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노머신 재벌 3세-68화 (68/202)

< 34. >

34.

이른 아침, 천우는 한 장의 보고서를 받았다.

[베오링스 은행 파산에 대한 조사 보고서]

2년 전, 천우는 베오링스 은행의 파산을 예견했었다.

그 사태가 예정대로 이뤄진 것이었다.

"결국 파산하는 건가?"

"매각절차가 진행 중입니다. 현재 가장 유력한 인수후보로는 IFG금융그룹이 거론되고 있습니다만, 아주 근소한 차이로 슈팅스타가 2순위입니다."

"으음, 그렇군요."

95년 1월, 일본 관서지역에서 대지진이 발발하였다.

사망 5천여 명, 부상자 2만 7천 명, 추산 피해금액만 해도 무려 13조 엔.

이 참혹한 사고에 대한 구호물자가 빠르게 공수되었고, 고베지진의 아픔은 비교적 빠르게 수습되어 갔다.

허나 문제는 전혀 엉뚱한 곳에서 터져버렸다.

바로 베오링스 파산 사태였다.

이 사건은 엉뚱하게도 한 사람으로 비롯되었다.

싱가포르 국제통화거래소에서 선물옵션 딜러로 일하던 베오링스의 직원 릭 니슨은 선물, 옵션거래로 닛케이225와 국제통화거래소(SIMEX)를 오가며 떼돈을 벌었다.

그는 주식등락폭을 정확하게 맞추며 승승장구 하였는데, 최근에는 릭 니슨을 선물옵션의 오라클이라고도 불렀다.

허나 그 배후에는 엄청난 사실이 숨어 있었다.

릭 니슨은 선물옵션에서 나오는 손실을 숨기는 비밀계좌를 개설하여 순손실을 감추고 오로지 순수익만 앞세워 거액을 거머쥔 것처럼 보이게 했던 것이다.

심지어는 손실처리용 비밀계좌로 대량의 가짜주문을 내서 가격을 떨어뜨린 후에 주식을 싼 값에 구매해서 이득을 올리는 등의 대담한 사기도 벌이곤 했다.

이런 사기극은 결국 일본 닛케이지수에 대한 일생일대의 도박으로까지 번졌고, 물경 4억 달러의 손실을 기록하게 된다.

하필이면 그가 투자한 시기에 고베 대지진이 일어났던 것이다.

안타깝게도 사건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그는 이 손실마저도 은폐한 후, 추가로 6억 달러를 동원하여 추가투자를 감행한다.

물론 그 마저도 손실.

결국 지금까지 비밀계좌에 들어 있던 손실까지 합쳐 12억 달러의 엄청난 손실을 끼쳐 은행을 파산지경으로 몰고 가게 된 것이었다.

"쯧, 그러게 사람이 말을 하면 좀 듣지."

천우는 CDS협회의 회장으로서 베오링스 은행에게 수차례 투자환경을 바꾸라는 전갈을 보낸 적이 있었다.

심지어 파산사건의 용의자가 될 사람을 잘 감시하라는 힌트를 주기도 했었다.

그러나 구조적 문제에서 비롯된 조직의 구멍은 쉽사리 메워지지 않았다.

결국 베오링스는 95년 2월 말 경에 그룹해체 위기를 겪었다.

헌데 여기서 약간의 변수가 작용했다.

바로 CDS의 존재였다.

신용부도스와프로 리스크를 분산하면서 생긴 이해관계로 인해 베오링스에게 구제 금융을 전달하는 회사들이 늘어난 것이었다.

물론 그것도 그리 오래는 가지 못했다.

올해 9월, 결국 베오링스는 2월에 받은 타격을 회복하지 못한 채 파산하고 말았다.

그들은 동남아시아 금융시장에 대거 투자를 시작하였는데, 하필이면 태국 바트화 시장의 단기 투매가 극성을 부리면서 베오링스가 투자했던 부동산과 산업시장이 주저 앉아버린 것이었다.

이제 파산규모는 천우가 알았던 규모보다 오히려 더 커져 버렸다.

그들이 낸 총 손실은 25억 달러, 일전에 천우가 알고 있었던 손실의 두 배에 해당하는 금액이었다.

덕분에 베오링스와 엮인 기업들이 연쇄적 도산을 맞이하였고 세계 금융시장에는 일대 카오스가 도래하였다.

천우가 예상했던 2년에서 몇 개월이 더 보태진 시점에서 정말로 채권을 회수할 기회가 온 것이었다.

그는 베오링스와 관련되어 있던 채권자들을 찾아다녔다.

베오링스와 함께 광산을 개발했던 업자들이었다.

그들은 베오링스가 파산하면서 실로 엄청난 양의 부실채권을 떠안게 되었고, 이걸 처치하기 위해서 정크본드 전문 사업자를 찾아다니고 있던 실정이었다.

허나 그마저도 잘 팔리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였다.

김영실은 광산업자 55명을 한데 모아 채권문제를 해소할 수 있는 장을 열겠다고 제안했다.

그들의 대답은 당연히 오케이.

95년 11월 경.

천우는 비밀리에 영국 런던으로 향했다.

IFG금융그룹은 여전히 슈팅스타와 알력다툼을 벌이고 있었으나, 네덜란드 정부에서 베오링스 인수에 대한 공식 철회입장을 밝힐 것으로 보였다.

최근, 미국과 이라크의 갈등이 가속화 되고 있던 가운데 미국의 우방국 터키의 쿠르드족 공습이 감행되었다.

그로 인하여 전 세계는 걸프전 이후, 미국의 공습에 대한 비난여론이 거세지고 있었고 그 목소리가 유럽으로 확대되는 형국이었다.

이런 와중에 미국 상무부는 유럽 금융에 대한 미국의 영향력을 높여 최대한 비난여론을 잠식시키겠다는 전략을 검토 중이라고 알려져 있었다.

공식적인 정보는 없었지만 천우는 IFG가 철수의사를 밝힌 것은 아마 이 전략의 일환이 아니었나, 그리 생각했다.

때마침 천우가 영국계 광산을 인수한다는 소식이 들리자마자 상무부에서 거짓말처럼 해외투자에 대한 세금특별혜택을 지원해 준 것이었다.

"으음, 그만큼 미국도 여론이 부담되는 모양이로군."

천우는 이 소식을 비행기에서 전해 들었는데, 광산을 제외한 기업, 금융에 대한 부실채권을 인수한다면 추가인하를 해주겠다는 상무부의 입장도 함께 들렸다.

베오링스 은행에 대한 인수금액을 그만큼 낮춰서 슈팅스타의 부담을 덜어주겠다는 뜻이었다.

이정도면 누군가 최호명을 뒤에서 도와주고 있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어쨌거나 이는 최호명 부자에겐 그야말로 기회 중에 기회였다.

런던 빅벤의 햄버거 가게를 통째로 빌린 광산업자들은 시끌벅적하게 식사 겸 맥주를 한 잔 기울이고 있었다.

천우는 광산업자들과 섞여 햄버거를 먹으며 미팅을 시작했다.

"광산 112개에 대한 인수대금으로 2억 달러를 드리죠. 어떠십니까?"

"아예 인수를 하겠다고?"

"어차피 부실채권 잔뜩 짊어진 광산을 가지고 있어봤자 제대로 된 수익도 잘 나지 않잖습니까."

"으음, 뭐 그건 그렇지."

"이참에 광산들은 전부 다 정리하시고 차라리 사업의 다각화를 꾀해보시죠."

"다각화? 어떤 부분에서?"

"그야 여러분들의 직감을 따라야겠죠."

"슈퍼보이라면서. 좋은 종목이 있다면 좀 알려줘. 그렇게만 된다면 광산을 파는 게 문제가 아니라 가격을 조금 절충해 줄 생각도 있어."

무척이나 괄괄한 사람들이었다.

돈 꽤나 버는 부자들이라고 해서 점잔뺀다고 생각했다간, 그냥 한 대 얻어맞을 정도였다.

허나 그만큼 단순하기도 했다.

"그냥 뜨는 종목만 몇 개 찍어주면 되는 건가요?"

"그런 셈이지. 물론 수익이 많이 나면 좋겠지만 그저 노후자금 정도만 나와도 만족해."

천우는 이들에게 투자방안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좋아요, 그럼 이렇게 하세요."

"어떻게?"

"최근 들어 하락세를 타고 있는 종목이 있습니다. 특히나 하드웨어 시장이 그렇죠. 과잉생산으로 인해 서서히 문제가 드러나고 있는데다 경쟁도 치열해서 이제는 가격경쟁력으로도 승부를 보기 힘든 시점까지 왔어요. 하지만 지금은 과도기입니다. 3년 안에 시

장이 회복해서 폭발적으로 수요가 늘어나게 되어 있어요. 지금 하드웨어 시장에 투자했다가 4년 후에 거두세요. 아마 꽤나 짭짤할 겁니다."

"오호! 그 이후에는 어떻게 해?"

"허어, 제가 향후거취까지 알려드려야 해요?"

"그럼 남의 재산을 공으로 먹으려 했나?"

잘못하면 노후까지 책임지라고 할 판이었다.

천우는 웃으며 말했다.

"하하, 그럼 HC투자에 투자하세요. 여러분들의 투자방향을 평생 설계해드리죠."

"오호? 죽을 때까지 투자를 도와주겠다고?"

"대신 수수료를 주셔야겠죠?"

"···순 장사치네."

"세상이 다 그런 법 아니겠습니까?"

광산업자들은 서로 의견을 나누기 시작했다.

웅성, 웅성···.

상당히 시끄러웠던 이들도 돈 얘기가 나오니 제법 조용해졌다.

잠시 후, 그들은 일생일대의 결정을 내렸다.

"좋아, 광산을 판돈으로 자네에게 투자하도록 하지."

"어? 저는 그냥 농담으로···."

"우리들 중에는 재벌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어. 신중하게 투자해줘."

광산을 사러 왔다가 졸지에 투자를 유치하게 되어버렸다.

***

미국 상무부 국제무역청 차관보였던 제이미 골드너가 국제무역청장으로 내정되었다.

이로서 제이미 골드너는 상무부 차관으로 승진하게 된 셈이었다.

워싱턴의 오래된 술집에서 만난 제이미와 최호명은 둘만의 조촐한 승진축하파티를 열었다.

"축하하네!"

"고마워. 이게 다 자네 덕분이야."

"내가 한 게 뭐 있나. 그저 자네를 따라서 사업을 영위했을 뿐인데."

제이미 골드너가 상무부 부장관 겸 조직 CFO 차관실에서 자리를 옮겨 국제무역청으로 들어간 지 딱 8년 만의 승진이었다.

이미 상무부 CFO는 장관으로 내정되어 국무를 진행하고 있었고 제이미 골드너는 그의 오른팔로서 내년쯤이면 자리를 옮길 것으로 보였다.

그가 이렇게 승승장구 할 수 있었던 발판은 다름 아닌 최호명이 부실채권 회수문제를 해결해주었기 때문이었다.

최호명은 미국 내 부실채권을 대량으로 회수함으로서 상무부의 부담을 덜어주었고, 그와 더불어 재무부의 신임도 함께 얻게 되었다.

당시 제이미 골드너는 최호명과 함께 정부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며 차근차근 커리어를 쌓았다.

그러니까, 최호명과 제이미 골드너는 서로 일감을 주고받으며 함께 성장해 나가고 있었던 셈이었다.

제이미는 호명에게 웃으며 말했다.

"이번 영국 투자건도 너무 고마워. 자네 덕분에 내가 상무부에서 어깨 좀 펴고 다니게 생겼어."

"자네 덕분에 우리 부자가 더 이득을 챙겼지 뭐. 고마워해야 할 사람들은 오히려 우리 부자 아니겠나?"

때마침 상무부의 대외전략이 호명에게 유리하게 돌아갔던 것도 베오링스 투자은행을 인수하는데 한 몫을 했겠지만, 만약 제이미가 네덜란드 정부와 접선하여 그들을 압박하고 세금감면 등을 암암리에 주장해서 베네핏을 주지 않았다면 이번 인수전은 최호명

부자의 패배로 끝났을 지도 모른다.

물론, 천우는 아버지와 아버지 친구가 이런 일을 벌이고 다닌다는 것을 까마득히 모르고 있었겠지만 엉겁결에 천우까지 이득을 챙기게 된 셈이었다.

"앞으로 신임장관의 탄생을 기대해 봐도 되겠나?"

"허어, 자네도 참. 누가 듣겠네!"

"그럼 자네 말고 상무부에 다른 사람이 또 있어? 이미 상무부에 소문이 자자해. 자네가 다음 장관후보로 지명될 가능성이 있다고."

상무부에서 일한 경력이 많다고 그가 장관으로 내정되는 건 아니다.

허나 지금까지 제이미 골드너라는 인물이 해 온 업적이 워낙 많아 다른 대안은 쉽게 찾을 수 없을 것이라는 게 이 바닥의 정설이었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한 후, 이런저런 일상적인 얘기를 나누었다.

그러다가 화제가 다른 쪽으로 튀었다.

"그나저나 바트화는 요즘 좀 어떤 것 같아?"

호명의 질문에 제이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안 되겠어. 핫머니가 워낙 많이 몰렸던 터라 조만간 자네도 손절을 준비해야 할 것 같아."

"으음, 그 정도란 말이야?"

"자네 혹시 로이 조로스라고 들어봤나?"

"아아, 그 환투기 마법사인가 뭔가 하는 사람 말이야?"

금융계의 살아있는 전설이라 불리는 로이 조로스는 92년 영국 중앙은행과의 대립, 93년 금값폭등주도 등으로 유명한 인물이다.

그는 92년 9월, 유럽 외환시장에서 파운드화를 팔아 마르크화를 대거 사들였는데, 그 때에 맞춰 파운드화는 폭락했고 일반투자자들도 그의 행보에 따라 파운드화를 투매하였다.

영국중앙은행은 그의 투자금 100억 달러를 훨씬 웃도는 파운드화를 대거 풀어서 방어에 나섰지만 실패하고 말았다.

하여 결국엔 EC의 준 고정환율제인 환율조정체계(ERM)에서 탈퇴하였고, 전문가들은 이 사건을 두고 '영국이 백기를 들었다'라고 평가하였다.

"조로스가 기침을 하면 대상투기시장은 몸살을 앓는다는 말이 있을 정도야. 굳이 비교하기는 싫지만, 자네 아들의 업그레이드 버전이라고나 할까?"

"록 베넷처럼 말이야?"

"뭐, 그런 셈이지."

록 베넷과 천우가 친하게 지내는 사이라는 건 어지간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천우를 루키 베넷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아무튼 그런 조로스가 말이지 태국시장을 조준하고 있다는 소문이 있어."

"···제기랄, 그런 엄청난 자본이 말이야?"

"자네 아들도 태국에 꽤 많이 투자를 해두었다면서. 이쯤에서 발을 빼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하네."

"흐음."

고민하는 호명, 제이미는 그에게 진심으로 조언했다.

"그는 무서운 사람이야. 행여나 자네 아들이 그와 부딪치지 않도록 해줘. 만약 두 세력이 부딪친다면 일대 파란이 일어날 지도 몰라."

호명에게도 근심이라는 것이 생겨버렸다.

< 34. > 끝

ⓒ 풍류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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