝도 없이 거론되어 왔으나 한국정부는 여전히 80년대 삼저호황의 잔상에 젖어 있었다.

최석재는 이제는 한국의 경제가 벼랑 끝에 내몰렸다고 생각했다.

한 발자국만 더 물러선다면 디폴트라는 낭떠러지로 추락하게 될 지도 몰랐다.

그는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야당을 찾아갑시다."

"어, 어딜요?"

현재 대한민국 정치는 삼강구도로, 여당 정한당을 비롯하여 김중대의 새한국정치회의, 그리고 김용필의 민자련이 구축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른 바 '삼김'체제의 거대 야당들을 찾아가겠다는 것이었다.

"김중대 의원을 찾아가봅시다. 그는 꽤 오래전부터 금융위기를 거론해 왔잖아요."

"···허어! 그랬다가 정한당에게 들키기라도 한다면 바로 물갈이인데요?"

"솔직히 말해 봐요. 이중에 다음 총선 이후, 아니 총선 당일까지라도 온전히 버티고 있을 사람이 얼마나 될 것 같아요?"

"그야···."

"경제난 극복 못하면 어차피 물갈이입니다. 당장 내년만 되도 다 같이 짐 싸고 통산부에서 떠나야한다고요. 아시겠어요?"

지금까지 최석재는 결정적인 순간에 흔들려서 자기주장을 펼치지 못했다.

물론, 김중대를 찾아간다고 해서 일이 해결되는 건 아니었다.

그래도 이번에는 최후의 발악이라도 해보고 싶은 것이 그의 마음이었던 것이다.

그의 측근들은 먼저 걱정하는 마음이 앞섰다.

"잘 생각하세요. 차관님께서 김중대와 손을 잡았다가 오히려 말년이 더 괴로워 질 수 있다는 점, 더 나아가서는 권력은 좌우당간에 양날의 검이라는 걸 명심하시라고요."

"어차피 망나니에게 목 따일 바에야 양날의 검이라도 휘둘러야지요."

이번만큼은 최석재도 의사를 굽히지 않았다.

물론 최석재도 확신은 없었다.

그저 이번만큼은 오기라도 부려보고 싶은 마음이었다.

< 34.(2) > 끝

ⓒ 풍류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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