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노머신 재벌 3세-66화 (66/202)

< 33. >

통산부 주재 무역수지 적자 해결방안을 모색하는 회의가 열렸다.

이번 회의에는 정부각처의 수장들은 물론이고 대기업 관계자들까지 모여들었다.

통산부차관 최석재는 최근 들어 점점 악화일로를 걷고 있는 건설과 반도체 산업에 대한 방향을 가다듬고 정부에서 지원이 필요하다면 최대한 지원하겠다고 말했다.

"최근 반도체 가격 하락과 건설경기 악화로 인해 일부 대기업에서도 계열사 단절이라는 카드를 생각하고 있는 것으로 압니다. 그 전에 정부가 나서서 해결책을 제시해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여러분들의 생각은 어떠신지요."

반도체의 과잉생산으로 인하여 D램 가격이 무려 30% 이상 하락했다.

이는 대한민국의 중추를 정통으로 타격하는 수준이었으며, 전문가들은 이 하락세를 쉽사리 가라앉히기는 힘들 것이라고 말했다.

물론, 일각에서는 가격폭락은 일시적인 현상이라고 말하기도 했으나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우선 사업을 이끌어 나가는 본인들이 끝도 없는 하락세를 직접 체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성전자의 메모리사업부 사업총괄이사인 이태민은 정부의 지원보다도 미국과의 협상이 중요하다고 역설했다.

"최근 반도체의 과잉공급과 수요축소로 가격이 많이 하락한 건 사실입니다. 허나 가장 큰 문제는 주요 무역국가인 미국에 대한 무역망이 점점 좁아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크음!"

"이대로 가다간 물량을 넣어주는 족족 덤핑판정을 받아 무역수지가 적자로 돌아설 판입니다."

미국 상무부의 한국산 반도체의 덤핑판정은 거의 연례행사처럼 벌어지고 있었다.

한국정부가 몇 번인가 갈등국면을 일부 해소한 적이 있기는 했으나, 그것도 잠시 뿐이었다.

최근 미국은 대만과 한국산 D램에 대한 덤핑판정을 내리는 대신 미국산 노스아메리카 컴퓨터의 반도체를 MBI와 애플스 등에 공급함으로서 무역수지 적자를 견제하고 있었던 것이다.

만약 이와 같은 현상이 반복된다면 한창 반도체 부문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오성전자 등이 침체국면에서 벗어날 수 없을 지도 몰랐다.

지금 통산부가 할 수 있는 말은 한 가지 밖에 없었다.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미국과의 대화를 통해서 정상화를 시켜놓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오성전자도 통산부보다는 차라리 기업가들이 물밑작업으로 반도체를 미국에 보내는 것이 낫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다만, 이렇게 통산부를 압박하는 것은 오성전자 등이 미국계 정치인들과 대기업들에게 건넬 로비자금에 대해선 눈을 감아달라는 신호였던 것이다.

해법이 없다, 그렇다고 당장 차선책을 찾을 여력도 없다, 그러니 우리 돈으로 해결할 테니 비자금 정도는 눈감아 달라, 이 소리였다.

최석재는 그저 한숨을 내쉴 뿐이었다.

허나 그의 한숨은 이제 시작에 불과했다.

80년대, 건설경기는 과당경쟁과 덤핑수주로 수지악화를 맞았었다.

한데 90년대에 들어서도 그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있었다.

게다가 최근에는 하도급 비리와 함께 부실공사가 문제로 대두되고 있어서 여러 건설사들의 총수가 검찰청을 들락거리고 있었다.

통산부는 몇 차례 건설사 하청비리를 잡아낸 적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형 건설사들은 오히려 이전보다 훨씬 더 낮은 가격으로 덤핑입찰을 걸고 있었다.

최석재는 건설사 대표들에게 최대한 자제를 부탁하였다.

"최근 법망을 교묘히 피해가는 초대형 덤핑입찰이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 자제 좀 해주시죠."

"그럼 어쩝니까? 우리도 먹고 살아야지요. 자재 값은 올랐지, 내수시장은 좁아졌지, 일감은 적은데 업체는 많으니 가격으로라도 후려 쳐야지요. 안 그러면 살아남을 수 있을 여건이 안 되잖습니까."

최근 철강업계를 비롯한 건설자재 공급업체의 생산량이 현저히 떨어져 건설자재 비용이 고공행진을 거듭하고 있었다.

게다가 주택보급의 포화로 인하여 일반주택의 시공사례는 급격히 줄었고 공공주택 역시 그 비율이 점점 줄어가는 시점이었다.

게다가 92년에 건설업체에 대한 면허개방이 된 이후에 건설사의 숫자가 980개에서 1900개로 늘어나면서 시장은 완벽한 포화상태가 되어버렸다.

그나마 몇 년 전만 해도 사정은 조금 나았다.

최근에는 미분양 아파트로 인하여 악성재고비율이 늘어나면서 건설경기는 악화일로를 걷고 있었다.

허나 그렇다고 해서 통산부가 건설시장에 대한 규제정책을 철회할 수는 없었다.

"그래도 부실공사는 막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대기업 입장에서 하도급 업체들 간의 입찰경쟁만 막아줘도 부실공사는 없을 겁니다."

"그거야···."

지금의 하도급 시장의 상황은 이렇다.

천억에 아파트 공사를 수주해놓고 원청은 하청업체를 선정하는데, 하청에게 사실상의 가격 마지노선을 정해주고 입찰을 붙이는 것이다.

여기서 본청은 하청에게 1/3 수준의 건설비 절감 이득을 본다.

그럼 하청은 재하청을 주는 과정에서 다시 1/3수준의 건설비 절감 이득을 챙길 수밖에는 없다.

빚지고 공사를 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그럼 그 하청에 하청은 다시 1/3 깎아서 공사를 진행···. 그렇게 이런 말도 안 되는 악순환이 반복되면 마지막에 남은 중, 소기업들만 밑에서 죽어나는 것이다.

이런 악순환의 고리를 끊자고 마련한 자리이건만, 규제 말고는 딱히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런 가운데 백화건설 오익환이 한 마디 툭 내뱉었다.

"국내가 포화라면 해외로 나가는 것이 옳다고 봅니다만. 얼마 전, HC투자에서 해외에너지개척 시장에 국내기업들을 데리고 나가겠다고 선언한 것으로 압니다. 해서, 이미 네 개 기업들이 해외로 나가 있고요."

"으음."

"포화시장에서 아웅다웅 할 것이 아니라 중국과 러시아, 인도와 같은 시장을 개척하는 편이 훨씬 이득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과연 무슨 수로요?"

"외교 말고 다른 답이 있습니까?"

"으음···."

시름에 돌을 얹는 소리였다.

물론, 정부도 그게 최선이라는 건 알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현실적으로 천 개도 넘는 건설사들을 모두 먹어 살릴 일자리를 만드는 것이 쉽겠냐는 것이었다.

통산부가 앓는 소리를 내자, 오익환이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그것도 안 된다면 HC의 대표이사인 슈퍼보이를 통해서 줄을 놓아봐야지요."

"슈퍼보이···?"

"한국에서 미국으로 건너가 자수성가를 이룬 청년 말입니다. 이미 일본과 합작해서 러시아, 중국을 겨냥한 에너지시장 개발에 나섰다고 하잖습니까."

사실, 한국 정부도 슈퍼보이가 대단한 건 알고 있었다.

허나 그의 특성상 한국정부가 슈퍼보이와 손을 잡으려면 그에 합당한 협상카드를 내밀어야 할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오익환은 그가 무슨 고민을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는 통산부에게 일침을 가했다.

"무엇을 줄 것인가를 생각하기보다는 어떻게든 그를 끌고 올 생각을 하십시오. 하다못해 일본의 총리내각 조차도 그에게 간이고 쓸개고 다 내어주었습니다. 그런 각오가 아니라면 아마 우리는 HC라는 대마를 놓치게 될 겁니다."

"으음!"

"일본의 타카키노믹스가 성공한 비결이 무엇이겠습니까? 결국 HC투자라는 엄청난 세력을 등에 업었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 한 기업집단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가 이끄는 세력은 이미 한 갈래의 산업자본 파벌이 되어버렸으니까요."

최석재는 천우가 과연 자신들에게 무엇을 요구할지 벌써부터 긴장되기 시작했다.

허나 오익환의 말마따나 지금 슈퍼보이라는 사람을 놓칠 수는 없었다.

"좋습니다. 우리가 HC투자에 먼저 러브콜을 보내보겠습니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

이른 아침.

한양 최 씨 저택으로 한 통의 편지가 도착했다.

편지를 들고 온 사람은 바로 허태용이었다.

"도련님, 할머님께서 편지를 보내셨네요."

"잘 계신데요?"

"한 번 읽어보십시오."

천우가 편지를 펼치니, 그 안에는 스위스를 배경으로 찍은 오금자의 사진이 들어 있었다.

그녀는 사람들 속에서 환하게 웃고 있었다.

편지를 읽어보니 요즘 외가에서 사촌들과 모여 살면서 유럽투어를 다니고 있다고 하였다.

여생이 그리 길지는 않을 것 같으니 최대한 즐기다가 다른 나라에서 숨을 거두고 싶다, 그것이 오금자의 남은 인생계획이었던 것이다.

"즐겁게 살고 계시네요."

"허허, 그렇습니까?"

"그런데 허 씨 할아버지는 왜 한국에 계세요? 굳이 한국에 계실 필요가 없잖아요."

"글쎄요. 무슨 필요가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누굴 기다리는데요?"

허태용은 대답 대신 아련한 미소를 짓고 있을 뿐이었다.

천우도 그가 대단한 사람이라는 건 알고 있지만 정작 어떤 사람인지는 정확히 알지 못했다.

그저 최충의가 그를 신뢰했고 그는 현보일가를 무척이나 아낀다는 건만 알고 있을 뿐이었다.

이윽고 허태용은 천우에게 또 다른 편지를 건네주었다.

"이번에는 정부에서 왔습니다."

"정부요?"

"얼마 전 도련님의 인터뷰에 화답하는 내용이 아닌가 싶습니다."

편지를 열어보니 통산부의 서한이 들어 있었다.

그들은 천우에게 '통산부로 당신을 초대합니다'라는 글귀를 적어서 보냈다.

기타 미사여구가 곁들여진 몇 줄의 글귀가 있었지만 그리 중요한 내용은 아닌 것 같았다.

"통산부로 초대한다는데요?"

"허허, 잘 되었군요. 도련님이 원하시는 만큼 저들에게 요구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긴 겁니다."

"하지만 제 요구를 순순히 들어줄까요?"

허태용은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아마 그건 아닐 겁니다."

"그렇겠죠?"

"허허, 하지만 도련님께선 그런 것 따윈 신경 쓰지 않을 것 같은데 말입니다."

천우는 장사꾼이다.

대한민국이 조국이라고 해서 그 정부의 꼭두각시가 될 정도로 바보는 아니라는 소리였다.

그는 한국이건 미국이건 중국이건, 심지어 일본이건 모두를 비즈니스 적인 마인드로 바라보고 있었다.

만약 사람을 통산부에 불러놓고 찜 쪄 먹으려 한다면 그들은 손절대상에 불과한 셈이었다.

"후후, 잘 아시네요. 제가 한국에 온 것은 가문의 전통을 따르는 것뿐, 저들에게 호구 짓이나 하자고 온 건 아니니까요."

슈퍼보이의 한국행은 사실, 미국정부에게도 참으로 큰 인상을 심어주었다.

처음에 그들은 천우가 완벽한 한국자본이 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었다.

국내자본의 해외유출은 심각한 사안이 아니던가.

허나 그건 그들의 크나큰 착각에 불과했다는 것을 최근 들어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가문을 중요시 여기지만 한 없이 자유로운 사업가.

그가 바로 천우라는 사람이라는 걸 미국은 절감하고 있었던 셈이다.

아마 한국정부도 이젠 그걸 절감하게 될 것이다.

며칠 후.

천우는 통산부로 향했다.

찰칵, 찰칵!

통산부 앞에는 이미 엄청난 숫자의 신문기자들이 운집해 있었다.

그들의 관심사는 오로지 하나였다.

앞으로 HC가 어떻게 투자할 것인가.

"최천우 대표님! 통산부와 어떤 얘기를 나누실 겁니까?"

"비즈니스 적인 얘기를 나누겠지요."

"비즈니스라! 조국을 사랑해서 한국에 오신 것이 아니었습니까?"

기자들은 천우의 무조건적인 헌신을 기대한다는 듯 한 뉘앙스를 풍겼다.

허나 천우의 생각은 180도 달랐다.

"저는 한양 최 씨의 장손입니다. 물론 조국을 사랑하긴 해도 정부의 하수인은 아니지요. 가문의 전통과 그에 대한 도리는 지키되 정부의 저금통이 될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으음!"

"제 선조들께서 그랬듯, 한양에서 서방까지 위세를 떨치는 것이 목표일뿐입니다."

통산부보다 기자들은 먼저 깨닫게 되었다.

완벽한 GIVE&TAKE.

그에게 조국과 비즈니스는 별개의 얘기라는 것을 말이다.

'자, 그럼 받을 걸 좀 받아볼까?'

천우는 성큼성큼 걸어 통산부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 33.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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