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2) >
32.(2)
본가로 돌아온 천우.
"헥헥···."
"충식이?"
저택 마당에 보니 이제는 늙어서 돌아다닐 기력조차 없는 충식이 형제가 축 늘어진 채 누워 있었다.
녀석들은 오랜만에 돌아온 천우에게 꼬리를 치며 반가움을 표시했으나, 그 자리에서 일어설 수가 없었다.
충식이 형제를 대신해 천우를 반겨주는 이들이 있었다.
"도련님!"
"왈왈!"
지팡이를 짚은 허태용이 무려 20마리나 되는 강아지들과 함께 걸어 나왔다.
이 많은 개들은 도대체 어디서 온 걸까.
"집사님! 건강은 괜찮으세요?"
"허허, 이제 저는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지요. 도련님은 아주 멋있어 지셨습니다. 10년 전만 해도 초롱초롱하고 또랑또랑했던 우리 작은 도련님이 이제는 약관의 젊은이가 되셨네요. 이 모습을 회장님이 보셨으면 얼마나 좋아하셨을지···."
허태용이 눈물을 훔쳤다.
천우는 그런 그의 어깨를 다독이며 쓰게 웃었다.
"집사님도 참."
"죄, 죄송합니다. 이 노인네가 이제는 시도 때도 없이 경황이 없어서 그만···."
"아니에요. 그럴 수도 있죠. 그나저나 이 강아지들은 다 어디서 왔나요?"
허태용은 강아지들을 바라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충식이 형제가 어느 날 바깥에서 암캐를 데리고 왔었지요. 그렇게 새끼가 태어나 다시 밖에서 암캐를 데리고 오니, 아주 집이 개판이 되어버렸지 뭡니까. 그렇게 태어난 3세대들이 바로 이 녀석들이죠."
"허어, 사고를 쳤구나! 이놈들···."
견종이 정말 ┛ː이???.
도대체 이제는 원래 부견과 자견이 어떤 견종이었는지 가늠조차 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래도 사고 한 번 안 치고 아주 건강하게 잘 자라고 있습니다. 어디서 들으니 잡종이 면역력도 좋고 품종도 좋답니다."
"뭐, 그건 그러네요."
이제 3개월 밖에 안 되었다는데 다들 덩치가 장난이 아니었다.
그나저나 저 개들을 다 먹이려면 힘이 들 텐데, 천우는 분양을 권고했다.
"분양을 보내시는 건 어때요?"
"허허, 그러고 있긴 하죠. 현보 식구들 중에 개를 키우고 싶은 사람들에게 보내주고 있기는 합니다만, 그래도 젖은 떼고 어느 정도 커서 어미의 보살핌이 필요 없을 때까지는 기다리고 있는 편입니다. 이놈들이 붙임성이 좋아서 성견이 다 되어 분양을 보내도 큰 문제가 없더라고요."
그렇게 분양을 보냈는데도 이 정도라니, 다산은 충식이 형제의 집안 내력인 모양이었다.
잠시 후, 허태용의 아들들이 마당으로 나왔다.
"도련님 오셨습니까!"
허웅, 허석 형제는 허태용을 대신해서 현보일가의 살림을 도맡고 있었는데, 허웅은 회계사로 20년 이상 일한 경력이 있어 집안의 회계를 돌보고 있었고 허석은 법무와 주택 관리 등을 맡고 있었다.
천우는 이제 이들을 비서실로 불러들일 생각이었다.
"두 분은 지금 딱히 소속이 없으시죠?"
"네, 그렇습니다. 범 현보일가의 소속으로만 남아 있는 셈이지요. 이를 테면 종친회 소속이랄까요?"
"그럼 제가 한국으로 온 김에 HC로 자리를 옮기시죠."
"글로벌 기업으로요? 하지만 그렇게 되면 집안은···."
"집안일은 대신할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어요. 하지만 바깥일은 대신할 사람들이 별로 없죠."
"으음, 뭐 그렇긴 하지요."
"후계를 세우고 회사로 들어와 주세요. 앞으로 이 가문을 크게 일으킬 겁니다. 두 분은 그 거대제국의 중추가 되는 것이지요."
허 씨 형제는 천우의 제안을 쉽사리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들에게도 나름대로의 사명감과 소속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당장 결정하라고 압박하는 건 아닙니다. 두 분에서 충분히 상의하시고 결정하세요. 만약 그래도 믿을 사람이 없다면 굳이 HC로 오시지 않아도 됩니다."
"알겠습니다. 일단 생각을 좀 해볼게요."
범 현보일가는 허 씨 일가에게 지분과 부동산 등을 꽤 많이 증여했다.
자산으로 따진다면 어지간한 재벌가의 자손 정도는 될 것인데, 사실 저들이 지금 와서 기업인이 될 이유는 없었다.
그래도 천우는 조부가 허 씨 일가를 신뢰했고, 그들과 함께 하기를 원했기에 그 유지를 받들려는 것이었다.
허 씨 일가와 함께 집으로 들어간 천우는 10년 전과 아예 다를 바가 전혀 없는 풍경에 크게 놀랐다.
특히나 인상적인 것은 조부의 서재가 아직 그대로 있다는 점이었다.
"···관리를 잘 하셨네요."
"유품이라고 해서 무작정 정리하기보다는 가문 대대로 필요한 것들은 쭉 물려 쓰는 것이 낫겠다고 판단했습니다. 이 또한 역사와 전통 아니겠습니까?"
"좋은 건 대물림하는 것이 명문가로 가는 지름길이다."
"그래요. 최 씨 일대기에 나오는 8대 조부 최진 어르신의 말씀이지요."
이 집안에서 모두 장사꾼만 나온 건 아니었다.
과거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주요관직에 나아갔다가 사학자로서 이곳 한양에 남은 사람도 있었다.
그가 바로 8대조 최진이었다.
천우는 천천히 자신이 살게 될 저택을 둘러보았다.
헌데 조모의 짐이 하나도 없었다.
"어라? 할머니께서는···."
"이탈리아에 있는 외가로 돌아가고 싶다고 하십니다. 그곳에 외사촌들이 계신데, 그분들과 여생을 살고 싶다고 하시네요."
"으음···."
"지금은 유럽 여행 중이시니 세 달 후엔 만나실 수 있을 지도 모르겠네요."
그동안 오금자는 현보라는 이름에 얽매여 살아왔다.
이제 그녀가 남은 생을 이탈리아에서 보내건, 스위스에서 보내건, 천우는 그 자유로운 선택을 존중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럼 굳이 찾지는 않을게요. 하지만 연락 정도는 드려주세요."
"그래요, 그리하지요."
천우는 최충의 부부가 사용했던 침실을 이용하기로 했다.
본가에서 머무는 날이면 오금자와 함께 자곤 했었는데, 그 기억이 아직 남아 있었던 것이다.
비록 침구는 새것으로 바뀌어 있었지만 어지간한 가구는 그대로였다.
"익숙해서 좋네요. 잠이 잘 올 것 같아요."
"허허, 그러실 줄 알고 이 방으로 짐을 가지고 들어오라고 지시해두었습니다."
바뀐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그 안에 살던 사람들만 바뀌었을 뿐이었다.
그동안 이곳을 드나들며 집을 관리했던 허 씨 일가도 이제는 그만 출입하기로 했다.
"집안을 관리하는 사람들은 따로 있습니다. 이제는 도련님이 계시니 저희들은 그만 짐을 쌀까 합니다."
"그동안 너무나도 감사했습니다."
"별 말씀을요. 제 작은 아들이 도련님의 성인이 되는 날에 맞춰서 영국계 신탁과 살아생전이 회장님이 가지고 계셨던 재산을 모두 도련님께 귀속시킬 겁니다. 그 과정이 약간 복잡하더라도 이해해주십시오."
"할아버지의 유산인데 귀찮을 리가 없죠."
"허허, 그래요."
허태용은 천우의 손을 꼭 잡았다.
"감사합니다. 그래도 이렇게 집안의 명맥을 잇기 위해서 돌아와 주시다니요. 저는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그런 말씀 마세요. 오래오래 사셔야죠. 제 아들도 좀 봐주시고요."
"허허, 그렇게 된다면 가문의 영광이겠습니다."
천우는 자신이 장가를 들어 아이를 낳는 걸 허태용이 볼 수 없으리란 걸 잘 알고 있었다.
비록 데이터베이스에 허태용에 관한 정보는 그리 많지 않아 도감에 있는 내용은 별로 없었지만, 한눈에 보기에도 그는 그리 오래 살 것 같지가 않았던 것이다.
'경험이라는 게 때론 나쁠 때도 있구나.'
감이 왔다.
마치 조부가 세상을 떠나기 얼마 전처럼 말이다.
천우가 씁쓸하게 웃자, 허태용의 두 아들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도련님,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그래도 당장은 돌아가지 않으실 겁니다. 아직은 정정하시거든요."
"···네, 고마워요."
그렇게 허 씨 일가는 돌아갔다.
이제 홀로 남은 천우는 마당으로 나왔다.
"헥헥···."
하도 늙어서 숨을 쉬는 것조차 힘겨운 충식이 형제를 양옆에 둔 천우는 지는 노을을 바라보았다.
"너희들도 언젠가는 무지개다리를 건너겠지?"
"···헥헥."
충식이 형제는 천우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는 것 같았다.
그런 녀석들이 천우의 눈을 가만히 응시했다.
녀석들의 깊은 눈동자를 바라보고 있자니, 불현 듯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 세대는 변하는 거지. 모든 건 자연스러운 거야. 그렇지?"
"헐헐!"
짖는 소리가 무슨 노인의 기침소리와 같았지만 어쩐지 그 소리가 익숙했다.
천우는 그렇게 가만히 앉아서 노을이 질 때까지 앉아 있었다.
***
천우가 한국으로 온 지 한 달이 지났다.
이제 그의 회사 HC투자는 여의도에 전진기지를 펼쳤다.
그는 분명 한국 국적이지만 투자회사가 지금까지 모은 돈은 전부 미국자본으로 이뤄져 있었기 때문에 본사는 미국에 두기로 한 것이었다.
달라진 건 없었다.
업무를 보는 방식도 같았고 회사가 돌아가는 분위기와 방식도 같았다.
다만 천우가 학교를 다니고 안 다니고의 차이일 뿐이었다.
지금까지 천우는 원격으로 업무를 처리해왔다.
언제나 그랬듯, 그는 회사의 방침만 세워줄 뿐이고 나머지는 HC투자가 사업을 이끌어 가는 것이었다.
언제나 같은 방식이었으나 한 가지 바뀐 것이 있었다.
슈퍼보이의 얼굴이 알려졌다는 점이었다.
찰칵, 찰칵!
천우가 집에서 나오는 길에 엄청난 인파의 기자들과 마주쳤다.
"슈퍼보이가 현보일가의 일원이었다는 소문이 사실입니까?!"
"네, 맞습니다. 바로 접니다."
"오오오!"
기자들은 술렁거렸다.
설마하니 미국 월가를 주름잡고 다니는 투자계의 신성이 바로 한국 사람이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일각에서는 미국 이민을 선택한 것이 아니냐는 말이 있었는데, 그에 대해선 계획이 없으십니까?"
"없습니다. 회사는 미국에 있습니다. 저는 대주주로서 회사를 이끌 뿐, 미국으로 돌아가지는 않습니다."
"그에 대한 뭔가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천우는 자신이 밟고 선 땅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이 땅, 한양 최 씨의 땅입니다. 우리 가문의 땅, 제가 지키겠다고 저의 조고와 약속했습니다. 조고께서 제게 남기신 이 땅, 이 이름, 가문대대로 지키고 싶습니다."
"역시···!"
기자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흥분해서 메모를 했다.
그들은 천우에게 계속해서 질문을 쏟아냈다.
"정치권과의 관계가 별로 좋지 않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그 부분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분명 좋지 않은 시기가 있었죠. 하지만 정권이 바뀌면서 우리와 정부의 관계도 사뭇 달라질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으음!"
세상이 변했고 천우는 막대한 재력과 인맥을 거머쥔 사람이 되어버렸다.
사실상 한국정부가 천우를 어떻게 해 볼 수 있는 시기는 지났다고 볼 수 있었다.
물론, 지금 당장 미국자본을 끌고 온 천우를 밟겠다고 나서는 미친놈이 있을 리도 없었다.
천우는 일본정부처럼 한국정부도 잘 요리해서 사용해보기로 했다.
"지금은 동북아가 사실상 사상최대의 공조시대에 들어왔습니다. 우리 HC가 일본정부와의 각종 협약을 통해서 투자의 교두보가 되어준 것처럼 한국에서도 상호교류에 힘을 쏟아주셨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그는 정부에 먼저 손을 건넸다.
안 좋은 기억은 조의창과 함께 쓸어 보내고 같이 돈이나 벌어보자는 얘기인데, 그걸 한국정부가 마다한다면 천우로서는 더 이상 미련 둘 필요가 없었다.
최 씨 일가가 한국핏줄인 건 맞지만 지금의 정권과 피가 이어진 건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무쪼록 한국 정부가 합리적인 선택을 하시리라 믿습니다."
주사위는 던져졌다.
저들도 기회가 두 번은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과연 그들이 어떻게 나올 지는 지켜보면 알게 될 일이었다.
< 32.(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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