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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2)
통산부 중앙회의실 안.
최석재를 비롯한 관련부처의 수장들이 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그들은 천우에게 해외사업수주 및 에너지인프라 구축에 대한 파트너십을 채결하자고 제안한 상태였다.
탁, 탁, 탁···.
천우는 볼펜으로 탁상을 두드리며 해당 제안서의 내용을 검토하고 있었다.
그러다 그는 제안서를 탁상 중앙으로 스윽 집어던졌다.
"내용을 대거 수정해야 할 필요가 있겠네요."
"수정이요?"
"파트너십을 맺는데 가장 중요한 몇 가지가 빠져 있거든요."
계약서에는 사업팀 멤버를 통산부에서 정한다는 내용과 부실채권 발생 시 천우가 발동시킬 수 있는 권한을 최대한 축소시켜두고 있었다.
이는 사실상 일방통행이나 다름이 없는 시안이었다.
그는 회의실 중앙에 있던 화이트보드에 그래프를 그리기 시작했다.
이 그래프는 현재 대한민국의 경상수지가 어떻게 변하고 있는지를 잘 나타내주는 지표였다.
천우는 현재의 그래프 아래에 과거의 그래프를 그러놓고 현재의 그래프 위에는 AI에 내장되어 있는 데이터베이스를 토대로 미래의 그래프를 그려나갔다.
그는 우선 현재의 그래프를 그려놓았다.
"한은 집계, 57억 9천만 달러. 작년보다 124.4%나 늘었습니다. 다름 아닌 경상수지 적자폭이 말입니다. 미일수지가 무역역조로 돌아선 것이 벌써 몇 년 째입니까? 그런데도 여전히 채질개선은커녕 점차 나아질 것이라고 언론까지 선동하고 있죠. 이 추세라면 한국은 만년적자에 눈덩이처럼 불어난 빚에 직격타를 맞아서 디폴트에 빠지게 될 겁니다."
"···디폴트?"
"길어봐야 3년입니다. 그 안에 디폴트가 와도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해외에서 일감을 끌어온다는 거잖습니까."
"그게 문제라는 겁니다. 만약 이 상태로 해외에 나갔다가 자금이 경색된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으음···."
"무역적자를 일으키는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선 해외에 나가봐야 말짱 헛방이라는 소리입니다. 그런데도 프로젝트의 책임자인 제가 부실채권 발생 시, 손절할 수 있는 방법을 사실상 다 막아두었지요. 그렇다는 건, 저를 ATM기기로 밖에는 보지 않는다는 소리입니다."
"지금의 법이 그런 걸 어쩌란 말입니까?"
"법이 이상하면 바꾸세요. 그러라고 국회가 있는 거 아닙니까."
"아니, 그건 그렇다고 치자고요. 가장 중요한 기업의 체질개선은 당장 어떻게 해내란 말입니까?"
"빚부터 해결하라고 하세요. 저는 부채비율 200% 이상의 기업은 데리고 가지 않겠습니다."
"허어! 대한민국에 그런 기업이 도대체 얼마나 된다고···."
"그러니 문제라는 겁니다. 이건 뭐, 사업을 하기도 전에 빚부터 잔뜩 껴안고 시작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잖아요?"
천우는 해외사업에 한국이 적합하지 않으며 결론적으로는 한국의 산업구조가 근본적으로 썩어 있다고 지적하고 있었다.
그런 맹점을 콕콕 찔러대며 팩트로 폭행을 해버리니 정부기관에서 나온 사람들의 심기가 불편할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의 강도 높은 비판을 받으면서도 유일하게 한 사람만큼은 조용했다.
바로 최석재였다.
'역시, 미국에서 날고 긴다는 사람은 뭔가 달라도 다르군. 저런 인재가 한국에 한두 명만 있었어도 이 지경이 되지는 않았을 텐데···.'
실로 개탄스러운 일이었다.
조의창이 돈과 권력에 미쳐서 과오를 저지르지만 않았어도 대한민국 경제는 몇 단계 더 발전해 있을 지도 모를 일이라, 최석재는 생각했다.
최석재는 한 사람의 존재가 세상을 바꿀 수 있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세상물정에 어두웠던 것이로군요. 죄송합니다."
"차, 차관님!"
"그렇다면 우리가 뭘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처음으로 한국정부가 한 수 굽히겠다는 제스처를 취하였다.
천우는 적어도 최석재라는 한 사람만큼은 아주 돌대가리는 아니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마샤, 최석재에 대해 검색해줘.'
-인물도감을 통해 검색하겠습니다···. 최석재, 통산부차관으로 문민정부에서 일하다가 국민의정부로 정권이 교체되면서 수장되었습니다. IMF에 대한 책임론의 풍파를 맞아 교도소에서 5년 간 복역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인맥이 두텁고 능력은 좋았으나 정치에는 문외한이었다는 것이 전체적인 인물평입니다. 도감점수 5점 만점에 4.1점의 인물이나, 처세
술의 부재로 IMF사태를 부추겼다는 점에서 -2점입니다. 하여 총점 2.1점입니다.
마샤가 기업에 점수를 주는 기능을 추가한 것처럼 인물도감에서도 점수를 도입하였다.
평점 5점이 만점이고 감점과 가산점에 대한 이유도 자세히 설명되어 있었다.
'결국 정치의 희생양이 된다는 소리군. 처세술이 부족해서 IMF사태를 부추겼다는 건 아마도 줏대가 없어서이겠지?'
-결정적인 순간에 줏대가 없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사람은 고쳐 쓰지 못한다는 말이 있다.
천우는 최석재를 고쳐 쓸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다만, 한 번의 기회정도는 줘 볼 생각은 있었다.
과연 그의 역량이 어느 정도인지 시험해보려는 것이었다.
"제가 말씀드렸다시피 기업들의 부채비율을 200% 이하로 낮추세요. 아마 그렇게 하면 부실계열사들은 알아서 정리가 될 것이고 순환출자구조 역시 단순해지겠죠. 3개월 드리겠습니다. 그 안에 조정이 가능하다면 받아들일 것이고 불가능하다면 받아들이지 않겠습니다."
"···흐음."
"그리고 또 한 가지, HC가 부실채권을 직접 회수할 수 있는 권한을 주시고 외국자본의 유입에 대한 법안을 일부 수정해주세요."
"그랬다가 투기자본을 형성하는 꼴이 되어버린다면···."
"그에 대한 방안도 함께 마련해야겠지요. 만약 기획안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HC는 한국에서 철수하겠습니다."
최석재의 측근들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한양 최 씨 일가의 장손으로서 도리를 다한다고 했던 말은 전부 거짓입니까?!"
"아니요. 도리는 다 하고 있습니다. 그나저나 장손으로서 도리를 다한다는 것에 왜 사업을 가져다 붙이시는 건가요? 제가 집안의 전통을 지킨다고 했지 있는 돈을 정부에 그냥 퍼주겠다고 했습니까?"
"그야···."
"그리고 잘 생각해보세요. 진짜 도리는 누가 먼저 지켜야 할지 말입니다."
천우는 과연 최석재가 어떤 결단을 내릴지 한 번 두고 보기로 했다.
그리고 그는 마지막으로 한 마디를 덧붙였다.
"주변 좀 정리하시죠. 이거야 원, 정신 사나워서 협상을 할 수가 있나? 인맥위주 조직구성이 아닌 실력위주 조직구성을 좀 해보시죠?"
"···저 사람이 정말!"
최석재의 측근들이 발끈하여 일어났다.
그러자, 최석재가 나지막이 말했다.
"다들 앉아요. 저쪽에서 틀린 말 한 것도 아닌 것 같은데."
"···네?!"
"조용히 앉아계세요. 이참에 가지치기 당하기 싫다면 말입니다."
최석재는 결단을 내렸다.
슈퍼보이라는 사람을 반드시 잡아서 혁신을 이루겠다고 말이다.
***
한 편, 청와대 안에서도 슈퍼보이에 대한 얘기가 나오고 있었다.
국무총리 박주성은 경제수석 홍재석에게 슈퍼보이의 제안에 대해 전해 들었다.
박주성은 다소 황당하다는 듯이 되물었다.
"···뭘 어쩌자고요?"
"그러니까, 자기 입맛에 맞게 기업들의 지배구조부터 재무구조까지 싹 갈아엎겠다는 소리잖아요."
"그런데도 그런 애송이와 손을 잡을 가치가 있다고요?"
"그럼 당장 누가 해외에서 달러를 가져와서 국고를 채우겠습니까? 설마하니 벌써 각하의 방침을 잊으신 건 아니겠지요."
"그야···."
"일본이라고 몰라서 자기들 경제에 슈퍼보이라는 말뚝을 박았겠습니까? 그만큼 최천우의 HC가 대단하다는 소리겠지요."
"그 꼬맹이가 그리 대단하다고요? 당체 이해가 잘 안 되네."
"꼬맹이는 꼬맹이인데 미국의 경제파벌을 이끄는 수장이라는 것이 문제죠. 환율, 주가, 유가, 심지어 원자재 가격까지 알아맞히는 천재입니다. 이런 사람은 다시없을 것이라고들 하죠."
"흠, 그러니까 슈퍼보이를 데리고 외화를 좀 끌어오자?"
"그런 셈이죠."
문민정부의 가장 큰 목표는 OECD가입이다.
그에 따라서 꽤 많은 문제가 산재해 있었으나 그중에서도 가장 큰 걸림돌은 바로 외화보유현황이었다.
현재의 원화는 경제규모에 비해서 상당한 절상국면이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OECD가입조건에는 약간 미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하여, 정부가 외환시장에 달러를 가져다 풀어 원화를 상대적으로 절상하는 정책이 펼쳐지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 명목은 적정물가유지와 생활환경 개선 등이었다.
정부각처도 OECD가입에 혈안이 되어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미친 듯이 달러화를 가져다 시장에 풀어놓고 그 반사이익으로 원화절상의 영광을 누리는 것을 즐기고 있었던 것이다.
허나 그 뒷바라지를 할 사람이 딱히 없다는 것, 그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홍재석은 그 뒷바라지를 HC투자에게 맡기기로 결심했다.
"총리님, 이번 기회에 우리도 OECD명단에 명함 한 장 박아봅시다."
"으음!"
"국위선양이 별겁니까? 대대손손 잘 먹고 잘 사는 나라로 만들어서 해외에서 경제대국의 위명을 떨치는 것이지요. 안 그렇습니까?"
"하긴, 그건 그렇군요."
안 그래서 박주성도 외화보유고가 슬슬 바닥을 드러내고 있어서 근심이 크던 찰나였다.
기왕지사 이렇게 된 김에 제대로 줄 한 번 잡아보자는 심산이었다.
그는 통산부에게 필요한 조치에 대해 물었다.
그러자 돌아온 대답은 법 개정이었다.
어차피 OECD에 가입하자면 금융시장을 개방해야하는데, 그럴 바엔 HC라는 대단한 간판을 걸어서 국론을 어느 정도 환기시키자는 것이었다.
박주성은 그들의 요청대로 대통령에게 이 사안을 전달하였고 그것은 다시 여당에게 그대로 넘어갔다.
바통을 받은 여당은 다음 국회에서 위 안건을 상정해서 통과시킬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는 동안 통산부는 부실기업 진단평가에 대한 가이드라인을 구성하고 그 위원회를 구성할 준비를 마쳤다.
이로서 천우가 요구한 사안들은 대충 완성이 되었다.
허나 통산부는 HC에게 해외자원플랜트사업 엔트리를 구성해달라는 요청을 거절당했다.
그 이유는 대출금리가 심각하게 높다는 것이었다.
현재 대한민국의 대출 금리는 14.5% 대, 이런 상황에서 해외사업을 영위한다는 건 무리라는 소리였다.
최석재는 깊은 고민에 빠지고 말았다.
"···도대체 슈퍼보이는 뭘 원하는 것일까?"
하나를 해결하니 또 하나를 해결하라고 숙제를 내주었다.
어쩌면 한국과의 인연은 여기까지라고 선을 긋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했다.
그는 슈퍼보이와의 관계를 이쯤에서 끊어야 하나 고민했다.
만약 HC의 조건을 그대로 수용한다면 대한민국이 목표한 OECD가입은 96년도를 지나 무기한 연기 될 수도 있었다.
극심한 금리인하는 부작용을 낳기 마련이라 안 그래도 민감한 부분이었는데, 만약 안정적으로 인하를 시작한다면 적어도 몇 년은 걸릴 터였다.
결국 OECD가입을 미뤄야만 얻을 수 있는 HC와의 협력이냐 단절이냐를 놓고 깊이 고민하는 계기가 만들어 진 것이었다.
한 편, 천우는 통산부의 요구를 걷어 차놓고 답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
어차피 이대로 해외에 나갔다간 대판 깨져서 돌아올 것이 불을 보 듯 뻔했다.
해서 천우는 최대한 리스크를 없애고자 하였고 그 조건이 충족된다면 최석재와 통산부를 믿어줄 것이다.
허나 만약 그렇지 않다면···.
"손절이지 뭐."
그는 서두르지 않았다.
그저 천천히 판이 돌아가는 것을 지켜 볼 뿐이었다.
< 33.(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